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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40

通達無我法者 2010. 12. 26. 23:1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누구나 괴로울 때는 괴로운 만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합니다.

괴로움이 절실하면 노력도 더 열심히 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란 사실 새로운 힘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어떤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괴로움이 소멸될 수도 있고 더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괴로울 때는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면 괴로움은 단지 대상일 뿐이며 생길만 해서 생긴 것이라는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괴로움은 오히려 지혜를 주는 대상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괴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괴로움을 없애려고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입니다.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면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 하나의 길은 ‘괴로움이 있네.’ 라고

괴로움 그 자체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원인과 결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지혜가 납니다.

그래서 스스로 새로운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을 만들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묘지에서 9가지의 알아차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마지막은 묘지에서의 9가지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입니다.

지금까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배웠는데 모두 다섯 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묘지에서의 9가지 알아차림을 포함하면

몸을 알아차리는 것은 전부 14가지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간단한 몸 하나를 알아차리는 방법이 이토록 다양한 것은

우리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수행방법으로 집착을 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법들은 오직 수행자를 이롭게 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들숨과 날숨의 알아차림

둘째, 네 가지 자세를 알아차림

셋째, 분명한 앎

넷째, 몸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킴

다섯째, 네 가지 요소를 알아차림

여섯째에서부터 열네 번째까지 묘지에서의 9가지 알아차림입니다.

 

이상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몸을 알아차릴 때 필요한 수행방법입니다.

이상의 수행방법이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수행을 할 때 필요에 따라서 각기 수행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

지금까지 열거한 이상의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 중에서 들숨과 날숨의 알아차림과

네 가지 자세에 대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과 네 가지 요소를 알아차리는 수행은

반드시 함께 병행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몸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방법은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수행방법입니다.

그리고 묘지에서의 9가지 알아차림은 현재 사용하지 않는 수행방법입니다.

이들 두 가지 방법은 매우 적극적인 수행방법으로서

꼭 이 수행이 필요하다고 판단된 스승에 의해서 이런 수행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집착이 강한 사람은 이렇게 강력한 수행을 통해서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서 선택되는 수행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상좌불교 국가인 미얀마와

태국과 스리랑카에서도 묘지에서의 9가지 알아차림은 실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시체를 내다버리는 풍습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수행방법은 부처님 시대에나 가능한 수행방법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자들은 화장을 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공동묘지에 그냥 시체를 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런 수행방법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요즘 비구들이 입는 대가사의 천이 조각으로 모아 만든 것은 부처님께서 고행을 하실 때

묘지에 시체를 내다버릴 때 쓰인 천 조각을 주워서 입었기 때문에 생긴 전통입니다.

부처님이 되시기 전에 고행하시던 장소는 인적이 없고 부근에 시체를 내다버리기도 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수행을 한 것은 누가 오지 않아서 조용히 혼자서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상좌불교 국가에서 시체가 썩어가는 것을 알아차리는 대신에

사람의 뼈 모양을 그대로 만들어 놓고 알아차리는 백골관을 합니다.

미얀마의 사원에서도 사람의 뼈 모양을 재현해 놓고

그것을 대상으로 백골관을 하는 수행자들도 있습니다.

 

묘지에서 9가지의 알아차림은 몸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체가 썩어가는 과정을 봄으로써 몸에 대한 집착을 끊고 몸에 대해서 초연함을 키웁니다.

 

누구나 나의 몸이나 타인의 몸을 집착합니다.

이러한 집착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시작된 이래 거듭되어 온 집착입니다.

이러한 집착이 있는 한 유신견이 사라질 수가 없고

그래서 누구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는 이런 수행을 할 때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몸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했으면

부처님께서 썩어가는 시체를 보게 하셨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집착이 강하면 상대적으로 집착을 끊는 방법도 보다 적극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당히 알아차려서는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유신견을 결코 제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묘지에서의 알아차림은 신체의 해체과정을 통하여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를 알게 할 것입니다.

 

시체는 우리에게 죽음의 무서움과 두려움을 줍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것을 외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죽음을 비켜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체를 통하여 죽음의 참다운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볼 때

오히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체가 저렇게 되었으니 이 몸도 결국 저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면

무서움과 공포를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수행은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으면서 단계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삶을 비관적으로 끌고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시체를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없지만

경전을 통하여 이러한 과정을 아는 것으로 대신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내용을 듣는 것만으로도 수행의 좋은 과정을 경험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직접 시체를 보지 않고 생각하는 것으로도 수행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제가 미얀마에서 우안거를 하는 중에 탁발을 나갔는데

길거리에 개들이 죽어서 쓰러져 있는 것들이 보였습니다.

근데 그 누구도 개를 치우지 않았습니다.

 

우기이기 때문에 개들이 상한 음식을 먹었거나 불결한 환경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탁발을 나가면서 죽은 개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머릿속에 기억되어서

그날은 종일 수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개가 쓰러진 것 때문에 수행을 할 수가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스승께서는 ‘그것은 4대의 변화다.’ 라고 가볍게 말씀하셨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부드럽다가 단단해진 것이고, 또 피가 흐르다 멈춘 것이고,

뜨겁다가 차가워진 것이고 움직이다가 움직이지 않는 것, 그것 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

죽음이란 4대의 변화다, 라고 감성적인 죽음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해주셨습니다.

 

그 뒤부터 저는 죽음을 사대의 변화로 봅니다.

사대의 변화로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무상한 것이고 ,

필연적으로 있기 마련인 것이고, 단지 그것은 무상이라고 알게 할 뿐입니다.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와야 될 것인데 늦고 빠르고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외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행과정을 거치면서 이제 자신도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하는 사람의 죽음과 준비가 없는 사람의 죽음은 과보가 다릅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현생의 미련과 집착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면 현생의 모든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집착하면서 죽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하면 깨닫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고통스럽게 죽으며

다음 생에 좋지 않은 과보를 받아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죽으면서도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죽으면 끝인데 이익을 얻고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온을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모였다 흩어지는 과정만 있습니다.

그것들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원인과 결과로 모였다 흩어지는 것들입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가족도 그렇습니다. 지위도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한때 그것을 소유했던 것들이지 그것이 나의 것은 아닙니다.

단지 모였다가 흩어지는 과정만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러면 2500년 전 부처님 당시에 시체를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수행을 할 수 없다고 해도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가령 가까운 친척이나 가족의 시체를 보았을 때, 또는 사고로 죽은 시체를 보았을 때,

또는 꿈속에서나 생각으로 시체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결국 이런 시체를 보는 것도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묘지에서의 9가지 알아차림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비구들이여, 그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죽은 지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지나면

부풀고 검푸르고 문드러진 것을 보는 것처럼.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것에 비추어 본다.

이 몸 또한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에서 피할 수 없다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몸에서 몸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몸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몸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단지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몸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다시 비구들이여, 그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까마귀 떼가 달려들어 마구 쪼아 먹고,

솔개 무리가 쪼아 먹고, 독수리 떼가 쪼아 먹고, 개떼가 뜯어 먹고,

자칼들이 뜯어 먹고 온갖 벌레들이 다 모여서 파먹는 것을 보는 것처럼.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것에 비추어서 본다.

이 몸 또한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에서 피할 수 없다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몸에서 몸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몸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몸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단지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몸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시체를 알아차리는 것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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