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를 닦고 난 후 불도를 이루고자 한다면 탐진치에 찌든 이기주의적 심성을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바꾸고 큰 서원을 거듭 세워서, 맹세코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이 사무쳐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계(戒).정(定).혜(慧) 3학(三學)이라면 <좌선의>에서 계(戒)가 빠진 것은 자비심과 큰 서원을 한결같이 하는 것으로 계를 삼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계(戒)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다. 자비심과 서원으로 계를 삼아 선정삼매에 들어 모든 것을 성취하고 필경 나 없는 경지에서 불도를 이루게 하는 요문이 삼매수행임을 깨달아 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대승적 차원에선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라 한다.
삼매수행을 수습한 이후에 자기만의 해탈이 아닌 일체 중생의 제도라는 목표를 향하여, 삼매 수행을 통해 얻은 선근 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해야만 한다. 회향은 돌리는 것 또는 돌려 베푸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회향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공덕을 돌려서 타인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며, 그 돌리는 대상은 보리(菩提)와 실제(實際)와 중생을 총망라한다.
회향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삼매를 닦아 성취한 공덕으로 모든 중생의 허물을 대신 받아 녹이고, 자신의 성취를 중생에게 돌려 모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그 보살도를 완성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회향이며 중생 제도인 것이다. 이를 선정바라밀이라 한다. 만약 삼매을 닦아 성취하고도 중생제도의 서원이 없다면 이는 선정일 뿐 선정바라밀이라고 하지 않는다.
삼매를 닦고 난 후 불도를 이루고자 한다면
탐진치에 찌든 심성을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바꾸어
맹세코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이 사무쳐야 한다
자신의 성취를 위해 끊임없이 나가는 수행자는 이승(二乘)에서 벗어나 모든 불보살처럼 보시.지혜.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모든 중생을 위해서 성취하겠다고 큰 원력을 발해야 한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에서는 “보살이 처음 발심한 이래로 보시를 한 것은 일체 중생을 위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혜를 닦음까지도 모두 일체 중생을 위함이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니라.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위하는 일 이외에 다른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은 다만 일체 중생을 위함 때문이니라 (是菩薩이 從初發意已來로 所有布施는 爲一切衆生故이며 乃至有所修智慧도 皆爲一切衆生이요 不爲己身이라 菩薩摩訶薩이 不爲餘事故로 求阿多羅三三菩提는 但爲一切衆生故니라)”고 하여, 보살의 수행은 중생제도에 의해 완성되고 거기에 초점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수행의 지침서인 <좌선의>에서 좌선 수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을 반야보살이라 한 것은 수행자에게 가장 먼저 보살정신을 심어줌으로써 참선 수행자가 수행에서 성취한 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하도록 의무를 부여하고자 해서 일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좌선의>의 이 첫 문단은 서품(序品)에 해당되면서 좌선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자 서원을 밝힌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좌선하는 사람 곧 반야를 공부하려는 보살은 먼저 갖추어야 할 5조목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대비심.서원.정수삼매.중생제도.자신만의 해탈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 5가지 마음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반야 즉, 지혜를 공부할 자질이 갖추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대비심은 보살의 마음이요, 서원은 보살의 원력이요, 정수삼매는 보살의 공능이요, 중생제도는 보살의 실천행이다. 여기에 자신만의 해탈을 구하지 않는 무아의 마음이 갖추어져야 함을 최우선으로 밝힌 <좌선의>를 선원청규로 삼아서 규율화한 것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령인 것이다. 이 <좌선의> 수칙이 선원청규였던 점에 비추어 참선문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가 위의 5조목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대승 보살도의 수행체계에서 정혜불이(定慧不二).지비원만(智悲圓滿)은 근본적으로 밑바탕을 이루는 수행 설계도이며 나침반이다. 이것을 착실하게 전승하면서 대비심을 통해 저절로 발현되는 서원과, 정밀하게 닦은 삼매를 송두리째 중생을 위해 회향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의 목표는 자기 한 몸의 해탈 추구가 아니라 중생의 제도에 두어야 하며, 그렇게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타불이(自他不二).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사상을 근본으로 할 때 비로소 그 수행은 빛이 난다.
또한 송대의 곽암선사는 저술 <십우도(十牛圖)>의 맨 마지막에서 깨닫고 난 후 다시 중생세계로 돌아와 중생을 제도.성불케 하는 입전수수(入纏垂手)를 밝히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각자(覺者)가 살아가야 할 최고의 이상적 모습이다.
참선수행을 해서 삼매를 닦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을 밝힌 화엄경에서는 ‘일체 모든 갖가지 법문을 착오 없이 이해하려면 반드시 어리석고 산란한 마음을 여의어야 한다[離痴亂行]’고 했고, 대지도론에서는 ‘대승보살의 덕목을 6바라밀에 두고, 보시.지계.인욕은 이타행으로써 공덕문이라 하고, 정진.선정.지혜는 자리행으로써 지혜문이라 칭명하고 특히 선정바라밀에서 선정수행은 곧 삼매를 닦는 법에 대해 방법을 제시하면서 선은 지혜를 간직한 창고라 공덕의 복전이 되고, 선은 청정수라 능히 세속의 욕망을 씻을 수 있고, 선은 금강의 깃발이라 능히 번뇌의 화살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하여 선의 당위성을 밝히고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오욕(五欲)을 물리치고, 오개(五蓋)를 제거해야만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오욕은 얻을수록 더욱 심해져서 마치 가려운데 더 가려움을 보태는 것과 같고, 오욕이 이익이 없는 것은 마치 강아지가 뼈를 물고 다니는 것과 같고, 오욕이 분쟁을 더하는 것이 마치 까마귀가 고깃덩어리를 놓고 싸우는 것과 같고, 오욕이 사람을 불태우는 것이 마치 역풍 앞에 횃불을 드는 것과 같고, 오욕이 사람을 해치는 것이 마치 독사를 밟은 것과 같고, 오욕이 실(實)이 없는 것을 마치 꿈속에서 얻은 것과 같다. 오욕이 영원하지 않는 것이 마치 임시로 빌린 것이 잠시 뿐인 것과 같다하여 선을 수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먼저 오욕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으니, 모두 산란심과 탐착을 버리는 것이 선의 요문임을 밝히고 있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 2510호/ 3월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