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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38

通達無我法者 2010. 12. 26. 23:1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살아서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몸과 마음은 병과 불만으로 편할 날이 없습니다.

즐거움인줄 알았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괴로움입니다.

이런 괴로움의 정체는 불만족입니다.

 

즐거움이 많으면 많을수록 괴롭고, 또 없으면 없어서 괴롭습니다.

하지만 괴로움을 자각하는 것은 지혜가 있어서 생긴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괴로운지도 모르고 삽니다.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지혜며,

이것은 괴로움을 치유할 필요를 안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을 해도 괴로움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조건만 있지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아 집착이 끊어져야

비로소 괴로움에 대한 해답을 얻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갈애는 자아로부터 생기고, 사실은 그런 자아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괴롭다는 것은

무명과 갈애로 인한 것인데, 그 무명과 갈애는 자아로부터 오고,

그런 자아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불에는 네 가지의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 어떤 사람 어떤 것을 따뜻하게 하는 것입니다.

몸의 따뜻함을 느끼고 아플 때는 열이 있습니다.

두 번째 종류의 불의 요소는 물체를 늙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어떤 사람 또는 어떤 것을 불에 데게 하는 것입니다. 즉 열이 과한 것입니다.

고열이 있을 때 여러분은 몸의 과도한 열을 경험합니다.

네 번째는 소화 시키는 열로,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본 모든 것들을 소화하게 합니다.

소화를 시키는 좋은 열이 있을 때는 어떤 것을 먹어도 소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화를 시키는 좋은 열을 갖지 않으면 위에 병이 생깁니다.

이것들이 네 가지 종류의 불의 요소입니다.

 

다음으로 마지막 요소는 바람의 요소입니다.

바람의 요소의 특성은 늘어남, 팽창함, 또는 넓힘입니다.

풍선에 바람을 넣으면 늘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앉아있거나 똑바로 설 수 있고 넘어지지 않는 것은

모든 방향에서 여러분을 받치고 있는 바람의 요소의 작용 때문입니다.

 

그것의 기능은 동작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움직일 때 여러분의 움직임은 바람의 요소에 의해 일으켜진 것입니다.

 

그것의 나타남은 나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넘어질 때도 바람의 요소이고,

넘어지려다가 똑바로 자세를 바로 할 때도 그것을 지탱하는 바람의 요소입니다.

 

바람의 요소는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위로 가는 것, 이것은 몸에서 토하거나 딸꾹질 등을 하게 합니다.

둘째, 아래로 내려가는 것, 이것은 몸에서 대변과 소변을 운반합니다.

셋째, 내장 밖과 배안의 바람입니다.

넷째, 내장안의 바람입니다.

다섯째, 팔다리 모두에 퍼지는 바람입니다.

여섯째, 호흡, 즉 들숨과 날숨입니다.

 

이처럼 바람의 요소가 몸의 움직임을 일으킵니다.

걷거나 쭉 펴거나 굽힐 때 여러분의 의도,

즉 마음에 의하여 바람의 요소가 작용합니다.

 

우리가 길을 걸을 때에도, 발을 펼 때에도, 일어나고 앉을 때에도,

항상 먼저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고,

그 뒤에 풍대가 일어나서 몸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의도와 풍대, 의도와 풍대 이것밖에 없습니다.

 

수행자는 수행 중에 이들 네 가지 요소를 알아차립니다.

자. 지금 걸을 때 어떻게 이들 네 가지 요소를 알아차릴 수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걸을 때 먼저 발을 들어 올립니다.

위로 향한 움직임은 발의 가벼움으로 나타납니다.

가벼움은 불의 요소에 의하여 일으켜집니다.

 

발을 올릴 때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 움직임은 바람의 요소에 의하여 일으켜집니다.

다시 발을 앞으로 내밀 때 이 움직임 또한 바람의 요소에 의하여 일으켜집니다.

 

발을 아래로 내려놓을 때 더 무겁게 되는데 그것은 물질의 요소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발이 땅이나 마루 바닥에 닿을 때 바닥과 발 양쪽의 딱딱함, 또는 부드러움이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 딱딱함 또는 부드러움은 땅의 요소의 특성입니다.

 

이처럼 한 걸음을 걷는 동안 이들 네 가지 요소를 식별할 수가 있습니다.

발을 들어 올리는 동안 불과 바람의 요소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발을 앞으로 내미는 동안 바람의 요소와 발을 내려놓는 동안 물의 요소

땅의 요소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수행자는 처음에 이들 네 가지 요소가 모두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수행을 하면 차츰 이 네 가지 요소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수행을 한 결과 집중의 힘으로 몸의 실재하는 현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소들을 분명히 보아서 알 때 존재에 대한 개념을 잃게 되고,

지금 이들 네 가지 요소, 네 가지 요소가 가는 것, 네 가지 요소가 서있는 것 등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수행자가 이들 네 가지 요소가 가는 것, 서있는 것만을 보아서 안다면,

사람을 볼 수 없고 존재에 대한 개념을 잃게 됩니다.

 

이때 내가 서는 것이 아니고 4대가 서고,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4대가 가고,

내가 앉는 것이 아니고 4대에 의해서 앉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부터 벗어나서 단지 조건과 단지 정신과 물질만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알 때 나의 몸,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실재하는, 존재하는 것들의 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4대를 알아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의 모든 알아차림은, 모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들은

바로 무상, 고, 무아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무아입니다.

 

내가 있어서 그것을 시키고, 그런 것들은 내가 소유한다고 알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편들이 동원되어서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네 가지 요소의 알아차림은 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됩니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이것을 설명합니다.

 

백정이 소를 먹이고 기르고 그것을 도살장으로 데리고 가서 말뚝에 메고

그것을 죽일 때 그는 아직도 그것이 소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 라고 물으면

그는 ‘소를 먹이고 있습니다, 지금 소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지금 소를 죽이고 있습니다’ 라고, 소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을 죽인 후에도 그것을 부분적으로 자르기 전에는

아직도 그것이 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살된 소를 조각으로 자른 뒤에 그가 조각들을 가지고

네거리에 있는 탁자에 놓았을 때부터 그 시점부터 그것이 소라는 생각을 잃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무엇을 파느냐고 물으면 그는 소를 팔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를 조각들로 자른 뒤에 그는 소라는 개념을 잃어버립니다.

 

같은 방식으로 수행자는 자신을 네 가지 요소로 잘라버리면,

무엇을 가지고 있던 몸 안에 무엇이 있던 오직 네 가지 요소뿐이며,

그때 그는 존재, 사람이라는 개념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기를 파는 사람이 또는 고기를 사는 사람이 ‘소를 주시오’하지 않습니다.

갈비를 주십시오, 꼬리를 주십시오, 족을 주십시오, 등심을 주십시오, 라고

어느 특정한 부분을 지적하지 소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사실로 보아서 우리 몸을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로 나눌 때

거기에는 사람, 거기에는 자아가 없습니다.

단지 조건만 있고 인식할 수 있는 느낌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지수화풍 4대로 구별해서 보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 몸은 지수화풍 4대밖에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없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아서 실재를 아는 것입니다.

 

실재라는 것이, 그 몸이 자아가 아니고, 자아가 그 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은 몸으로서의 원인과 결과의 조건, 결합물의 형성의 결정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수행 방법은 존재가 있다는 개념을 없애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위에 설명한 비유가 수행자들은 요소들을 개념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요소들은 사실 개념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실재를 앎으로써, 그 실재가 가지고 있는

속성인 무상, 고, 무아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요소를 명확히 밝히는데 골몰한 이 스님은 공허함에 깊이 빠지면서

살아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없앱니다.

그는 야생짐승, 초자연적 존재, 도깨비 등에 관한 그릇된 생각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버렸기 때문에 그는 무서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즐거움과 시름을 극복합니다.

그는 좋거나 싫은 것들에 의하여 기분이 들뜨거나 우울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이해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는 불멸의 영역에서 끝내거나 행복한 운명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상 청정도론에서 밝힌 붓다고사의 말씀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몸을 몸으로 보지 않고 4대로 보았을 때 이러한 현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행자가 몸을 지수화풍이라는 4대의 요소로 알아차리면

공허감에 깊이 빠지면서 살아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없앤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돌이켜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몸을 네 가지 요소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몸이 나의 몸이라는 생각으로 내가 존재한다고 믿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공허한 마음으로 인해 두려움에 빠져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몸을 나의 몸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몸은 항상 변하며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항상 많은 병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몸은 나의 몸이 아닙니다. 몸은 있지만 단지 원인과 결과에 의한 몸입니다.

여러 가지 부분으로 결합된 조건에 의한 몸이라고 알아야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몸으로 인해서 두려움과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합니다.

 

이렇게 나의 몸이 아니라고 알 때라야

비로소 몸을 집착하지 않아 몸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마음까지도 자유로워집니다.

 

수행자 여러분! 몸은 나의 몸이 아닙니다.

몸은 존재로서의 몸이 있고 인식할 수 있는 몸이 있습니다.

 

몸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라서 관념입니다. 그래서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재하는 것은 몸이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지수화풍 4대입니다.

그러므로 관념이 아닌 실재하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

몸을 구성하고 있는 4대의 요소를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한 영원히 나의 몸이라는 잘못된 견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몸과 마음에 대한 모든 분석을 하신 이유는

이렇게 지수화풍 4대라고 밝혀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게 하여

그 몸을 소유하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주석서를 살펴보면 수행자가 몸을 4대로 알아차리면 야생짐승, 초자연적 존재,

도깨비 등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주는 의미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결국 몸을 4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야생짐승, 초자연적 존재, 도깨비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실재하는 느낌이 아니고 모두 관념적인 것으로 하나의 표상입니다.

몸에서 나타나는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사람들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표상을 만듭니다.

 

그러나 이 표상은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야생 짐승의 경우는 무속인이 입신을 하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무속인은 실재하는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표상을 만들어서 봅니다.

무속인이 보통의 경우에 나비나 호랑이 개나 또는 다른 짐승을 봅니다.

이것은 입신의 전조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산신령이나 또 다른 몸주가 나타납니다.

 

이것들이 모두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여 생기는 하나의 표상입니다.

이렇게 나타난 표상이 한번 두번 거듭 나타나면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든 표상의 노예가 됩니다.

가령 산신령이 말을 하고 또 다른 몸주가 말을 한다고 했을 때에도

실제로는 자신이 말하고 자신이 듣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산신령이 있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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