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야기·지묵스님

“묻고 또- 묻는데-!”/지묵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2. 12. 03:00

 

 

“묻고 또- 묻는데-!”

조주어록 보기 27 


부처님과 중생 차이 묻는 것은

노숙자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를 묻는 거나 다름이 없다

마음이 열리면 분상에서는

부자가 노숙자요 노숙자가 부자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부처는 무엇이며 중생은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중생이 바로 부처! 부처가 바로 중생!”

학인 스님이 여쭈었다. “양쪽을 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중생 쪽은요?”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묻- 고- 또- 묻- 는- 데-!”

강설 / 부처님과 중생의 차이를 묻는 것은 노숙자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를 묻는 거나 다름이 없다. 마음이 열린 분상에서는 부자가 노숙자, 노숙자가 부자! 노숙자가 다시 묻는다. “가난한 사람은 어느 쪽입니까?” 산승이 답한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를 묻고 또 묻는 그대로군!”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대도(大道)는 뿌리가 없다는데 어떻게 해야 쉽게 설명 합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그대가 바로 쉽게 설명하는구먼!”

“뿌리가 없다는데 다시 자랄 수가 있겠는가?”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이미 뿌리가 없는데도 그대는 어디에다 얽어매고 있는가?”

강설 / 옛날이나 지금이나 쓸데없는 걱정거리로 소일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돌아오지도 않은 장래 일을 걱정하고 이미 지나버린 과거 일을 걱정하고 지금 일어나는 일 중에서도 급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매달려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다. 속말로 머리가 안 좋으면 공연한 걱정거리가 태산이다. 귀중한 인생을 이렇게 망상번뇌로 허비한 데 대하여 달마스님이 이르신다. “마음공부 하나가 천만가지를 다 해결한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정수행(正修行)의 길을 걷는 사람도 귀신에게 들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들키니라.”

여쭈었다.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말- 하- 는- 것-!”

“그렇다면 수행(修行)치 않겠습니다.”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수- 행- 해-!”

강설 / 수행을 말로 하는 사람이 명상센터나 선방에 부지기수.

진정 수행을 하려는 사람은 수행이라는 말도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한 나그네가 산승에게 말하였다.

“저는 지금까지 지리산에서 수행을 하다가 왔습니다.” 스스로 수행하는 사람이라니! 이런 사람치고 수행인다운 사람이 별로 없다.

조주스님이 마지막에 수- 행- 해- ! 하고 끊어서 하신 말씀이 퍽 인상적이다. 그렇게 말로 수행을 하는 사람은 수행을 해도 이로울 게 없고 수행을 하지 않아도 이로울 게 없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둥근 달이 홀로 창공에 우뚝한데 광채는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그 달은 어디서 생겨났느냐?”

강설 / 달을 묻는 그대는 어디서 생겨났느냐?

이런 기회에 다른 시각의 차이에서 우리 마음의 작용을 살펴본다.

첫째 작용은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는 까닭에 공(空)이다.

소위 반조(返照)하는 수행인데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유턴(U-turn)하여 자기 본성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보고 들을 때에 그냥 보고 듣는 데만 치중하지 않는다.

볼 때에 무엇이 보는가를 묻는다. “무엇이 보는 자인가?”

들을 때에 무엇이 듣는가를 묻는다. “무엇이 듣는 자인가?”

둘째 작용은 마음이 밖으로 향하는 까닭에 연기(緣起)이다. 보면 본 데로 흘려버리고 들으면 듣는 데로 흘려버린다.

여기서 부처님과 중생의 마음 씀씀이가 다르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곧 부처님은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여 공(空)인 반면 중생은 마음이 밖으로 향하여 연기(緣起)를 반복한다.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