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의 작용은 여덟가지로 나타납니다”
‘이미 내 몸이 부처라면
밖에서 구할 필요가 뭔가’
도견왕 스스로 내린 결론
보리달마는 종승의 됨됨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바라제와는 공력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종승과 도견왕은 서로 인연이 없었다. 이번에 종승이 나서면 정반대의 결과로 귀결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그대가 비록 분별지는 있으나 도는 아직 익지 않았네. 그만두는 것이 좋겠구먼!”이 말을 들은 종승은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그는 보리달마가 자기를 믿어 주고 나아가서 밀어 주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만약 자기가 가서 도견왕을 설복한다면 명예와 찬사가 온통 자신에게 쏟아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28대 조사의 위신도 깎일 것이 아닌가. 그것이 싫어서 만류하는 것으로 종승은 지레 짐작했다. 그렇다고 호락호락 물러설 종승이 아니었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자기의 뜻을 관철할 심산이었다. 종승은 다시 몸을 깊숙이 굽혀 절하면서 말했다.
“조사께서 저의 소청을 받아 주실 것을 거듭 사뢰옵니다. 저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번에 가면 반드시 도견왕을 바르게 이끌고 그 모든 영광은 조사님께 돌릴 것입니다. 저는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조사님 문하의 사문입니다. 제가 도견왕을 교화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조사께서 전수하신 불법이 천하제일임을 증명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종승은 말을 마치자 보리달마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쏜살같이 나가 버렸다.
밤은 어둡고 고요했다. 일년 내내 여름같은 남천축이지만 밤바람은 제법 서늘했다.
도견왕이 사는 궁전에는 밤늦도록 등불이 휘황찬란했다. 그러나 도견왕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있어 살기마저 감돌았다. 도견왕은 책상 위에 쌓인 상소문을 대충 훑어보고는 마룻바닥에 던져 버렸다. 상소문은 한결같이 삼보(三寶)를 경시하고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매일 거듭되는 대신들의 상소와 직소에 도견왕은 짜증이 나다 못해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도견왕은 이미 마음을 굳힌 지 오래였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한 나라의 임금은 곧 천제(天帝)이거늘 불도(佛道)의 제약을 받을 까닭이 없었다. 더군다나 중들의 사설(邪說)을 들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설령 그들의 말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불도에서는 내 몸이 바로 부처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미 내 몸이 부처라면 밖에서 구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스스로 내린 결론에 그는 통쾌함을 느꼈다.
한 번씩 책상 위의 촛불이 바람결에 심하게 흔들렸다. 그 때마다 도견왕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엇갈려 주름이 잡혔다. 냉랭한 얼굴에 감도는 음산함은 섬뜩한 느낌마저 풍겼다.
이럴 때는 누구도 왕과 맞닥뜨리지 않는 것이 좋았다. 바로 그 때 내관(內官)이 고승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도견왕은 눈을 부릅뜨고 고승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먼지가 잔뜩 묻은 회색 가사를 입은 꼴이 어디서 본 듯싶었다. “언젠가 만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아아, 그렇군. 종승 대화상이 아니시오?”도견왕은 일찍이 종승이 왕궁에 탁발하러 왔던 일을 떠올렸다. 종승은 그 때 무상종의 두 번째 수좌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 밤중에 그가 왜 불쑥 찾아온 것일까? 혹시 사찰을 폐쇄하라는 명을 막기 위해 온 것은 아닐까?도견왕이 자기를 알아보자 종승은 흐뭇했다. 얼른 합장하면서 깊이 머리를 숙였다.
“늦은 밤에 이렇게 대왕을 찾아뵙게 되어 불경죄를 지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이 말에 도견왕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한 장의 상소문마저 바닥에 던지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불경죄인 줄 알면서 왜 왔소? 물러가시오!”
종승은 당황했다. 겸연쩍게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다음 더욱 공손하게 합장하며 말했다.
“대왕께 삼가 아룁니다. 빈승이 이 밤중에 온 것은 대왕께 보시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그럼, 무엇 하러 이 밤중에 나를 찾아왔단 말인가?”
도견왕은 기세등등하게 몰아쳤다.
종승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연하게 말했다.
“이번에 온 것은 대왕을 교화하기 위해서 입니다!”
도견왕은 버럭 화를 냈다.
“건방지도다! 그대가 무슨 도력이 있기에 나를 교화한다는 건가. 도대체 내가 그대에게 무슨 교화를 받을 필요가 있단 말인가!”그러나 종승은 물러서지 않았다. 도견왕의 질문을 구실 삼아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보려고 했다.
“여쭙겠습니다. 대왕께서는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리기 위해 어떤 도력에 의지하시는지요?”도견왕은 큰소리로 웃었다.
“나의 능력에 의지하오!”
“그 능력은 어디서 온 것입까?”
도견왕은 종승이 너무 빤한 질문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따위 질문엔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았다.
“나의 능력은 나라를 다스리는 가운데서 배운 것이다! 내가 요즘 너희들의 사악한 법을 물리치고 항복시키려고 하는 까닭도 나라를 다스리는 가운데 너희들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이다!”종승은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사태가 이처럼 심각하게 전개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대가 나를 교화할 도력이 있다고 했겠다. 그렇다면 그대의 도력으로 어떤 사람을 항복시킬 수 있는지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종승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앞에 있는 도견왕조차도 설복시키지 못하는 터에 또 누구를 설복시킬 수 있단 말인가! 도견왕은 종승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자 욕설과 비웃음을 한껏 퍼부었다. 마침 그때였다. 밤하늘에서 한 무더기의 흰 구름이 날아와 앞뜰을 둘러싸는 것이었다.
구름 위에는 가사를 걸친 스님이 서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도견왕은 너무나 놀랐다. 종승에게 거듭 내뱉으려던 조롱의 말을 꿀꺽 삼켜버리고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묻겠는데 구름 위의 스님은 ‘사(邪)’요 아니면 ‘정(正)’이오?”스님이 구름 위에서 대답했다.
“나는 ‘사’도 아니고 ‘정’도 아니오. 다만 ‘사’를 바로 잡으려고 온 것이오!”그 소리는 도견왕의 오만방자함을 자극한 듯 싶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도견왕은 종승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이 사승(邪僧)들을 썩 물러가게 하라!”
내관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종승을 끌어냈다. 그런 소동과는 아랑곳없이 구름 위의 스님은 이미 앞뜰에 내려와 잔잔한 미소를 품고 서 있었다.
도견왕은 비로소 그 스님이 무상종의 바라제임을 알아보았다.
종승이 보리달마의 만류를 뿌리치고 떠나갔을 때부터 가능성은 이미 없어 보였다. 보리달마도 미리 결과를 헤아린 바 있었다. 도견왕을 설득하기는커녕 도리어 불도(佛道)에 해를 입히는 꼴이 될 것을 염려하여 바라제로 하여금 지체없이 종승을 뒤쫓게 했다. 종승도 구하고 나아가 도견왕을 교화하기 위해서였다. 바라제는 보리달마의 공력에 힘입어 구름을 타고 왕궁으로 날아들었다. 그때 마침 종승은 혼쭐이 나 내몰리던 판이었다.
바라제는 도견왕 앞으로 나서더니 예의도 차리지 않고 질문부터 했다.
“대왕께서는 스스로 도(道)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찌하여 사문을 쫓아내려고 하십니까? 어리석은 소승이 무슨 법력이 있어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그 까닭이라도 알고 싶습니다.”도견왕은 내심 불쾌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응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종승도 꼼짝 못했는데 바라제인들 별수 있겠냐 싶었다. 그리고 혹시 바라제에게 무슨 신통한 법술이라도 있다면 견문을 넓히는 데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좋아요. 내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소. 그대들 승려들은 말끝마다 내 몸이 부처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부처란 말이요?”바라제가 대답했다.
“견성(見性)을 하면 곧 부처입니다.”
도견왕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대화상께서는 견성을 하셨소?”
“우승(愚僧)은 이미 불성(佛性)을 보았습니다.”
“대화상이 견성했다면 도대체 그 본성(本性)은 어디에 있는 것이요?”“본성은 작용 가운데 있습니다.”
“그게 무슨 작용이길래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거요?”
바라제는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웃었다.
“저의 불성은 제 몸 안의 작용입니다. 대왕께서 어찌 보실 수 있겠습니까?”도견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말도 일리(一理)가 있는 듯싶었다. 몸 안에서 작용한다면 밖에서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만약 내 몸 안에도 불성이 있다면 그것을 스스로 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도견왕은 노기띤 얼굴을 누그러뜨리며 부드럽게 물었다.
“대화상께 묻겠소. 나에게도 불성이 작용하고 있소?”
바라제는 도견왕의 마음이 바뀌고 있음을 반기면서 얼른 대답했다.
“대왕께서 불성을 아신다면 불성의 작용을 절로 아시게 됩니다. 대왕께서 불성을 아시지 못하시면 불성이 작용하는 것을 보시기도 어려울 것입니다.”“그렇다면 부처를 알게 되면 작용이 어떻게 나타난다는 것이오?”
바라제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만약 출현한다면 여덟 가지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덟 가지라구요? 대화상께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소?”바라제는 합장한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도견왕을 위하여 게송을 읊기 시작했다.
“태(胎)에서는 몸이 되고(在胎爲身)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 되는구나(處世爲人) 눈으로는 보게 되고(在眼曰見) 귀로는 듣게 되며(在耳曰聞) 코에서는 향내를 판별하고(在鼻辦香) 입에서는 담론이 나오는구나(在口談論) 손으로는 잡고(在手執捉) 발로는 움직이니(在足運奔) 널리 드러나면 온 우주에 다 갖추어져 있고(偏現俱該沙界) 거두어 들이면 아주 작은 티끌 안에도 담아둘 수 있느니(收攝在一微塵)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인 줄 알고(植字知是佛性) 모르는 사람은 이것을 정혼이라고 부르는구나(不識喚作精魂).”게송을 들은 도견왕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책상을 치며 감탄했다.
“옳고도 옳은 말씀이십니다! 무슨 뜻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내가 근본을 잊고 불교를 문죄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도견왕은 합장의 자세로 몸을 굽히면서 바라제에게 말했다.
'달마이야기·이규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 종승의 극락과 지옥 (0) | 2008.09.20 |
---|---|
11. 도견왕의 참회 (0) | 2008.09.20 |
9. 육종문(六宗門)을 귀일(歸一)시키다 (0) | 2008.09.20 |
8. 남천축에서의 화행(化行) (0) | 2008.09.20 |
7. 진법 하나(一)의 내력 (0) | 2008.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