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야기·지묵스님

“무몽(無夢)이 대몽(大夢)!”/지묵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2. 12. 03:34

 

 

“무몽(無夢)이 대몽(大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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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스님이 법상에서 대중에게 이르셨다. “이 늙은 중은 그 동안 본분사(本分事)로 학인을 접대(接對)했느니라. 누가 이 늙은 중을 시켜서 학인의 근기에 따라 접대하라고 한다면 자연 삼승12분교를 가지고 할 터인데, 이런 정도에서도 못 알아차린다면 그 허물은 누구의 탓이겠는가? 뒷날에 좋은 선지식을 만난다면 아마 이렇게 평하리라. 그 늙은 중은 학인을 버리지 않았네! 앞으로도 법을 물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오직 본분사만으로 학인을 접대할 것이니라.”

강설 / 후학을 지도하는 선지식의 소신은 올곧게 본분사만으로 깨우치려는 법도에서 좋은 귀감이다.

본분사는 깨달음만을 밝히도록 화두 의문만을 던져줄 뿐 힌트나 해답을 주지 않는다. 소에게 풀만 먹이는 방법. 소가 잘 자라지 못하는 건 차후 문제. 천재교육이 그런 것이다. 정예의 소수 깨달음을 잇는 선지식이 이런 방법으로 전등조사 자리에 오른다.

사람이 귀하고 제자가 귀하다고 해서 인정을 써서 쉽게 타협하지 않는 가풍이다. 원칙에 충실하여 제자가 바른 길로 바로 들어서도록 하는 게 선지식의 역할이다. 한발 물러서서 선의 정신을 굽히는 자세는 일체 용납지 않는다.

요즘 한 스님이 법상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시라. 본분사를 젖혀두고 자기 자신의 기도 영험 이야기를 자주 하는가 하면 세상 잡사를 이야기하다가는 엉뚱하게 욕설과 비어(卑語)를 쓰는 경우도 드물게 본다.



어떤 사람이 여쭈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즉심시불(卽心是佛, 마음이 바로 부처)이라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마음이 아닌 것을 학인이 헤아려 상량(商量)하도록 해 주십시오.”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허, 마음 그대로인 것은 그대로 놔두더라도 그대는 무엇을 헤아려 상량하려고 하는가?”

강설 / 즉심시불은 마조스님의 어록에 나오고 비심비불(非心非佛,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님)도 마조스님의 뒷날 가르침에 나온다.

 

천하영웅 모습 갖췄어도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대장부라 할 수 없듯이

부처님 모습 갖췄어도

마음이 다르면 자격없어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옛 거울은 닦지 않아도 밝게 비칩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전생은 인(因)이고 금생은 과(果)니라.”

강설 / 닦음이 없이 어찌 좋은 결과를 기대하랴!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삼도(三刀, 三道, 턱 아래 주름살 세 줄, 불보살님 모습의 하나)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삼엄하구나!”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떨어진 뒤에는 어떻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허전하구나!”

강설 / 천하 영웅의 모습을 갖추었어도 마음이 천하 영웅과 통하지 않는다면 대장부라 할 수 없는 이치. 부처님의 모습을 다 갖추었어도 마음이 딴 생각이라면 별로이다.

중생은 시키지 않아도 겉모양을 따라가는 게 선수이다. 요즘 성업 중인 성형 수술이 그 예이다. 혹 삼도(三刀)가 원문대로라면 강설자가 전거를 찾지 못하였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삼계(三界)를 벗어난 사람은 어떻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덫이나 그물을 쳐도 걸리지 않는 사람!”

강설 / 곁에서 화를 돋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도록 유도해도 흔들림이 없으니,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존재이고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 같은 존재이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우두(牛頭) 스님은 4조 스님을 뵙기 전에는 수많은 새가 꽃을 물어 와서 올린 공양을 받았는데요. 그런데 4조 스님을 뵌 이후에는 수많은 새가 꽃을 물어 와서 공양을 올리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세상 근기에 응하여 타협하였다가, 세상 근기에 응하지 않고 본분사에서 비타협한 것이지!”

강설 / 없는 것이 좋은 것이다. 있는 것은 별로이다. 그리하여 옛사람은 말하였다.“무몽(無夢)이 대몽(大夢)!”

“시시하게 천만가지를 가지니 보다는 하나도 가짐이 없는 무소유가 주는 충만감!”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