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수행은 생사에서 벗어나 중생을 구제하고, 무구(無垢)의 청정국토를 이루어 마침내는 너와 내가 함께 성불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무구청정(無垢淸淨)이란 자신에 대한 집착이 끊어져서 탐내고 화내고 무지함이 없는 자유로움을 말하는데, 이런 마음은 곧 위대한 인격자의 상으로서 사람 개개인의 품성을 향상시키고, 사회 전반이 화평하고, 인류문화를 창달할 뿐 아니라, 마침내 불국정토를 이루는 초석이 된다.
선의 목적이 성불이라면, 성불은 반드시 무아(無我)에서 가능하며, 무아의 경지는 자신을 철저히 비우는 것이고,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생각, 곧 탐.진.치를 버리고,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아상으로 인하여,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언제나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 의사만을 주장한다. 자신의 이기성이 더욱 더 그를 자기중심적으로 만들어 급기야 자신과 남을 비참하게 만든다.
깨달음의 지름길은 아집(我執)을 송두리째 잘라내는 일이다. 이기심으로 자기 둘레에 벽을 쌓는 사람은, 자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서 괴로움을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괴로움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늘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지 않고, 남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순간순간 두려움이 없고, 모든 행이 겸손하고 자비심이 넘쳐 이타적인 사람이 된다.
옛날 중국 최초의 임금이었던 요(堯)임금이 자기중심적이었던 부족시대를 청산하고, 절대 권좌인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과, 임금의 자리를 물려 줄 때 후계자를 자기자녀 중에서 찾지 않고, 오직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는 기량 있는 사람을 찾아 양위를 했던 것도, 자기가 없고 백성만 있었기 때문이다.
요(堯)임금을 이어 임금이 된 순(舜)임금도 수없이 학대하고 여러 번 자기를 죽이려한 계모를 두었지만 계모에 대한 원망이 조금도 없었다. 또 신라시대 성덕왕의 형인 보천태자는 임금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여 동생인 효명태자를 임금이 되게 하였는데, 성덕왕이 된 효명태자는 형 보천태자를 위하여 신종을 만들어 헌공하니, 그 종이 지금 오대산 상원사에 모셔져 있는 국보 38호이다.
성불은 반드시 무아(無我)에서 가능하며
무아의 경지는 자신을 철저히 비우는 것이고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나를 비운 사람들의 모습은, 후대에까지 길이 추앙받음을 알 수 있다. 불교의 수행이 무아(無我).무소유(無所有)에 철저하다 보니, 현실초월의 참뜻이 왜곡되어 현실도피의 현상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불교의 현실 초월은 현실을 도피하는 사상이 아니라, 현실의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사상으로서, 세속의 오욕에서 초탈하여 청정본연의 세계로 복귀하는 사상임을 재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사상은 우리나라에서 호국불교 운동으로 이어져, 신라시대에는 사회.경제.문화를 창달하였고, 조선 선조시대에는 임진왜란 당시 서산.사명대사를 주축으로 하는 승병이 결성되어, 외적을 물리치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시대에 용성.만해스님의 독립운동과 같은 역동적인 불교운동은, 모두 선사들의 열린 안목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나만의 수행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희생해서 나라를 구하고, 중생들을 구제하는 이타행이야말로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고 버린 데서 발현된 중생 사랑의 마음인 것이다.
이러한 선의 본체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선나 곧, 삼매를 닦는 것이라 하겠지만, 선의 작용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가장 큰 안정을 얻는 법, 가장 큰 안목을 얻는 법, 가장 큰 능력을 얻는 법 등 수많은 말 가운데 업장을 소멸하여 소인을 고쳐 대인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업장이 삼매에서 소멸되는 것은, 용광로가 만 가지 잡철을 녹여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듯, 모든 관념과 습관을 녹여 내기 때문이다.
선은 나를 조절할 수 있고, 모든 상황을 바로 볼 수 있으며, 버리고 취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일체를 포용할 수 있다. 흔히 선을 한다고 하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앉아 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크게는 깨달음을 얻고, 작게는 신비함과 신통을 얻고, 남다른 능력을 얻기 원한다.
선이 과연 얻는 데 있는 것일까? 또 배울 수 있는 것일까? 배우려고 쫓아다녀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수행하여 본질에 접근해보지 않고는 기미도 느낄 수 없는 것이 선이다. 선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선은 체구연마(體求鍊磨) 즉, 직접 몸으로 실천수행하면서 부딪쳐 깨닫는 것이다.
세상의 지식은 하나씩 보태는 것이다. 본 것, 들은 것, 배운 것, 느낀 것을 하나 씩 하나 씩 자기 안에 보태는 것이다. 많이 알고 많이 배운 이를 박학다식하다고 하며, 일평생 학문연구에 매진하는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선은 하나씩 보태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덜어내는 것이다. 탐.진.치를 덜어내고, 관념을 덜어내고, 평생 내 안에 쌓아놓았던 지식을 덜어내고, 본 것을 덜어내고, 들은 것을 덜어내고, 궁극에 가서는 수행해서 얻은 경지까지도 덜어내는 것이, 진정한 선의 세계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즉, 조금이라도 얻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다. 오히려 짐을 덜어 버리려다 더 큰 짐을 짊어진 격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선은 본래의 자기 자신에게 회귀하는 작업이다. 관념을 버리고, 관습적 틀을 버리고, 지식을 버리고, 고집을 버리고, 탐.진.치를 버리고, 버리고 버려 더 버릴 것이 없어야, 본래의 자기에게 회귀할 수 있다. 버린다는 생각까지도 버린 상태야말로 선의 궁극적인 도달처이다.
<유마경(維摩經)>에서도 “선정에 탐착하는 것은 보살의 속박인 것이며, 뛰어난 방편으로 중생들을 교화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다”라고 하여 선정에 탐착하는 것조차도 보살의 속박이라고 하였다. 참선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좌선에 탐착하고, 선정에 탐착하고, 깨달음에 탐착하는 것도 역시 자신을 또 다른 방법으로 얽어매는 속박이며, 진정한 선이 아닌 것이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 2495호/ 1월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