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야기·지묵스님

“장님이나 귀머거리라야 도를 얻는다”/지묵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2. 12. 02:53

 

 

“장님이나 귀머거리라야 도를 얻는다”

조주어록 보기 22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진정한 교화는 흔적이 없으며 스승과 제자가 없다는데 이때라면 어떨까요?”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누가 그대에게 질문을 하도록 하였는가?”

학인이 말하였다.

“딴 사람이 시킨 게 아닙니다.”

이때 조주스님이 학인을 한방 먹였다.

강설 / 스승과 제자가 여기 지금 재현되는 줄 모른다. 그런 학인에게는 10방망이를 먹여야 할 것이다.

스무해 전의 일이다. 한 행자가 있었다. 그가 무소유 선지식을 은사로 정하려고 한 일화이다. 무소유 선지식을 찾아 방방곡곡을 헤맨 끝에 간신히 한 스승을 만났다. 스승의 방안에는 목침 하나가 덜렁 놓여 있었다. 한 행자는 쾌재를 불렀다.

“옳다, 이분이야말로 무소유시구나!”

왠걸. 그 역시나 뒷방에 가득 물건이 쌓여있음을 한달후에 알고 크게 실망하였다는 이야기.

흔적이 있고 없고 그런 따위 자로 들어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목침이 하나 있고 없고 따위로 선지식을 평가하다니!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이 깨달음의 일은 어떻게 해내야 좋을까요?”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산승은 그대를 괴이쩍 하게 여기네.”

학인이 말하였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산승은 그대가 해내지 못한 걸 괴이쩍 하게 여긴데도.”

학인이 여쭈었다.

“보림을 해야 합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보림을 할 것인지 보림을 하지 않을 것인지는 그대 스스로 살펴보시게나.”

강설 / 보배를 손안에 쥐고도 밖으로 보배를 구하려고 천신만고 헤매는 사람은 일천 부처님도 가르쳐 주지 못한다.

보림은 일을 마친 사람이 법문을 하는 데 사람에 따라 걸리는 과정을 말한다. 예컨대 경허 스님의 경우, 깨달음은 즉시 온 것이나 깨달음을 이웃에게 전하는 과정은 몇해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어둠 속에서 일순간 광명을 보았을 때를 생각해보자.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광명의 세계를 바로 볼 수가 있는 이치이다.

깨달은 사람은 극과 극이 서로 통하듯이 중생계와 불계가 하나로 통한다. 이와 같이 하나가 된 세계에서는 좀 정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생활한 방식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세계에 익숙해지려면 한 과정이 없을 수 없다는 이야기.

 

“눈먼 장님이나, 귀머거리라야 도를 얻는다”

 즉, 눈과 귀가 열려야 큰 병통이 생겨난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어떤 사람이 무지해인(無知解人, 번뇌 망상 알음알이가 사라진 사람)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무슨 일을 말하고 있는가?”

강설 / 묻는 그대가 지해인(知解人)이다. 이 바보 멍충아!

언제 들어도 조주 스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살아있는 법문이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달마 조사께서 서쪽 중국으로 오신 까닭은?) 뜻은 무엇입니까?”

이때 조주스님이 선상(禪床)에서 내려오셨다.

학인이 말하였다.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늙은 중은 아직 말한 것이 없어.”

강설 / 노승이 선상에서 내려오신 까닭은?

있는 그대로 보아 주시기를 바란다. 중생의 병이 골수에 맺혀서 불치의 병에 이를 지경이다. 옛사람이 한 말씀.

“눈먼 장님이나 귀머거리라야 도를 얻는다.”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린데서 큰 병통이 생긴 것이다.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