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만 가지 일(萬事)’이란 밖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일을 쉰다’는 것은 좁게는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자기 주변의 모든 세속적인 일들을 정리하는 것이며, 넓게는 온갖 일들이 자연히 쉬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히 쉬어지는 것은 바깥으로는 반연에 동하지 않고 안으로는 마음속에 이미 구하는 것마저 쉬어진 것을 말한다.
즉 천길 깊은 우물 속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오로지 천길 우물 속에서 구출되어 나오고자 하는 마음 외에는 일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그런데 중생에서 벗어나 보살이 되고자 하고, 생사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고자 발심한 사람이 참선수행을 하면서 5욕에 탐착하여 탐진치를 버리지 못한다면 어느 때에 생사에서 벗어날 기약이 있겠는가? 공부인은 모름지기 만 가지 일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쉰다는 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무심(無心)으로 한다는 뜻이다. 보통 무관심과 무심을 혼동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을 본다.
무관심이란 만사에 무디고 신경을 쓰지 않으며 자신에게 무관한 일에는 상대가 죽는다고 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무심이란 무관심하고는 크게 다르다.
무심이란 만 가지 일을 하되 한 바가 없으며, 만 가지에 관심을 가지고 대하지만 자랑하지 않고 자신이 한 일을 내세우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고 단지 행할 뿐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만 가지 일에 초연하여 마음으로 얽매이지 않으니, 이것이 참으로 만 가지를 쉬는 경지인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즉, 응당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고 한 이 구절은 그 대표적인 경구라고 할 수 있다.
이 무심을 다른 말로 무주(無住) 내지 무상(無相)이라 하며, 알기 쉽게 무집착이라고도 한다.
무집착을 이야기하는 스승들은 무관심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사심 없이 진실 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이들은 칭찬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을 가진다.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쉰다는 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無心으로 한다는 뜻이다
고려 중기의 보조지눌 선사(1158~ 1210)는 일생동안 우행호시(牛行虎視: 소와 같이 묵묵히 걷고 호랑이처럼 봄)의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 이는 남의 칭찬이나 비방에도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성품이 인자하고 참을성이 강한 삶을 살았으므로 이를 비유한 것이다. 이야말로 도인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천태소지관(天台小止觀)>에서도 만 가지 일을 그친다는 것에 대하여 4가지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살림살이의 인연을 끊어 세속의 유위(有爲) 사업을 짓지 않을 것.
둘째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어 속인.벗.친척.아는 이들을 찾아가지 않고 인사의 왕래를 끊을 것.
셋째는 기교.기술의 인연을 끊어 세간의 공장.기술.의술을 끊고, 주술.점.글씨.계산 등의 일을 금할 것.
넷째는 학문의 인연을 끊어 글을 외고 배우는 따위를 모두 버릴 것 등이다.
이처럼 모든 인연을 끊는 것은 인연이 많으면 도를 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산란하여 마음을 올곧게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버리고 쉰다는 것은 일상사였는에 근래에 와서는 버리고 쉰다는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했더라도 실천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생사해탈을 바라거든 생사를 초탈하는 것이다. 생사를 초탈하는 것이 곧 생사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태고보우선사가 석옥청공 화상을 친견하였을 때, 석옥 화상께서 여러 방법으로 보우스님을 시험하시고, 끝으로 우두함화(牛頭含華)를 인용하여 묻으시기를, “우두스님은 사조(四祖)를 친견하기 전에는 무엇 때문에 많은 새들이 꽃을 올려 공양하였는가?”
“부귀를 누리면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사조도신(四祖道信)을 만나고 나서부터 새들이 공양을 올리기는 그만두고 자취도 보이지 않았는데, 우두스님이 사조(四祖)를 뵙고 난 후에는 무엇 때문에 많은 새들이 꽃 공양을 올리지 않았는가?”
“가난하면 자식들조차도 멀어지는 법입니다.”
“공겁(空劫) 이전에 태고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공은 태고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석옥 화상은 이와 같은 대화를 마치고 크게 기뻐하시며, 주장자를 전하면서 불법이 끊어지지 않고 잘 흥화 되기를 당부 하셨다.
우두스님께서 새들로부터 공양을 받았던 것은, 대보리를 성취하여 오묘한 인격에서 무한한 능력이 발휘되어 모든 중생이 우러러 첨앙함으로 새들까지 다투어 공양을 올렸던 것이다. 이는 이룬 것을 하나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수승한 자신과 하열한 새들의 구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조를 친견하고 난 후에는 모두를 초월하여 이룬 것은 물론 자신마저 버려서 없어졌기 때문에 새들이 올리는 꽃 공양의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보고 들은 것에 물들고 집착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배워서 아는 것을 버리고 닦아서 이룬 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선(禪) 수행자가 무엇보다 먼저 우선해야 일이다.
가난한 자는 가진 것이 없어 버릴 것도 없으나, 부자는 너무 많이 가졌으면서도 남과 나눌줄 모르니, 부자가 되고나서 버려야 참으로 버리는 것이다.
배우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노력해서 성취한 것을 버리는 것이 참으로 버리는 것이니, 버리고 또 버려서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자리가 진정한 자리라고 한 말을 경청해야 한다.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난 후, 이루어진 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참해탈의 뜻이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 2514호/ 4월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