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야기·지묵스님

“어떻게 번뇌를 면할까요?”/지묵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2. 12. 03:01

 

 

“어떻게 번뇌를 면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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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듣자온데 화상께서, 도는 수행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수행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다만 물들지 말라고 하신 말씀인데요. 물들지 말라는 말씀은요?”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안팎을 점검해 본다는 말일세!”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스님께서도 점검하십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점- 검- 해 !”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스님께 무슨 허물이 있어서 점검하십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그대는 이보다 다른 무슨 일- 거- 리- 라도 있지?”

강설 / 청정본연(淸淨本然)으로 사는 사람은 물든다는 말에 어폐가 있다. 청정본연 그대로인데 물들기는 무슨 물이 드는가? 물이 든다면 청정본연이 아니다.

그러나 덕이 높으시고 하심(下心) 제일이신 조주스님은 늘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안팎을 점검하며 사신다. 알찬 알곡들로 가득 찬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이치인가.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은 공부를 할 것이 하나도 없으나 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하여 늘 부족한 자신을 깨닫는다. 역사 공부가 부족하고 외국어 공부가 부족하고 철학 공부가 부족하고 참을성이 부족한 줄을 안다.

하면 할수록 부족하고 작아지는 자신을 본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천지가 고향 아닌 곳이 없다

그래서 타향과 고향의

구분이 사라지고

가는 곳마다 고향이다
  
 
조주스님이 법상에 올라 이르셨다.

“이 마음의 도리는 마치 손바닥 안에 든 명주(明珠)와 같느니라. 검은 사람이 오면 검게 비치고 흰 사람이 오면 희게 비치느니라.”

강설 / 도인은 명주(明珠)와 같은 청정한 마음의 소유자. 진흙 속에 던져도 진흙에 더럽힘이 없다.

원문 호래호현(胡來胡現) 한래한현(漢來漢現)은 변방의 오랑캐가 비치면 변방 오랑캐 모습이 나타나고 중국 한족이 비치면 중국 한족 모습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조주스님이 또 이르셨다. “늙은 중은 한 줄기 풀 이파리를 가지고 장육금신(丈六金身=18자 금동불) 부처님으로 쓰지. 다시 장육금신 부처님을 가지고 풀 이파리로도 쓰느니라. 이 까닭은 부처가 바로 번뇌이고 번뇌가 바로 부처인 탓일세.”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부처는 누구에게 번뇌가 됩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모든 사람에게 번뇌가 되느니라.”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어떻게 번뇌를 면할까요?”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면하면 뭘 할 것인가?”

강설 / 마음이 열린 사람은 천지가 고향 아닌 곳이 없다. 그래서 타향과 고향의 구별이 사라지고 가는 곳마다 고향이라 만나는 사람마다 고향사람.

이와 같이 마음이 열려 무위법의 국가 국민이 되면 중생과 부처의 구별이 사라진다. 이 단계를 지나 다시 유위법 국가의 국민이 되면 장육금신 부처님이거나 풀 이파리거나 매한가지로 자유자재이다.

유위법에 갇히면 탐욕과 이름에 얽매인다. 업력으로 태어난 중생은 줄곧 유위법 국가의 국민.

무위법에 갇히면 역시 왼손에 물건을 들었다가 오른손으로 바꿔 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대로 직언한다면, 무위법 국가의 국민이라고 자처하는 수행자의 무리도 한낱 수행이라는 이름에 갇힌 채 삶의 한쪽으로 치우쳐 사는 것이다.

무위법도 떠나야 한다. 무위법 자체가 그런 것이다. 유위법 국민으로 다시 돌아가야 잘한 일이다.

공식화 한다면 중생의 유위법→ 수행자의 무위법→ 깨달은 사람의 유무위법이란 공식도 나올 법하다.

법문의 흔한 비유인 연꽃처럼 말이다. 사바의 진흙탕 속에서 청정함을 유지하는 힘을 가졌다면 바른 수행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원은 시작이 끝과 맞물렸을 때 완성. 시작과 끝이 아직 보인다면 완성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이다.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