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방사제연(乃放舍諸緣)하고 휴식만사(休息萬事)하야 신심일여(身心一如)하고 동정무간(動靜無間)이니라 양기음식(量其飮食)하야 불다불소(不多不少)하고 조기수면(調其睡眠)하야 불절불자(不節不恣)니라
(저본(底本)에는 상(像)이나 다른 본에는 연(緣)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상 상(緣)이 타당하다고 생각됨.)
일체의 반연을 놓아 버리고 만 가지 일을 쉬어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같고 움직이고 고요함에 틈이 없어야 한다. 음식의 양을 조절하여 많이 먹거나 적게 먹지 말고, 수면을 조절해서 부족하거나 지나치지 않게 해야 한다.
이 장에서는 좌선의 선결조건에 대해서 6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인연을 놓아버리는 것(放舍諸緣), 모든 일을 쉬는 것(休息萬事), 몸과 마음이 한결 같은 것(身心一如), 움직이고 고요함에 틈이 없는 것(動靜無間), 음식의 양을 헤아리는 것(量其飮食), 수면을 조절하는 것(調其睡眠)이다.
중국 수나라의 천태지의(天台智: 538~597)는 <소지관(小止觀)>에서 음식과 수면과 몸과 호흡과 마음 즉, 조식(調食).조면(調眠).조신(調身).조식(調息).조심(調心) 등 5가지의 조절을 강조하면서 “거문고를 타기 전에 마땅히 줄을 잘 조절하여 느슨함과 팽팽함이 알맞게 되어야 비로소 연주를 하면 묘한 곡조를 낼 수 있다. 수행자가 마음을 닦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5가지를 잘 조절하여 반드시 적절하게 한 후에야 비로소 삼매에 쉽게 들 수 있다. 만약 적절히 조절하지 못하면 많은 어려움과 장애가 생겨 선근을 일으키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수행의 핵심은 조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나쳐도 안되고 부족해도 안 된다.
조화는 제각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나를 버림으로써 자연히 조율이 되고 조절이 되어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한결같고 고요함에 틈이 없어야 한다
음식의 양을 조절하여 많이 먹거나 적게 먹지 말고
수면을 조절해서 부족하거나 지나치지 않게 해야 한다
첫째 방사제연(放舍諸緣)에 대해 한단 한단씩 살펴보고자 한다.
방사제연(放舍諸緣)은 줄여서 사연(捨緣)이라고도 하는데, 놓는다, 버린다는 뜻으로 모든 반연에 집착하지 않고 놓아 버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반연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경계를 대했을 때 작용하고 그 모습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있는 그대로 인식된 경계가 아니고 망령된 식(識)으로 전도된 경계를 취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달마대사께서는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가히 도에 들 수 있다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 可以入道)”고 하셨다.
여기의 ‘밖으로 반연을 쉰다(外息諸緣)’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세간의 모든 명리(名利)를 잊는 것이고, 하나는 희로애락의 경계에 동하지 않는 것이다. 명리를 추구하고 희로애락에 물든 마음이 대비심과 서원으로 바꾸어지려면 인식의 대전환이 있어야 하고, 추구하는 가치관이 바뀌어야 하고, 즐기는 대상이 바뀌어야만 가능해진다.
천태스님도 25방편설에서 “인연으로 빚어지는 일을 그쳐야 한다(息諸緣務)”고 강조한다. 이는 선정에 몰입하기 위해서 마음과 주변을 정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대 불교학자들은 천태의 수행방편이 이후 선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야 한다(內心無喘)’는 것은 탐진치에서 발현된 5욕 곧 재물.여색.지식.명예.수면에 대한 본능적 탐욕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자비심과 서원 그리고 모든 법을 성취하고자 하는 집착도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까지도 일어나지 않아서 오로지 담담하고 고요해서 평온한 마음경지를 말한다.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한다(心如牆壁)’고 한 것에서 장벽이란 마음이 조금도 동요되지 않는다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로부터 오는 6진(색.성.향.미.촉.법)의 침입에 끄달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는 바깥으로는 시류와 유혹에 동요되지 않고, 안으로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오직 당면한 문제 곧 의문으로 제기된 화두 참구에만 몰입하고 몰입하여 내 모든 것이 화두가 되어야 법계와 더불어 계합 되어서 도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반연을 놓아 버리는 것을 선종에서는 방하착(放下着)이라 한다. 방하착이란 모든 집착을 놓아 버리고, 구하는 것을 놓아 버리고, 자신마저도 놓아 버리는 것을 말한다. 공부에 전념하는 수행자는 반드시 먼저 이러한 경지를 이루어야한다.
고려시대 공민왕의 왕사이셨든 태고보우스님께서 법을 구해 석옥(石屋)화상을 찾아가 뵈옵고, 예를 올리고 태고암가(太古菴歌)를 바쳤는데, 석옥화상이 기이하게 여기고 잠시 시험을 하였다.
“그대가 이와 같은 경지를 지내왔으니 조사관문이 있는지를 아는가 모르는가”라고 하시니, 보우선사께서 바로 “무슨 관문이 있겠습니까?” 하니, “그대의 공부를 근거하여 살펴보니 공부가 바르고 지견이 명백하다. 그러나 하나하나 모두 놓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이것(공부한 것)이 짐이 되어 저것(正知見)에 장애가 될 것이다” 라고 하시니, “놓아 버린지 오래입니다” 하니, “쉬도록 하라”고 하시는 문답내용에서도 놓아 버릴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며칠 뒤에 다시 석옥화상을 찾아가 예를 올리자 몇 가지 더 시험해보시고, 태고스님이 태고사에 주석했던 점에 의해 태고암가의 발문을 지어주시면서 묻기를, “공겁(空劫) 이전에 태고가 있었는가? 없었는가?”라고 하시니, 보우스님께서 “공(空)은 태고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바로 “불법이 동녘으로 건너가는 구나” 라고 하시면서 가사를 신표로 주셨다.
이처럼 공부의 핵심이 내려놓는 것 곧 방하착(放下着)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 2512호/ 3월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