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야기·지묵스님

“익숙한 것은 설케 하라”/지묵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2. 12. 02:56

 

 

“익숙한 것은 설케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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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혹 사은삼유(四恩三有)에 보답치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있느니라.”

학인 스님이 여쭈었다. “누군데요?”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네 질문 속에, 부친을 죽인 대역죄인은 어떻습니까? 하는 말이 빠져있어!”

강설 / <치문>의 첫장 위산 대원선사(僞山大圓禪師, 771~853)의 경책(警策)에서 출가한 사람의 의무를 말하는 대목에 사은삼유(四恩三有)가 나온다.

“용보사은(用報四恩) 네 가지의 은혜에 보답하면서 발제삼유(拔濟三有) 삼계 고뇌 중생을 제도할지니.”

네 가지 은혜는 첫째 부모의 은혜, 둘째 국왕의 은혜, 셋째 중생의 은혜 혹은 시주(施主)의 은혜, 넷째 삼보의 은혜 혹은 스승(師長)의 은혜를 말한다.

승속을 막론하고 은혜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은 대역 죄인이나 다름없다. 이런 류의 사람이 적지 않아서 이제는 사은을 모르는 사람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갓 입산한 초심자도 네 가지 은혜를 젖혀두고 어떻게 하든지 편히만 지내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은혜를 아는 일은 덕을 세우는 기초이다. 기초가 없이 어찌 고층누각을 세우랴. 입신출세하려는 사람이 종횡 날뛰어도 기초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

    

거울에 비친 얼굴과

본 얼굴모습이 똑같듯이

답은 언제나

묻는 그 자리에 있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화상의 뜻은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무시설처(無施設處, 뜻이라고 내놓을 만한 게 없음)니라.”

강설 거울에 비친 얼굴과 본 얼굴 모습이 똑같듯이 답은 언제나 묻는 그 자리에 있다. 천착하지 않으려는데 또 앞서 간 건가.

조주스님이 법상에 올라 이르셨다.

“형제 여러분! 꼭 말한다면 지난날의 습관만을 고치고 수행할지니라. 만약 지난날의 습관을 고치지 않고 수행한다면 그대를 얽매는 것이 많느니라.”

강설 / 옛말이 있다. “설은 것은 익숙케 하고 익숙한 것은 설케 하라.”

익숙한 것은 시비분별하는 마음이고 설은 것은 구도심이고 출가정신이다. 재가의 초심 불자들이 절에 입문하여도 이런 교육이 잘 안된 까닭에 익숙한 것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향이 많다. 절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 의심스럽다.

불자 모임을 삼보와 별 상관이 없는 친목단체로 안다. 때문에 세속의 습관 그대로를 유지하는 신행단체는 늘 시비에 휩싸인다.



조주스님이 또 이르셨다. “늙은 중이 그새 보낸 세월이 30여 년간일세. 여기서는 여태 선사라고는 온 사람이 미증유 일일세. 설사 다녀갔다 해도 1숙박1식하고는 더 잘 먹으려고 떠나고 등 따뜻하게 쉬려는 데로 급히들 떠났느니라.”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홀연 선사가 나타난다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3만근짜리 활은 생쥐 새끼 잡는 데에 쓰지 않아.”

강설 / 어리석은 출가자는 세속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채우려고 한다.

부귀에 찌든 사람은 부귀를 쫓고 명예에 굶주린 사람은 명예를 위해 일평생을 보낸다. 아깝다, 천하 보검을 무우 자르는 데에 쓰다니!

조주스님의 법문이 어찌 이리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실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설사 다녀갔다 해도 1숙박1식하고는 더 잘 먹으려고 떠나고 등 따뜻하게 쉬려는 데로 급히들 떠났느니라.”

구산선문 도량 보림사에 와서 지낸지 200여일. 대중이 없이 지낸다는 게 힘든 일이나 결국은 상좌가 100일 기도를 마치고 떠나서 혼자신세이다. 새벽 도량석, 종성, 예불 기도를 혼자 마쳐도 아직은 그런대로 지낼만하다. 이 도량에 선사가 왔다 가셨는가. 오셨다 해도 공부 하는 선방시설을 탓하고 떠나갔다.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