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로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왔고,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는 깨어지고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가 아닌 자연을 파괴하는 파괴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러한 자연의 파괴로 지구는 생존의 위기에 처했으며 이에 대해 인간은 응분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또한 지나친 과학의 발달로 인류의 삶은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일상생활을 비롯해 모든 생활이 편리해지고 시간도 절약되었으며, 의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은 늘어났다. 컴퓨터의 발달로 가만히 앉아서도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매스컴과 출판의 발달로 쏟아지는 정보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러한 생활은 편리한듯 하지만 오히려 변화의 불안감으로 인간은 마침내 정신적으로는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현대인들은 정신과 물질의 불균형으로 인한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정신적 안정과 마음의 평온을 종교에서 찾고자 한다. 바로 여기에 현대의 종교가 해야 할 사회적인 역할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대인에게 종교는 바른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현대인의 욕구에 맞춰 종교도 다양화되어 갔다.
그러한 속에서 오랜 세월 인간의 내면과 정신의 수행에 심혈을 기울여 왔던 불교는 다양한 수행법으로 인간의 정신적 안정과 마음의 평온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해 왔다. 특히 불교의 수행법 중 선은 현대인의 정신적.육체적 안정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선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불교의 실천수행 중 제일 으뜸이며, 생사의 괴로움이 없는 자재해탈(自在解脫)의 피안세계로 이르게 하는 최상의 수행방법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은 현대문명이 만들어 낸 물질문명과 과학의 발달로 인한 인간성 상실에 대한 하나의 방편으로 주목받고 있다.
엄청난 스트레스와 중압감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선은
인간성 회복과 인간 각자의 건강한 사고를 유지하고
인간신뢰를 회복하는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현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인간 각자의 자기비판과 성찰을 통한 깊은 자각만이 현대사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하겠다. 결국 위기를 만든 주체도 인간이며, 해결책도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과학문명으로 인한 엄청난 스트레스와 중압감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선은 인간성 회복과 인간 각자의 건강한 사고를 유지하고, 인간 신뢰의 사회를 이룩하는 활력소를 위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을 통해서 새로운 자기 발견과 자기 정화를 모색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자기 발견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선은 지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인간의 삶을 응시하고 바로 세우는 실천의 가르침이다.
선은 이제 몇몇 특정한 지역이나 사람들만의 수행법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인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때에 가장 선행되어야 할 일은 선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바른 이해가 있어야 바른 수행을 할 수 있다. 선을 수행하는 인구는 많은데 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 같다.
선을 하면 어떤 신통을 얻게 되고, 남의 마음을 읽게 되고, 미래를 알게 되고, 전생을 알게 되고, 심지어는 귀신을 보게 되고, 아니면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특별한 능력을 얻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선수행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막상 수행을 하여 이런 능력이 오지 않으면 수행에 자신을 갖지 못하고 회의까지도 느끼면서 고민을 한다. 이것이 요즘 사람들의 병통이다. 그리고 단순히 선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시작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사실 선은 호기심만으로 시작하기에는 그렇게 단순한 수행법이 아니다.
또한 선에 대한 많은 서적, 다양한 명상법으로 인하여 오히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과 명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빨리 결과를 얻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조급한 심리를 선과 명상이라는 이름을 빌려 악용하는 경우가 더불어 많아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먼저 바른 안목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참선을 하면 곧바로 결과가 나오리라고 기대한다. 그러한 기대심을 품고 있으면 의식 속에서 환영과 상상의 세계가 나타나게 되며, 그것을 위대한 선적(禪的) 체험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무의식의 산물일 뿐 대단한 것도, 기뻐하거나 환영할 만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결과 마음에 불균형을 가져와 수행자는 수행의 길을 포기해 버리거나 비정상적인 길로 빠져 버리게 되고 좌절감을 겪기도 한다.
인간의 마음이란 무명(無明)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맑지 못하여 외부 세계를 확실하게 인지할 수 없다. 어렴풋하게 알게 된 마음은 잘못된 환상을 보게 되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맑지 못한 마음으로 부처를 보려고 하는 것은 어둠 속을 더듬는 것과 같다. 부처는 설명할 수도, 마음으로 그릴 수도 없다. 부처에게 온갖 이름을 붙이고 형상을 붙여 말한다면 그것은 추상적인 관념일 뿐이다.
참나를 얻은 사람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문제에 속박되지 않고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지만 물들지 않는 것과 같다. 모든 수행은 바로 자기 내면의 보물을 찾는 것이다. 자신이 이미 완전한 존재 즉, 부처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만남 중에서 최고의 만남은 참된 나와의 만남이다. 참나를 발견한 사람은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고통이 없고, 원망 가운데 있으면서도 원망이 없으며, 탐욕 가운데 있으면서도 탐욕이 없고, 성냄 가운데 있으면서도 성냄이 없다. 세속에 살면서도 늘 세속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깨달음은 인간의 양심을 위배하지 않는 행동에 의해, 자신에게 거짓을 보이지 않는 수행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다. 끈기 있고, 진실 된 수행은 참나를 찾는 가장 좋은 안내자이다.
혜거스님/서울 금강선원장
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