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승의 극락과 지옥
총명이 가볍고 자만한 까닭에 오늘 이렇게…
“차라리 죽음 택하기로 결심
절벽위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종승의 얼굴은 차츰 창백하게…”
종승은 자존심이 대단한 승려였다. 스승인 보리달마이외엔 누구도 자기의 웃길에 들지 못한다고 말해 온 터였다. 그런 그가 도견왕에게 망신을 당하고 쫓겨났으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있겠는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자책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는 생각했다. 내 나이가 지금 100살, 20년 전인 80살 때까지만 하더라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큰소리 치던 내가 아니었던가. 지난 20년 동안은 다행히 보리달마를 스승으로 모시고 정진함으로써 어떤 행동을 해도 본분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부했었는데…. 그런 내가 불교를 부정하고 불법을 폐하려는 도견왕에게 꼼짝도 못했으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이제 ‘나’라는 존재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무슨 면목으로 스승인 보리달마를 대한단 말인가.
종승은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바위 위로 올라갔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었고 바람이 회오리쳤다. 절벽 아래는 안개가 휘감겨 밑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종승은 날씨조차도 전생의 억겁이라고 생각했다. 침통한 표정의 얼굴은 차츰 창백하게 변해 갔다. 이윽고 표정에 나타나던 마음의 굴절도 사라지고, 차츰 평안과 고요를 찾은 듯 싶었다.
종승은 감았던 눈을 떴다. 누군가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는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고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종승이 눈을 떠 보니 두껍게 이끼가 낀 바위 위에 누워 있었다. 옆에는 신선같이 생긴 도인이 미소지으며 서 있었다. 어떤 곡절인지는 모르지만 이 도인이 목숨을 구해 준 것이라 짐작했다. 종승은 몸을 일으켜 합장하며 도인에게 말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저를 구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내가 구해 주려고 한 게 아니라 그대가 죽지 않은 것일세. 아직 때가 되지 않은 듯 싶으이. 몸을 던졌으나 그대의 옷이 나뭇가지에 걸리면서 이렇게 이끼 낀 바위 위에 떨어졌으니 어찌 죽을 수가 있겠는가. 잠시 기절한 것을 내가 돌봐 준 것일 뿐이네. 한데 그대는 지극한 나이에 왜 그토록 목숨을 버리려고 했는가?”종승은 자신도 모르게 감동의 열기로 온 몸이 뜨거워 옴을 느꼈다.
“저희 사문(沙門)에 있는 자는 마땅히 법을 바르게 하는 것을 첫째의 임무로 삼아야 합니다. 저는 도견왕이 삼보를 훼손하고 불도를 폐하려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몸을 버려 책임을 져야 하거늘 도인께서 저를 살려 주셨습니다.”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종승에게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들려 줄 게송 하나가 있네. 게송을 들으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네.”“원컨대 도인께서는 어리석은 저를 깨우쳐 주시고 남은 삶을 지켜 나가게 해 주시옵소서.”신인은 종승에게 한 구절씩 또박또박 게송을 읊어 주었다.
“그대 나이 이미 100살에 이르렀으나 80년 동안은 잘못을 저질렀도다. 부처님께 가까이 가려고 몸과 마음 닦아 입도(入道)했도다. 비록 조그만 지혜 갖추었지만 너와 나를 가리는 일 또한 많구나. 만나 본 여러 현인들에게 이제껏 참다운 존경심을 가져 본 일이 없도다. 20년 쌓은 공덕인데 마음은 아직도 맑아지지 않았구나. 총명이 가볍고 자만한 까닭에 오늘 여기에 이르렀도다. 왕을 만나고도 불경(不敬)했으니 이런 결과가 온 것은 당연하구나. 이제부터라도 소홀하고 나태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큰 지혜 얻으리라. 모든 성인들은 한결같이 마음 속에 있고, 여래 역시 네 속에 있음을 알지어다.”게송을 다 읊고 나자 도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살며시 사라졌다. 엎드려 듣고 있던 종승은 그것도 모르고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은 채 합장의 예를 올렸다. 종승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깊은 명상에 잠겼다.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정적이 그를 에워쌌다.
종승을 찾아 산 속을 헤매던 사신들은 멀리 절벽 밑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스님 한 명을 발견했다. 틀림없이 종승이라고 여긴 사신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좌선하고 있는 이가 종승인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왕의 성지(聖旨)를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종승이 속히 돌아와 왕궁에서 부처를 모시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종승은 뜻밖의 성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음이 흔들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종승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기가 해야 할 바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윽고 왕궁으로 가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계율을 스승으로 삼고 죽을 때까지 이 바위를 벗삼아 본분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굳게 마음먹었다. 종승은 차분한 어조로 사신에게 말했다.
“대왕의 크신 뜻에 미치지 못하여 소승은 심히 부끄럽습니다. 이제부터는 산 속에서 지내려고 합니다. 부디 대신께서는 돌아가 대왕께 전해 주십시오. 나라 안에는 현자(賢者)가 수없이 많습니다. 특히 왕숙이신 보리달마 조사는 6종파의 모든 문중이 스승으로 모시는 분입니다. 게다가 바라제도 법이 대단히 뛰어난 고승입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대불조를 받들고 삼보를 널리 펼침으로써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복을 누리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종승은 말을 마치자 눈을 감고 입정에 들어갔다. 그의 의연한 자세는 마치 절벽 위에 서 있는 한 그루 푸른 소나무를 보는 것 같았다. 제속을 초월한 듯한 범상치 않은 기운에 사신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붙이지 못했다.
사신들은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종승의 생존을 확인한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사신들은 이 소식이라도 속히 전하기 위해 총총히 숲 속을 벗어났다. 사신들이 왕궁으로 들어설 무렵 보리달마는 대전으로 도견왕을 찾았다. 밥 먹는 것도 잊고 경전 공부에 열중하는 조카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보리달마가 들어서자 도견왕은 황급히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보리달마는 환하게 웃으며 왕의 마음 속을 살폈다. “공부가 대단하시군요. 한데 사신이 입산한 지 이미 며칠이 지났는데 종승이 돌아온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도견왕은 숙부의 지혜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추측해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우물대면서 말했다. “아직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혹시 숙부께서는 알고 계신지요?”보리달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 짐작으로는 종승은 이번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도견왕은 그 소리에 적이 실망했다. 어떻게 해서든 종승의 면전에서 잘못을 빌지 않고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도견왕은 애원하듯 보리달마에게 매달렸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요?”
“한 번 불러선 오지 않지만 두 번 부르면 반드시 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과연 그럴까요?”
보리달마가 막 대답하려는 순간, 문 밖에서 사신의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견왕은 땀 식힐 여유도 없이 곧장 대전으로 들어서는 사신에게 물었다.
“그대는 종승 대사를 보았는가?”
“신이 틀림없이 만나 만났습니다. 그 분은….”
신하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보리달마가 웃으면서 대신 이었다.
“그가 산을 내려오려고 하지 않지요?”
“그렇습니다. 종승 대사는 산중에서 은거할 결심이십니다. 결코 산에서 내려오지 않겠다고 하십니다.”“아!”
도견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달마 숙부께서 일을 헤아리는 차원이 얼마나 깊은 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숙부가 말한 대로 다시 한번 종승을 초청하기로 했다. 이번엔 왕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7일 뒤에 출발하기로 날짜를 잡고 그 동안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일렀다.
보리달마는 이쯤 해서 청봉산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도견왕에게 작별의 말을 했다.
“왕께서 이처럼 덕성이 있으시니, 마땅히 선과(善果)를 얻을 것이오. 다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왕의 건강이오. 머지 않아 병이 생길지도 모르니 각별히 주의하기 바라오.”보리달마가 떠난 뒤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도견왕은 병으로 쓰러졌다. 주변에선 불법 공부에 너무 열중하여 침식을 잊은 결과 그렇게 되었다고 수근댔다. 심지어는 종승 대사의 일로 자책과 상심을 거듭한 결과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왕의 병은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궁성 안은 발칵 뒤집혔다. 어의가 아무리 치료해도 오히려 병세는 악화될 뿐이었다. 답답한 황태자와 신하들은 백방으로 명의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문득 보리달마가 떠나면서 걱정하던 말이 생각났다. 보리달마가 길흉을 미리 알았다면 흉을 길로 돌리는 방법도 알 것이 아니겠는가. 급히 사신을 청봉산으로 보내 위급한 상황을 알렸다. 보리달마는 염려하던 일이 생긴 것을 못내 안타까워 했다. 그는 서산으로 지는 노을빛을 바라보았다. 스산하게 불어 오는 산바람은 마치 도견왕의 신음소리인양 귓가를 스쳤다. 보리달마는 왕이 왜 병이 났는지를 궤뚫고 있었다. 국왕의 몸으로 전비(前非)를 뉘우치고 근심하다가 병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고귀한 품덕인가.
보리달마의 머리 속에 도견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간절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그 모습이 마음에 와 닿았다. 보리달마는 바람을 가르며 왕궁으로 들어갔다. 도견왕은 용상에 누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숨도 고르지 못하고 창백한 얼굴이 중환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보리달마가 온 것을 보고 왕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대로 쓰러졌다. 달마는 서둘러 왕을 부축했다.
“조카, 좀 어떻소?”
“저….”
도견왕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거의 절망적인 용태였다. 마침 때맞춰 사신이 들어와 아뢰었다.
“종승 대사가 대왕의 부름을 받아 입궁했습니다. 그리고 바라제 대법사도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종승과 바라제는 보리달마가 임금의 병상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자 즉시 무릎을 꿇고 큰 절로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다시 허리굽혀 물었다.
“조사님, 어떤 방법으로 국왕의 고통을 면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보리달마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황태자의 태도를 봐야 하느니라. 황태자가 목욕 재계한 후 향을 올려 지극 정성으로 국왕의 죄를 빌고, 두루 은혜를 베풀며 삼보를 받들게 되면 병은 자연히 나을 것이니라.”황태자는 보리달마가 말한 준엄한 인과율의 처방에 그대로 따랐다.
출처:붓다피아
'달마이야기·이규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 막의(莫依)의 출현 (0) | 2008.09.20 |
---|---|
13. 영취산 대법회 (0) | 2008.09.20 |
11. 도견왕의 참회 (0) | 2008.09.20 |
10. 바라제와 도견왕의 대결 (0) | 2008.09.20 |
9. 육종문(六宗門)을 귀일(歸一)시키다 (0) | 2008.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