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강의·혜거스님

〈9〉삼매(精修三昧)/마음 한곳에 집중해 시공 끊어진 경지

通達無我法者 2009. 6. 13. 05:22

 

 

 

 

마음 한곳에 집중해 시공 끊어진 경지

〈9〉삼매(精修三昧)


삼매란 ‘samadhi’의 음역으로, 정(定).등지(等持).정수(正受) 등으로 번역된다.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집중하고 몰입하여 시공이 끊어진 경지이다.

염불.참선.간경 등 모든 수행의 극치는 말할 것 없이 삼매이다.

반야를 배우는 보살에게 삼매는 순간순간 부딪치는 업의 물결을 극복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가령 놋그릇을 녹여 쟁반을 만들고자 한다면 놋그릇을 용광로에 넣어 녹여야만 가능하듯이 중생의 업으로 형성된 몸을 전환하여 청정한 법신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삼매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삼매를 정밀하게 닦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밀하다’ 는 것은 쌀을 곱게 찧어 대낀 것에 비유되는 말로, 매우 세밀하고 순일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삼매가 불교에서만 쓰이는 용어가 아님을 감안할 때 사정(邪定)과 정정(正定)을 가리는 기준이 되는 택법의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백천 관법이 삼매를 통해 성취되고, 1700공안이 삼매를 의지해 타파되며, 다겁의 끈질긴 업장이 삼매를 의지해 녹아나고, 어리석음과 지혜가 삼매에서 반조하여 평등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수행자는 삼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대자비심이 갖추어져 있고 큰 서원을 세운 후에는 정신을 한 곳에 몰입하여 정밀하게 수행하여 삼매에 이르러야 한다. 이렇게 되면 지혜는 저절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공부가 정밀 그 자체에 있듯이 선수행 역시 정밀하게 닦아 계합함이 없다면 비슷할 뿐 참선을 해서 얻고자 하는 도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3조 승찬대사(僧璨大師: ?~606)도 <신심명(信心銘)>에서 “호리유차(毫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顯隔)”이라고 하셨으니, 이는 곧 정밀하게 닦지 않아서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다면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멀어진다는 뜻이다.



대자비심이 갖추어져 있고 큰 서원을 세운 후에는

정신을 한 곳에 몰입하여 삼매에 이르러야 한다

이렇게 되면 지혜는 저절로 생겨나게 된다




삼매가 선수행의 핵심이라면 어떻게 닦아야 삼매에 이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태고 보우 국사께서 가르치신 시중법문(示衆法門) 한 편을 인용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하나의 의심덩이 아래에서 몸과 마음을 놓아 버리되 마치 만길 벼랑에서 떨어질 때처럼 해야 하고, 계교도 없고 상량도 없되 마치 아주 죽은 사람처럼 해야 한다.

어찌할까?

어떻게 할까?

이런 생각들을 놓아 버리고 오로지 하나의 ‘무’자만을 들고서 하루 12시간, 행주좌와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단지 화두로 명근(命根)을 삼아 항상 혼매(昏昧)하지 않고 때때로 살피고,

화두를 잡아 눈앞에 붙여 두되, 마치 암탉이 알을 품을 적에 따뜻한 기운에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듯이 하고,

고양이가 쥐을 잡을 적에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눈을 잠시도 떼지 않은 채,

몸과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듯이 마음과 눈과 화두를 한곳에 잡아두어야 한다.

다만 이렇게 성성력력(惺惺歷歷)하고 역력성성(歷歷惺惺)하여 정밀하게 참구하되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생각하듯이,

배고플 적에 밥을 생각 하듯이, 목마를 적에 물을 생각 하듯이 하여, 쉬고 싶어도 쉬지 않고 생각하고 또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 어찌 억지로 하려는 마음이겠는가?

만일 이처럼 진실하게 공부하면 곧바로 힘들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득력(得力)한 경지이다.

화두가 자연스럽게 순숙(純熟)하여 한 덩어리가 되면, 몸과 마음이 홀연히 공(空)하여 꼼작도 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은 가는 곳이 없을 것이다.

이런 경지 속에는 다만 하나의 그 사람(當人)일 뿐, <변한게 없다.>

그 사람(當人)이 만일 다른 생각을 일으키면 반드시 그림자에게 현혹당하게 된다.

천만번 절대 털끝만큼도 다른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바로 그것이 어떤 면목이며, 또 조주스님이 ‘무(無)’라고 말한 뜻은 어떤 것인가를 돌이켜보는 것이 좋다.

바로 그 조주스님의 말에서 무명을 타파하면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매 차고 뜨거운 것을 자기만이 아는 것처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화두를 통투(通透)하지 못하면 다시 바짝 정신을 차려서, 오로지 화두가 끊이지 않고 이어 가야 한다.

의심이 있듯, 의심이 없듯, 맛이 있듯, 맛이 없듯 모두 논하지 말고 곧장 이 큰 의심덩이의 아래에서 화두를 들고 한결같이 혼매(昏昧)하지 않고, 밀어오고 밀어감에 포행할 적에도 오로지 이렇게 하고, 앉을 적에도 오로지 이렇게 하고, 죽 먹고 밥 먹을 적에도 오로지 이렇게 하고, 사람을 대하거나 말 할 적에도 오로지 이렇게 하여, 모든 시행과 행이, 그리고 동정(動靜)의 경계에 모두 이처럼 한다면 곧바로 깨치지 못 할 것이 없다.

또 그대의 목숨이 호흡의 순간에 있음을 아는가?

이 세상에 나오신 부처와 조사를 만났는가?

태어나 위없는 종지(宗乘)를 들었는가?

이 최상승의 법문을 듣고서 희유심(稀有心)을 내었는가?

승당(僧堂)에서 절대 잡담을 삼가고 어록만을 보았는가?

승당을 떠나지 않고 절개를 지켰는가?

행주좌와의 즈음에 화두를 점검하여 하루 12시간 가운데 끊임없이 화두를 들었는가?

죽 먹고 밥 먹을 적에도 점검했는가?

사람들과 대화 할 때에도 혼매하지 않았는가?

급작스런 일을 당해서도 화두를 들었는가?

승당에서 참선 할 때 가까이 있는 도반과 귀속 말을 소근 거리지 않았는가?

때로 사람들과 쓸모없는 잡담으로 시비를 일으키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는가?

무시로 힘껏 정진했는가?

견문각지시(見聞覺知時)에 밝고 밝아서 혼매하지 않고 한 덩어리가 되었는가?

만일 좋아야 할 때에 자신을 돌이켜 보았는가?

자기면목을 어떻게 하면 조주스님을 움켜잡을 수 있을까?

조주스님이 무(無)라고 말한 뜻은 무엇일까?

금생에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을 수 있을까?

상중하의 자리에 서로 공경을 했는가? 생활이 편할 때에도 지옥고를 생각했는가?

이는 참선인이 일상생활 속에서 점검해야 할 도리이다.

이와 같이 태고 보우 국사께서 가르친 화두 드는 법은 곧 삼매를 닦는 법으로 이론의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역대 선지식의 한결같은 공부법이니 만큼 바른 수행을 원하거든 반드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 2508호/ 3월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