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색성향미촉법 無色聲香味觸法
☆ 위빠사나 수행이란?
언제부터인지 위빠사나 수행법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이 위빠사나 수행이 마침 반야심경의 지금 설명드리는 대목과 관련이 있어 언급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전체적 의도가 위빠사나 수행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미얀마, 스리랑카 등 남방불교권(소승불교라는 말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능하면 쓰지 말아야 합니다)의 주된 수행방법입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그 전파가 중국-한국-일본으로 전파된 것을 북방불교라 하고, 스리랑카-미얀마, 태국 등으로 전파된 것을 남방불교라 합니다. 그런데 흔히 북방불교는 대승불교이고 남방불교는 무조건 소승불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큰 오해입니다. 불법을 실천하는 정신이라는 측면에서 편의상 대승과 소승을 구별하여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남방불교를 모두 소승불교라 말하는 것은 아주 큰 병폐입니다.
내면을 보면 한국불교야 말로 도리어 소승불교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소승은 혼자 깨달음을 추구하고 다른 이는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승 쪽의 비판인데, 한국불교가 어디 제대로 혼자라도 '깨달음'을 강렬히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더욱이 소승의 깨달은 자인 독각獨覺을 모신 독성전이 있고, 스님들과 신도들도 그 독각에 예배하고 기도하는데 한국불교가 대승불교운운하며 그들을 소승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가 말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들어난 사정이고, 잘 드러나진 않지만 수행의 측면에서 한국불교의 간화선 최고주의와 남방의 위빠사나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이 문제는 위빠사나 수행법을 이해하셔야 설명이 가능하니, 지금부터 간단하나마 위빠사나 수행법을 설명하겠습니다.
위빠사나는 아함부 경전 중 '대념처경'大念處經이라는 경에 의지합니다. 부처님도 하셨다는 이 위빠사나 수행법은 한 마디로 '마음 챙김'입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는' 수행법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확대 해석하는 어떤 이는 육조단경 좌선품의 생각생각 중에 청정한 자성을 보라(念念中 自見淸淨心)고 하였듯이 위빠사나 수행을 의식의 흐름을 관하는 돈오적 수행이라고 까지 주장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갖다 붙임'입니다. 위빠사나의 '마음 챙김'의 대상은 몸, 느낌, 마음, 법(身受心法)의 네 가지입니다. 이를 사념처라 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신념처身念處 자신의 몸을 부정不淨하다고 관하는 것입니다. 이 관법은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는데 제일입니다. 즉, 이성을 보고 성욕이 일어나면 그 이성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신체를 포함하여 사람의 신체는 똥, 오줌, 고름, 가래로 가득하다고 마음을 '챙기는 것'입니다.
둘째, 수념처受念處 바로 앞에 도표로 정리한 안 · 이 · 비 · 설 · 신 · 의 (육근)의 감각의 느낌들이'고苦다'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제가 ‘수受에서 업이 시작된다, 색色이 내 업을 일으킨다고 색을 탓하지 말라'고 한 말을 기억해 내셔야 합니다. 즉, 어떤 비싼 옷이 좋아 입고 싶은 욕심이 나면 그 옷을 생각하는 마음을 돌려 입고 싶어하는 마음'그 자체를 알아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옷을 꼭 입어야 하는 이유가 사실은'허망한 마음'이라고 마음을 챙길 수 있습니다.
셋째, 심념처心念處 마음을 무상無常 하다고 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상은 '항상 한 것은 없으니 지금 순간에 집착하지 말라'라는 의미이지 허망하다, 덧없다,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한국불교의 신도들에 대한 근시안적 설명법의 문제 중 하나이지만 무상을 말할 때 대부분 그런 식으로 해놓으니 불교를 모르는 이들이 ‘불교는 허무주의 종교’라고 말할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심념처의 핵심은 지금 이 순간 내가 확신하고 있는 마음도 사실은 영원히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말해 나의 지금의 확신이 언젠가는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챙기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넷째, 법념처法念處 제법諸法이 무아無我라고 관하는 겁니다. 이 '제법무아'야 말로 불교의 기본 전제인 삼법인三法印이라는 진리 중 가장 핵심적인 말입니다. 즉, 우리가 이것이 진리다, 저것이 진리다라고 생각하는 그 법이 사실은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관하라는 뜻인데 너무 어렵고 설명하려면 또 책 한 권이 나와야 하니 이쯤만 해두겠습니다. 다만 이 제법무아가 반야심경의 공空과 둘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기억해 두십시오. 위빠사나 식으로 설명하면 '진리에 집착하지 말고 진리를 추구하는 현재의 그 마음을 챙겨라'입니다.
이제 제가 곤혹스러울 차례가 된 것 같은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위의 위빠사나의 수행의 핵심인 사념처에 대한 저의 설명을 보시고 간화선을 수행하는 분들은 '위빠사나를 너무 광범위하게 해석했다'고 하실 것 같고, 위빠사나를 수행하시는 분은 '설명이 추상적이고 세밀하지 못하다, 그게 다가 아니다'라고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습니다. 솔직히 저는 간화선만 하는 수행자도 아니고, 또 위빠사나 수행만을 하는 수행자도 아니니 당연히 그런 말을 들어도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는 한국불교에 이 점만은 꼭 밝혀 두고자 합니다.
간화선의 몰록 깨닫는 돈오법이 아니면 수행의 가치가 없다는 쪽에 대해서는, 간화선법으로 온전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1,000여 년 동안 몇 명이였으며 간화선의 병폐로 무늬만 선禪을 추구하는 무리가 양산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 간화선이 100점짜리 수행법이라 해도 이를 수행해 10점 밖에 이룰 수 없고 위빠사나가 설령 50점짜리 수행법이라도 20점을 받을 수 있는 수행방법 중 하나라면 엄밀히 말해 오히려 부분적으로 사람에 따라 권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더욱이 위빠사나를 오히려 간화선법에 대항하는 더 나아가 간화선법을 가로막는 열등한 수행법 이라고 매도해야 할 근거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장은 간화선이 아니면 궁극적 깨달음이 없다는 데까지 이르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엔 위빠사나의 입장에 대해 한마디 하렵니다. 간화선은 실제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수행법이 아니고 방편으로 나온 수행법이고, 위빠사나는 대념처경 등에 분명히 있으니 이것이 성불成佛의 수행법이라고 확대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반불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이 곧 최고의 수행법이라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쉽고 편리한 것이 우리에게 항상 최고를 보장해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거론하면 공연히 '저 놈이 양비론으로 은근히 제 공부 자랑한다'는 소리 들을까 봐 그만하렵니다. '양비론'은 제가 아주 싫어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고작 몇 줄의 견해 표명으로 핏대 올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줄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반야심경의 본래 해설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설명드린 반야심경의 '안 · 이 · 비 · 설 · 신 · 의'(육근)와,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육경)이 모두 공空 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 육근과 육경을 더한 12처를 관하여 각각 '마음 챙김'을 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법이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길어진 것입니다. 골치 아프니 제 마음에 쏙 드는 비틀즈의 노래 가사를 소개해 드립니다. 물론 그냥 소개해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마음 챙김'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곡이라 아마 아실 겁니다.
연주 : 비틀즈
연주 : 숙명 가야금 연주단 [베스트 컬렉션 2006 'For You'] 렛 잇 비 let it be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내가 번민에 헤매고 있을 때) Mother Mary comes to me(관자재보살이 내게 다가와 말 합니다)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그 지혜의 말씀은 그냥 놔둬라.) And in my hour of darkness(또 내가 암흑의 시간 속에 헤맬 때도)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관자재보살이 내 앞에서 지혜로운 말씀을 하시죠)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그 지혜의 말씀은 내버려 둬.) Let it be, let it be.( 놓아버려라, 집착하지마라.)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그 지혜로운 말씀인 순리에 맡겨라) And when the broken hearted people(세상의 마음의 상처받은 사람들) Living in the world agree,(살아가며 통하는 말)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답은 고통에도 마음 두지 마세요)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there is (사람은 혹시나 헤어져도)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다시 만날 기회는 아직 있는 거예요)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그래서 답은 그대로 두는 거예요) Let it be, let it be. Yeah(그래 놔둬봐요, 놔둬바)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분명히 해결은 그냥 지켜보는 거예요)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밤이 와 세상도 나도 어두워져도)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그래도 나를 비추어주는 등불은 있습니다) Shine on until tomorrow, let it be.(내일이 올 때까지 비출 수 있는 말, 마음을 잃지 말아라). I wake up to the sound of music(내가 음악 소리에 잠을 깨면) Mother Mary comes to me(관자재보살은 내게 다가와)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그 지혜의 속삭임을 들려주시죠. 집착하지 말아라) Let it be, let it be.(자 나둬 봅시다, 집착하지 맙시다)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진실한 해답은 그냥 순리에 맡기는 거예요) Let it be, let it be,(그래요 맡깁시다, 순리 그 자체에)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그 지혜의 한 단어는 오직 집착하지 말아라예요)
영국의 전설적 그룹인 비틀즈의 Let it be란 곡입니다. 제가 번역을 해보았는데, 불교적으로 약간 의역을 했습니다. 원래 Mother Mary는 고유명사화 된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를 뜻합니다. 하지만 '어머니' 또는 이 반야심경을 설하는 '관자재보살'이라 생각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듯 합니다. 그래서 Mother Mary를 관자재보살로, 반복되는 Let it be를 불교적 분위기를 위해 전부 다르게 표현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중이 이 정도면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 본 내용은 성법스님 저서인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