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이야기·이규행

14. 막의(莫依)의 출현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5:44

 

 

막의(莫依)의 출현

헝겊신 신은 시골뜨기처럼 보이는 여인

“기억에서 사라졌던 사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먼발치에서나마 보려고
속으로 ‘아미타불’ 연호
보리달마가 천축을 떠날 뜻을 밝히자 그를 막고 나선 승려들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대가 지금 도망치려고?”
“당신같은 불문의 반역자가 천축도 모자라 이번엔 동쪽 땅까지 물들이려 하다니.”온갖 힐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달마는 “아미타불!”만 연호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 무리의 승려들이 대화상의 지시에 따라 달마를 겹겹이 에워쌌다.

“여러분. 그를 법단 위로 다시 끌고 갑시다. 그가 석가모니 부처의 존엄을 해친 것을 스스로 사죄하도록 해야 합니다. 불문을 어지럽히는 사설(邪說)을 거둬들이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합시다. 그렇지 않고 이대로 놓아 보내서는 안됩니다. 더군다나 멀리 동쪽으로 도망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흥분 상태에 빠진 승려들은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보리달마에게 물리적 위해를 가하려고 했다. 아무리 공력이 높은 달마라고 할지라도 꼼짝 못하고 당할 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멈추시오!”
어디선가 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중을 압도했다. 뜻밖에도 그 소리의 주인공은 여자였다. 파란 옷에 헝겊신을 신은, 시골뜨기처럼 보이는 여인이 정사 옆 구석에서 비호같이 달려 나왔다.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던 승려들은 물길이 갈라지듯 순식간에 길을 내어 주었다. 달마에게 위해를 가하던 일단의 무리들은 행동을 멈췄다.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가 놀랐다. 이 여자가 누구고 어떻게 해서 영취산 법단에 이처럼 나타나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보리달마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여인을 본 순간 달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게 누군가. 막의(莫依)가 아닌가!”
오래 전에 기억에서 사라졌던 사매(師妹)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도 이젠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했다. 아무리 수련을 쌓고 도를 닦더라도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막의는 그 옛날, 사형(師兄) 달마가 왕궁으로 돌아가자 자신도 시골집으로 되돌아갔다. 농사를 지으면서 평생을 초야에 묻혀 살기로 다짐했다. 비록 여자 혼자의 몸이었지만 탁월한 무술 실력 덕분에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오히려 뭇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편안한 전원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녀의 가슴 속엔 달마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새롭게 샘솟곤 했다. 그때마다 다시 만날 인연이 없음을 한탄할 따름이었다.

한데 바로 그 달마가 영취산에서 불법을 강설한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그런 소문만으로도 막의의 가슴은 고동쳤다. 그러나 그녀는 망설였다. 이제는 한 나라의 왕조차 떠받드는 28대 불조인데 그 앞에 감히 나설 수는 없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회의 대중 속에 끼어 먼발치에서 옛 사형의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막의가 정사 안으로 막 들어섰을 때 법단 주변은 의외로 소란스러웠다. 그녀는 이상하게 여기면서 법단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법단 위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을 직감했다. 그때, 법단 아래쪽에서 보리달마가 일단의 승려들에게 둘러싸여 곤욕을 치루는 장면이 눈에 들어 온 것이다.

막의의 호통소리와 기세에 눌려 승려들은 일시에 잠잠해졌다. 막의는 보리달마 앞으로 나아가 공손하게 예의를 표했다.

“사형.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대화상과 승려의 무리들은 눈은 휘둥그래졌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빌미가 되기에 충분했다.

“본래 조사의 마음 속에는 부처가 들어있다고 했거늘 이제 보니 그대의 마음 속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구료.”대화상의 비아냥거리는 이 한마디에 승려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업보로다! 업보로다!”
달마는 눈을 감고 합장했다.

막의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목이 터져라 큰소리로 일갈했다.

“너희 중놈들은 할 수 없는 놈들이구나. 어찌 감히 삿된 생각으로 대조사를 모독할 수 있단 말이냐.”막의는 승려들을 밀어젖히면서 달마의 소매를 끌었다.

“사형, 이들을 상대하지 마시고 그냥 가십시다.”
막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강한 열풍이 발 밑에서 회돌이쳤다. 달마는 막의가 비장의 공법을 쓴 것을 알아차렸다.

일찍이 발타대사 문하에서 막의와 함께 배운 비법의 하나가 ‘천강(天 ) 공법’인데 바로 그 비법을 지금 막의가 쓰고 있는 것이다. 달마는 막의와 보조를 맞추며 말했다.

“알았소. 그렇게 하리다.”
달마와 막의는 마치 바람이 날리듯 훌쩍 정사의 담장을 넘어 자취를 감췄다.

“와! 대단한 공력이다.”
많은 승려들은 탄성을 지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천축의 불문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보리달마가 선학(禪學)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선공(禪功) 역시 대단하다고 소문이 나 있던 터였다. 그 소문을 바로 눈 앞에서 확인했으니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질 수밖에 없었다. 보리달마를 지지하던 승려뿐 아니라 반대하던 무리들도 이구동성으로 소리지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막의가 보리달마를 돕기 위해 쓴 천강 공법은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는 최상승(最上乘)의 선법에 속한다. 북두칠성의 기운을 아랫배 단전에 모아 단련을 쌓으면 최강의 경지에 이른다. 이 공법을 쓰면 무력을 이용한 어떤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공법은 이른바 경공(輕功) 즉 몸을 가볍게 날리는 공법의 극치를 이룬다.

정사를 빠져 나온 달마와 막의는 한달음에 영취산을 벗어났다. 그제야 보리달마는 발을 멈추고 막의에게 합장하며 예를 갖추었다.

“사매. 도와 줘서 고맙소.”
막의도 옷매무새를 바로 하며 답례했다.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한데 아까 듣자하니 사형께서 동쪽 땅 진단으로 가신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인지요?”“그렇소.”
달마는 굳은 의지를 나타내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막의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천축 땅이 이렇게 넓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갈구하는 사람도 수없이 많은데 이 곳을 떠나신다니 알 수 없는 일이군요. 설마 사형께서 선법을 베풀 곳이 이 땅엔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보리달마가 탄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날, 천축의 불문이 이처럼 많은 종파로 갈라져 파쟁을 일삼는 상황에서 선종의 힘은 약할 수밖에 없소. 나 한 사람만 떠난다면, 분쟁도 수그러들 것이고 선종 또한 안녕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나도 마음이 편안할 것이고….”막의가 말했다.

“사형께서는 27대 조사이신 반야다라 존자의 전법제자라고 알고 있는데, 28대 조사의 자리를 그토록 쉽게 버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달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비록 선종이 아직은 힘이 약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숲의 나무들과 같이 많소. 선종의 법통이 나로 끝날 수도 없거니와 뒤를 이을 것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소. 반야다라 조사께서는 오래 전에 나의 인연이 동녘 땅에 있다고 하셨소. 그래서 그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오. 그 땅에서 선종을 빛내면 그 또한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소.”막의는 사형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동녘 땅으로 가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이미 확고하게 결정된 이상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막의는 길게 한숨지었다. 그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사형. 진단으로 가는 길은 산 높고 물 깊어 위험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부디 만사를 헤아리시고 옥체를 보전하시기 바랍니다.”“사매. 그토록 마음을 써 주어서 정말 고맙소.”
“그럼, 이만.”
순간. 막의는 쏜살같이 몸을 날려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사라진 길에 한 줄기 바람이 일었다.

달마는 막의가 사라진 곳을 향해 목례의 눈길을 보냈다. 이 순간 달마의 마음은 명경(明鏡)같았다. 은은하게 파고들던 막의에 대한 애뜻한 감정은 흘러가 버린지 이미 오래였다. 그의 마음은 장중함과 신성함 그리고 평안함과 상스러움 속에 제자리를 잡고 있었다.

달마는 생각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은 자성(自性)을 떠나지 않는 것이요, 자성은 본디부터 깨끗하고 고요한 것이다. 자성은 본래 생멸하지 않고, 원래 스스로 구족(具足)한 것이요, 자성이 동요가 없어야 능히 만법을 생(生)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스스로 본성을 볼 수 있어야 비로소 능히 성불(成佛)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리달마는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막의를 만나 한 차례 뜨겁고 차가운 인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한 것에 대해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더욱 마음을 가다듬어 입 속으로 ‘아미타불‘을 연호했다.

보리달마는 발길을 재촉해 저녁 무렵 도견왕의 왕궁으로 돌아왔다. 건강을 되찾은 도견왕은 태자와 귀족 그리고 근신들을 거느리고 친히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뿐만 아니라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불조인 숙부의 노독을 달래 주었다. 달마는 영취산 대법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감개 어린 목소리로 결심을 내비쳤다.

“종파의 편견과 싸움이 너무나 극심해서 탄식만 나올 뿐이오. 스승 반야다라 조사께서 일찍이 훈계하시기를 나의 불연(佛緣)은 남천축에서 일어나 동토(東土)에서 익는다고 하셨소. 손을 꼽아 헤아려 보니 이제 동녘에서의 인연이 무르익어 교화를 행할 시기가 된 것 같소이다. 내 생각으로는 이제 서둘러 진단으로 갈 준비를 시작해야겠소.”도견왕은 숙부의 말을 법처럼 중시했다. 그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레 여쭈었다.

“숙부님의 선광(禪光)은 그 곳 중생을 널리 비춰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데 이번에 동토로 가시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는지요?”달마가 대답했다.

“내가 이번에 가면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 인연이 무르익고 법이 전해지면 마땅히 돌아와야지요.”도견왕은 달마의 이 말이 진정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미 숙부의 나이가 100세가 넘었는데 어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수 있단 말인가. 도견왕은 서글펐다.

“이 나라는 무슨 죄를 지었고, 동쪽 나라는 또 무슨 복이 있어 숙부께서 떠나시는지요? 부디 이 곳을 잊지 마시고 꼭 돌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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