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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③ 느낌의 무더기(受蘊)

通達無我法者 2010. 3. 20. 01:04

 

 

나는 누구인가 ③ 느낌의 무더기(受蘊)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껴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두 번째 대답은 느낌(受, vedana)이다. 느낌은 자본주의의 가장 민감한 주제요, 젊은이들이 ‘필이 팍 꽂혔다’고 열광하는 저 필(feel) 혹은 필링(feeling)을 뜻한다. 그래서 일찍부터 서양에서 느낌은 feeling으로 정착이 되었다. 이러한 느낌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나간 호에서 밝혔듯이 느낌 혹은 필링은 감정적.정서적.예술적인 단초가 되는 심리현상이다. 경들에 의하면 느낌에는 괴로운 느낌(苦受), 즐거운 느낌(樂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의 세 가지가 있다.(S36:1 등) 이 가운데 즐거운 느낌은 탐욕의 잠재성향과 관계가 있고, 괴로운 느낌은 적의의 잠재성향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명의 잠재성향과 관계가 있다.(S36:3) 그리고 오온 가운데 유일하게 느낌만이 <상윳따 니까야>에 <느낌 상윳따>(S36)라는 독립된 주제로 모아져서 31개의 경들이 포함되어 있다.

둘째, 불교에서 강조하는 초선부터 제4선까지의 네 가지 선(禪, jhana) 혹은 본삼매는 한마디로 느낌의 순화과정이라 표현할 수 있다. 초선에서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이라는 언어적 사유와, 강한 즐거운 느낌이라고 주석서에서 설명되는 희열(喜)과, 행복한 느낌(樂受)이 주요한 심리현상으로 드러난다. 제2선은 언어적 사유가 가라앉고 희열과 행복만이 있는 경지이고, 제3선은 희열이라는 강렬한 느낌도 가라앉고 잔잔한 행복이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경지이며, 제4선은 행복까지도 가라앉고 평온(捨)이라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고결한 느낌이 마침내 전개된다.

 

느낌의 순화과정이 곧 불교 禪

“무상함에 사무쳐 연연 말아야”


<느낌 상윳따>(S36)의 몇몇 경에 의하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수승한 느낌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처럼 제4선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자면 삼매 체험이 없는 일반사람들이 평온과 관계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목수 빤짜깡가는 부처님께서는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의 두 가지 느낌만을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S36:19)

셋째, 인식이 이념이나 사상을 더 중시하는 사회주의와 관계가 깊은 것이라 한다면 감정과 정서와 예술과 편리함의 추구와 관계있는 느낌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할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매스미디어를 통한 광고는 인간의 느낌을 무한대로 자극한다. 이영애와 김태희와 고현정이 방긋방긋 웃고 장동근이 미소짓는 광고는 우리의 원초적 느낌을 자극하여 특정 상품에 ‘필이 팍 꽂히게’ 만들려 안달복달한다. 그래서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일체사 느낌에 귀결된다”(A8:83)고 말씀하셨다.

넷째, 그러나 느낌에 대한 부처님의 결론은 “느낌들이란 참으로 거품과 같다.”(S22:95)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서는 “마치 거품이 조그마한 물에서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오래 가지 않듯이 느낌도 그와 같다. 손가락 한 번 튀기는 순간에 10만 꼬띠(1조!) 개의 느낌들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자는 이러한 느낌의 무상함에 사무쳐서 느낌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느낌의 무상.고.무아의 통찰을 통한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완성하여, ‘느낌이라는 행복’이 아니라 저 ‘열반의 행복’을 실현할 것을 초기불전은 강조하고 있다.

각묵스님 /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