“원컨대 조사께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소서”
“이곳은 오래지 않아
큰 재난을 입게 될 것이오
하루빨리 보리를 증득하시오”
살바라가 보리달마의 말꼬리를 잡아 퍼부은 공격은 얼핏 보아 논리정연한 듯 싶었다.
“정해짐이 없는 것을 실상이라고 칭하는 것 자체가 곧 정해지는 것이니 그것은 실상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조사의 말씀은 틀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해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모두 실상이라고 할 수 없게 됩니다. 조사께 삼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러 실상이라고 하는지요?”보리달마는 점잖게 응수했다.
“빈승의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실상은 불변(不變)하는 것입니다. 변한다면 실상이라고 할 수 없지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 그런 것은 실상이 아닙니다.”이 말을 듣는 순간 살바라는 눈이 번쩍 떠지는 것 같았다. 비로소 보리달마가 말한 바의 참뜻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몸을 굽혀 큰절을 올렸다.
“조사께 여쭙겠습니다. 저같은 사람도 깨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보리달마는 나직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일렀다.
“실상을 알아야만 비상(非相)을 보게 되고, 비상을 알아야만 실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매우 현묘한 도리입니다. 이를 현상 가운데서 행해 나가면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이 말을 듣자 살바라는 마음 속까지 환해옴을 느꼈다. 얼른 땅에 엎드려 거듭 큰절을 올렸다.
“조사께서 가르쳐 주신 법을 마음깊이 새겨 두고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살바라는 밖으로 나가 문도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그리고 문도들에게 종문(宗門)을 해산하고 보리달마에게 귀의할 뜻을 밝혔다. 문도들 또한 일제히 보리달마에게 예를 올리고 그 뜻에 따르기로 다짐했다.
보리달마가 온 목적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합장했다. 잠시 후 보리달마의 몸이 한 길이나 솟구쳤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살바라와 문도들은 놀라움의 정도를 넘어 할 말을 잊은 채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그러나 이런 일은 보리달마의 공력에 비추어 아무 것도 아니다. 숨을 모아 족기(足氣)를 움직이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살바라는 즉시 문도들에게 종문(宗門)을 해산한다고 선포했다. 아울러 보리달마에게 귀의할 것을 거듭 다짐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보리달마는 무상종 선관(禪觀)의 산문에 나타났다. 무상종의 승려들은 그가 28대 조사임을 알고 예의를 갖추어 불전으로 모시고 인사를 올렸다.
보리달마는 불전 중앙에 앉아 사방 가득히 들어차 있는 무상종의 승려들을 향해 합장하며 예를 표했다. 그리고 한바퀴 대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모두 무상(無相)을 신봉하신다구요. 여러분들이 말하는 ‘무상’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증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여러 승려들은 평소에 입으로 무상을 외워 왔지만 그저 그렇다고 여겼을 뿐 그러함의 연유는 알지 못했다. 얼른 대답하며 나서는 이가 하나도 없음은 당연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바라제(波羅提)라는 승려가 나서서 감히 대답했다.
“우리가 말하는 무상은 마음 속에 나타나지 않는 연고(緣故)를 가리키는 것입니다!”보리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큰 소리로 웃었다.
“묻겠는데, 그대의 마음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상인 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바라제는 서둘러 변론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무상은 결코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그것이 있을 때는 있다고 여기고, 마땅히 없을 때는 없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보리달마가 반문했다.
“이미 유(有)와 무(無)가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가 말한 두 개의 ‘마땅히’라는 말은 근거가 없는 것이 되지 않겠소이까?”여러 승려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보리달마의 지적이 옳다고 생각했다. 바라제도 자기가 말한 두 개의 ‘마땅히’라는 말이 공허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체면치레는 해야겠기에 억지인 줄 알면서도 자신들의 무지가 당연한 것인양 강변했다.
“조사께 여쭙겠습니다. 우리 불학(佛學)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삼매(三昧)를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 몇 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삼매의 진체(眞諦)에 들어갔습니까? 하물며 우리처럼 무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오죽 하겠습니까. 저는 이 문제에 대한 조사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좋소!”
보리달마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외람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이 상(相)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유와 무를 이야기할 수 있겠소. 또한 유와 무를 분명히 모르면서 어찌 삼매를 알 수 있단 말이오.”이 말을 듣자 바라제는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 황급히 땅에 엎드려 몇 번이나 절을 하며 말했다.
“조사께서 저희들을 깨우쳐 주시니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것 같습니다. 저희들의 잘못을 알겠습니다. 원컨대 조사께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소서!”다른 승려들도 다투어 몰려와 일제히 큰절을 올렸다.
“원컨대 조사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어리석은 저희들을 가르쳐 주소서!”보리달마는 깊이 생각한 뒤 말문을 열었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곳은 오래지 않아 큰 재난을 입게 될 것이오. 여러분은 널리 교화를 행하여 하루빨리 보리를 증득하시오!”말을 마치자 선관 밖을 감돌던 한 조각의 상서로운 구름이 갑자기 바람에 날려오듯 법당 안으로 들어왔다. 보리달마는 눈 깜짝할 사이에 구름에 몸을 싣고 사라졌다.
모두가 놀라서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정말로 성조(聖祖)이시다!”
법당 안에 있던 승려들은 일제히 엎드려 오랫동안 일어날 줄을 몰랐다.
이런 행적으로 보리달마는 정혜종의 바란타(婆蘭陀), 계행종의 현자(賢者), 무소득종의 보정법사(寶靜法師), 정적종의 존자 등 나머지 사대 종문의 수령들을 설복시키니, 마침내 육대 종문 모두가 보리달마의 문하로 귀의했다.
이런 일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보리달마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무상종이 자리잡고 있던 지역에 폭우가 쏟아져 엄청난 수해를 입었다. 이를 계기로 보리달마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갔다. 이로써 남천축의 교화는 뜻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세월은 흘러 60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보리달마는 청봉산의 작은 절에 머물고 있었다. 이 곳은 반야다라를 스승으로 모신 최초의 절일 뿐 아니라 산수가 그 어느 곳보다 빼어났기 때문이다. 중생들을 선공(禪功)과 불법(佛法)으로 교화시키기에 안성맞춤인 그런 곳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이미 보리달마에게 귀의한 여섯 종파의 문도들이 모두 이 곳에 와 조사를 모시면서 하늘같이 따랐다.
이 날도 전과 다름없이 장중하게 저녁예불을 올렸다. 본당 안의 보리달마는 방석 위에서 눈을 감고 입정에 들어간 지 오래되었다. 그 앞엔 여섯 종파의 문도들이 모두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입정 상태는 침묵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듯한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감실 위에 켜진 한 쌍의 초에서 갑자기 불꽃이 탁 튀었다.
보리달마가 입정에서 깨어났다. 불꽃 튀는 소리에 놀라기라도 한 듯 탄식하며 소리쳤다.
“도견왕(導見王), 죄악입니다. 죄악입니다!”
여러 승려들은 고요함을 깨면서 보리달마가 갑자기 큰 소리로 도견왕을 부르는 소리에 놀랐다. 모두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당혹스러워했다. 일찍이 전혀 그런 일이 없던 조사께서 무슨 일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동안 남천축의 향지국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향지국왕이 서거한 뒤 60여 년 사이에 왕위는 3대째 바뀌었다. 현재의 도견왕은 보리달마의 조카다. 한데 이 도견왕은 비록 이름은 도(導)견(見)이지만 할아버지나 아버지 때와는 전혀 달랐다. 조상이 숭상하던 전통을 반대하고 나아가 불(佛)법(法)승(僧) 삼보를 비방하고 훼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신하들에게 이렇게까지 말했다.
“우리 조상들은 그대들이 잘 아는 것처럼 모두 불교를 믿어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수명은 모두 길지 않아서 재위한 지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다. 불교가 아무 위력도 없음을 가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흔히 선악은 반드시 응보가 있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것은 중들이 마음 속에서 멋대로 지어 낸 것일 뿐 전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도견왕은 명령을 내려 전국의 사찰을 폐쇄시키도록 했다. 심지어는 선왕의 위패를 모신 절까지도 문을 닫으려고 들먹거렸다.
보리달마에게 이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그는 향지국으로 직접 가서 도견왕을 교화시키고 왕명을 철회토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조금 전 그가 입정에서 깨어나면서 지른 고함은 바로 그런 내심을 실천으로 옮기겠다는 뜻이었다.
보리달마 앞에 엎드려 있던 승려 가운데 바라제와 종승(宗勝)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몸을 일으켜 절을 하며 말했다.
“불법에 재난이 닥친 이 마당에 조사께서는 어떤 결단이 있으신지요? 저희에게 가르침을 열어 보여 주십시오.”보리달마는 지긋이 바라제와 종승을 쳐다보았다. 눈길이 바라제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는 바라제가 도견왕과 서로 인연이 있음을 알았다. 그를 보내면 도견왕을 설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도견왕이 삼보를 비방하고 사찰을 폐쇄하려는 것은 마치 잎사귀 하나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생각을 뿌리채 뽑아 버려야 한다!”보리달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라제보다도 종승이 먼저 나서서 고했다.
“도견왕을 설복시키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입니다. 조사께서 직접 수고하실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불법은 얕으나 제가 가서 설복시키겠습니다. 허락해 주시옵소서.”
'달마이야기·이규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 도견왕의 참회 (0) | 2008.09.20 |
---|---|
10. 바라제와 도견왕의 대결 (0) | 2008.09.20 |
8. 남천축에서의 화행(化行) (0) | 2008.09.20 |
7. 진법 하나(一)의 내력 (0) | 2008.09.20 |
6. 속인(俗人)에게 이어진 법통(法統) (0) | 2008.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