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주 멀고 먼 것 같습니다. 어떻게 용심(用心, 마음 씀씀이)해야 하나요?”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고인이거나 그 뒤 고인이거나 천하를 손아귀에 넣었어도 임종에는 어떻던가? 한 푼 반 푼어치도 가져가지 못하고 무일푼인 걸 그대 보았지?
강설 / 한 부자가 임종에서 후손에게 남긴 유언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만 한 명 유언이다.
“이 빈손을 관 밖으로 내놓아다오. 모두가 나처럼 모으는 데에만 신경을 쓰다가 값진 인생을 허투루 하게 쓰지 않도록 말이야!”
자기를 보라, 이렇게 허망하게 빈손으로 떠나는 자기를 보라, 하는 표현은 다분히 선기(禪機)가 넘친다.
무소유를 정확히 말하면 소소유(少所有)란 말이 어울린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진정 무소유가 있을 법한 일인가. 마음 씀씀이가 그렇다고는 하지만 마찬가지이다. 소유를 줄이고 산다는 말이라야 거짓이 아니다.
사람이 육신을 가진 이상에는 최소한의 생필품은 있어야 한다. 때문에 추상적인 관념에 빠져 무소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현실 생활에 비추어 거짓말을 한다. 이런 무소유자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무소유!”
똑똑하게도 무소유 주장 자체가 모순인 줄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벌써 무소유 하나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는가.
“스님의 일구는 어떤 것입니까”
조주스님 “반 구절도 없다네”
“어찌 큰스님께 없겠습니까”
“늙은 중은 일구랄게 없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세상 사람이 보배를 귀하게 여기듯이 출가 사문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어서, 어서 입 좀 다물게!”
학인 스님이 여쭈었다. “입을 다물었다면 또 없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입을 다물지 않고 어떻게 귀함을 알겠는가?”
강설 소위 입을 다물고 있다는 사람이 말한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우습다. 이런 우스운 일이 주변 도처에 깔려있다.
“저는 제 눈을 봅니다.”
“저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조주큰스님의 일구(一句, 화두 같은 법문)는 어떤 것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반 구절도 없다네!”
학인 스님이 여쭈었다. “어찌 큰스님께 없겠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늙은 중은 일구(一句)랄 게 없어!”
강설 / 일구를 던졌는데도 일구를 또다시 묻는 어떤 스님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일 것이다. 차가 떠난 다음에 손을 들지 마시고 밥을 신나게 먹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밥을 차릴까요? 하고 묻지 마시라. 소위 뒷북치다가는 하루해가 저물고 일생마저 기운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어떻게 해야 혹(惑)함에 꺾이지 않을까요?”
이때 조주스님이 발 한쪽을 쭉 내뻗으셨다.
어떤 스님이 곧 신발을 내놓았다.
조주스님이 발을 구부리고 일어셨다. 어떤 스님이 영문을 몰라 말없이 그대로 있었다.
강설 / 마음을 읽지 않고 겉모양만 따라가는 사람은 마치 눈이 감겨진 술래가 귀로 들리는 요령 소리를 쫓아다니며 허둥대는 격이다.
어떤 공무원이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일체 중생이 부처님을 향해 귀의불(歸依佛)! 하였지요. 헌데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일체 중생이 어디를 향해 귀의불! 해야 합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중생은 없어!”
어떤 학인 스님이 여쭈었다. “지금 중생이 큰스님께 여쭙고 있는데요.”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그럼, 새삼 무슨 부처를 찾지?”
강설 / 부처와 중생의 이분법만을 생각하는 머릿속에는 양손에 물건을 쥐어주듯 가르쳐줘도 알 길이 없다.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