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습정고승(古有習定高僧)은 좌상개목(坐常開目)하고 향법운원통선사(向法雲圓通禪師)도 역가인폐목좌선(亦訶人閉目坐禪)하야 이위흑산귀굴(以謂黑山鬼窟)이라하니 개유심지(蓋有深旨)하니 달자지언(達者知焉)이니라 신상기정(身相旣定)하고 기식기조연후(氣息旣調然後)엔 관방제복(寬放臍腹)하고 일체선악(一切善惡)을 도막사량(都莫思量)하라 염기즉각(念起卽覺)이요 각지즉실(覺之卽失)이니라 구구망연(久久忘緣)이면 자성일편(自成一片)하리니 차좌선지요술야(此坐禪之要術也)니라.’
옛날 선정(禪定)을 닦던 어떤 고승은 항상 눈을 뜨고 좌선하였고, 법운원통선사 또한 눈감고 좌선하는 자를 꾸짖어, “흑산의 귀신굴이다!”라고 하였으니,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통달한 자는 알 것이다. 몸의 모양이 이미 안정되고 호흡이 조절되었으면, 하복부를 느슨하게 하고, 일체 선악을 생각하지 말라. 생각이 일어나면 곧바로 알아차려야 하고 알아차리면 곧 사라질 것이다. 오래도록 반연을 잊으면 저절로 일편(一片)을 이루리니, 이것이 좌선의 중요한 방법이다.
여기에서는 좌선하는 법에 대해서 두 가지 측면으로 가르치고 있다. 첫째는 시선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밝혔고, 둘째는 마음가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밝혀 참선의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시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옛부터 선정을 닦는 수행자가 항상 눈을 뜨고 참선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눈을 감고 참선하는 것을 크게 경계했다는 것도 유추해서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옛날 선정을 닦던 어떤 고승’이란 혜성(惠成)스님을 가리킨다. 스님은 출가하여 십주사(十住寺)에 머물면서 <법화경>, <유마경>, <승천왕경> 등 대승경전 20여 권을 외우고 구족계를 받았다. 후에 천태지의스님을 친견하고서 남악혜사선사(南岳慧思禪師: 515~577)가 광화산 중에서 물결치듯 모여드는 많은 대중을 이끌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친견한 뒤에 남악선사를 흠모하고 숭앙하여 선정을 배우려고 하자, 남악선사가 말하기를, “그대의 일생 학문은 내가 그대의 손을 불에 구워 주어도 따뜻해질 수 없다. 공부를 잘못하여 애석하다”고 하였다.
혜성스님은 본래 경문과 주석, 소(疏) 등에 의지하여 알음알이를 내었다. 문득 그제야 스스로 살펴보니 안개 속에서 노는 것처럼 아득하여 개탄해 마지않았다. 혜성스님은 마침내 책을 불태워 버리고 붓과 벼루를 던져버린 뒤 오롯한 마음으로 정진하여 반드시 성취하려는 다짐을 가졌다.
혜성스님은 밤을 새우면서 눈을 뜨고 좌선하여 15년의 세월을 보낸 뒤 고요할 때나 산란할 때 하나가 되었다. 남악선사가 말하기를, “지의스님은 먼저 삼매(三昧)를 일으키고 뒤에 법으로 견지함을 증득하였으나 혜성스님은 이와 반대였다. 그러나 두 스님의 적조(寂照)와 행해(行解)가 한 가지이다”라고 하였다.
눈을 뜨고 한 곳 시점을 정해 응시해야 한다
앉는 자세를 바르게 한 뒤 허리를 굽히고
팔을 쭉 뻗어 손 끝이 닿는 곳을 응시점으로 삼는다
중국의 송나라 때 법운원통선사(法雲圓通禪師: 1027~1090)께서도 눈 감고 좌선하는 사람을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흑산(黑山)의 귀굴(鬼窟)에 드는 것’이라 하셨다.
법운원통선사는 종색 선사의 스승인 법운사(法雲寺)의 법수원통을 가리킨다. 흑산(黑山)은 남섬부주(南贍部洲)의 북쪽 3지방에 각각 3군데의 3종 흑산으로 어둡고 컴컴하여 악귀들의 서지처라 하여 흑산의 귀굴이라고 한 것이다. 선종에서 이 말을 자주 쓰는 것은 <벽암록(碧巖錄)> 41칙의 “은산철벽(銀山鐵壁)이니 짐작으로 헤아리면 해골 앞에 귀신을 보게 되고 찾아 사량하면 흑산 아래 앉게 되리라”고 한데서부터 유래한 것으로 공부가 바로 되지 않고 헤매이거나 다른 방향으로 잘못 갔을 때를 비유하여 쓴다.
또한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 선사의 <서장(書狀)>에는 “더욱 더 하열한 사람은 묵조무언(照無言)과 공공적적(空空寂寂)으로써 귀신굴 속에 떨어져 있으면서 구경안락(究竟安樂)을 구하나니……”라고 하였다. 이는 잘못된 참선으로 경계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에 참선하는 모습은 100가지 형태라 할 만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모든 공부가 그렇듯이 참선수행도 역시 처음부터 바른 자세와 바른 법을 반드시 배워서 수행해야 함은 물론이다. 모든 법이 바르게 하려고 하면 힘들고 더딘 것 같으나 바른 길에서는 힘들고 더딜지라도 잘못 가는 병통이 생기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눈을 뜨고 어떻게 참선을 하는가? 그것은 눈을 뜨고 한 곳 시점(示点)을 정하여 응시해야 한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앉는 자세를 바르게 한 뒤 허리를 굽히고 팔을 쭉 뻗어서 손끝이 닿는 곳을 응시점으로 삼는다. 만약 벽을 향해 앉을 경우 두 팔을 앞으로 뻗어서 벽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정좌하고 허리와 머리가 곧바로 일직선이 되게 한 다음 시선을 자연스럽게 하여 응시하면 된다. 눈을 뜨고 응시하는 것은 참선뿐만 아니라 염불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눈을 감고 공부한다는 것은 명상에서는 가능하겠지만 참선이나 염불에서는 절대 금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법운원통선사의 말씀이 아니라 하더라도 참선은 관념적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응시하여 사물의 실체를 투과(透過)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선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방법으로 응시하는 것을 제일 수칙으로 삼아야 한다. 눈앞이 밝으면 사물을 응시하게 되고 눈앞이 어두우면 공상 속에서 번뇌 망상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는 관념적으로 유추하여 사유하는 모든 의식은 곧 번뇌 망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 밝은 선사들이 눈을 감고 수행하는 것을 꾸짖는 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원각경>에서도 심존목상(心存目想)이라 하여 이와 같은 공부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공부하는 사람은 마음을 목상(目想)에 두라 하였으니, 목상이란 눈으로 생각한다는 말로 이는 곧 눈이라는 뜻이라 할 수 있고 또는 눈 끝이라 할 수 있으니, 마음을 항상 눈 가는데 또는 눈 끝에 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항상 마음으로 눈 가는 시점자리를 응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참선하는 사람은 항상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 2528호/ 5월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