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자가 머물러야 할 장소는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밖에 있는 감각 대상과 부딪힐 때, 알아차리는 마음이 항상 감각 기관에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면 좋거나 싫다는 반응을 하게 되어 번뇌를 일으킵니다.
사람을 볼 때도 사람에게 마음이 가면 좋거나 싫다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사람을 보고 있는 마음을 보면,
사람이 단지 알아차릴 대상일 뿐이라서 좋거나 싫다는 차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소리, 냄새, 맛, 접촉, 생각과 부딪힐 때마다
마음을 감각 기관에 두고 알아차려야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고요해 집니다.
수행자가 인식하는 장소가 감각 기관이므로, 오직 감각 기관이 실재하는 장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게 법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이것이 법’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법은 여러분 스스로가 선택해서 가져가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중한 법이라도 자신이 모르면 가져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법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법을 자신이 찾아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의 스승이 아닙니다.
스승은 법을 말씀하신 부처님이십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법이 바로 스승입니다.
저와 여러분 사이에는 엄격한 역할이 있습니다.
저는 저의 의무를 다하고 여러분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면 됩니다.
각자가 역할을 다할 때 아무런 걸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저에 대한 모양이나 관념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법은 전해져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마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음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마음은 비물질이라고 한 것은
마음이 물질과 함께 있지만 보이는 물질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정신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이것이 모든 것을 이끕니다.
그러나 마음의 실제의 기능은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눈이라는 감각 기관이 물질이라는 대상을 빛에 의해서 보고
아는 마음이 일어나야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귀라는 감각기관이 소리라는 대상을 장애가 없는 공간에 의해 듣고
아는 마음이 일어나야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코라는 감각기관이 냄새라는 대상을 공기라는 바람의 방향에 의해서 맡고
아는 마음이 일어나야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혀라는 감각기관이 맛이라는 대상을 침에 의해서 맛보고
아는 마음이 일어나야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몸이라는 감각기관이 감촉 대상을 접촉해서
아는 마음이 일어나야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이 생각이라는 감각대상을 접촉해서
아는 마음이 일어나야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체 외부의 개입이 없이 오직 저 스스로의 조건에 의해서
아는 마음이 일어나고, 일어난 순간에 사라지는 현상만 있습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이렇게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눈이라는 감각기관과 형상이라는 감각대상에
빛이라는 조건이 있어서 보고 알듯이,
네 가지 조건이 성숙되어야 아는 것이 성립됩니다.
여기서 마음 하나만 있어도 안 되고 눈 하나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아는 것이며
누구의 힘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조건의 성숙으로 아는 것입니다.
눈과 귀, 코나 혀, 몸이나 마음이 모두
이러한 동일한 조건하에서 대상을 압니다.
그래서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때의 대상은 아는 것을 위한 조건입니다.
이처럼 마음 하나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써 오직 하나입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에 하나의 대상을 알고 그 마음은 즉시 사라집니다.
그런 뒤에 다음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 밖에 알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을 알아야 마음을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세하게 알아야 마음의 무상과 무아를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화면의 연속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계속됩니다.
이때 모든 것이 하나로 붙어서 진행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연속되는 현상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가령 영화를 볼 때 한 컷, 한 컷에 수많은 필름들이 모여서 돌아가야 영화가 계속됩니다.
이때 필름의 한 컷은 바로 한 순간의 하나의 마음과 같습니다.
한 순간의 마음이 하나라고 알 때 비로소 무상과 무아를 아는 지혜를 얻습니다.
우리는 이런 지혜가 없기 때문에 항상 같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처럼 최소의 단위들이 모여서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장면이 없듯이 같은 마음이 없습니다.
한 순간에는 한 필름의 한 장면만 있듯이 마음도 똑같이 하나의 마음만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좌선을 시작하면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망상이 일어나고 졸리고 여기저기서 통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호흡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여러 가지 현상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이 빠르게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알아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한 순간에 하나 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저기로 이곳저곳으로 분주하게 다니면서 알아차리면
집중력이 생기지 않아 고요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마음의 실상입니다.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 움직이려는 의도가 있어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때 움직이려는 의도는 일어나서 즉시 사라집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음 마음을 일으킵니다.
이때 의도도 일어나서 사라지고 몸을 움직이는 동작도 같은 동작이 아닙니다.
이처럼 지혜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순간순간이 모여서 연속되는 것이지
하나로 같은 것이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마음은 일어나서 사라지고 다음 마음이 다시 일어납니다.
다음 마음도 일어나는 순간에 즉시 사라지고 또 다시 다음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때 조금 전의 마음은 나의 마음이 아니고 현재의 마음도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이후에 일어나는 마음도 나의 마음은 아닙니다.
단지 조건에 의한 마음만 연속적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나의 마음이라고 하면 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마음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적습니다.
마음은 축적된 성향과 과보에 의해서 계속해서 진행됩니다.
만약 나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죽기 전에 나에게 호흡을 계속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숨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숨을 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호흡을 계속하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원인과 결과에 의한 조건만 작용할 뿐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아를 강화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아가 없다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이 자신을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두려울 때는 ‘지금 내가 두려워하고 있네! 하고
이 사실을 대상으로 새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영원히 어리석음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마음은 대상을 인지하여 알고, 맞아 들여서 대상을 경험합니다.
사실 마음은 단지 안다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매우 단순한 기능을 합니다.
실제로 모든 것을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합니다.
물론 마음이 있어서 모든 것을 하지만 그 다음에는 마음의 작용이 있어서
마음이 하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대상을 아는 기능을 하지만 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반드시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라는 정신적 동반을 해야 일어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처음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기보다
느낌을 통해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지각을 통해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의도를 통하여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기능을 하고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만 있기 때문에
한 순간에 하나 밖에 알 수 없으며,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마음은 일어난 즉시 사라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나 경지에 따라서, 일어나는 곳에 따라서 분류합니다.
죽을 때 욕계의 마음이 일어나면 욕계에 태어나는 마음이 일어나고 그곳에서 몸이 생깁니다.
색계의 마음이 일어나면 색계에 태어나는 마음이 일어나고 그곳에서 몸이 생깁니다.
무색계의 마음이 일어나면 무색계에 태어나는 마음이 일어나고 그곳에서 몸이 없이 태어납니다.
출세간의 마음이 일어나면 집착을 하지 않고 갈애가 없는 마음이 일어나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렇듯 마음의 상태와 경지에 따라 다음에 태어나는 곳이 다릅니다.
뿐더러 현재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현재는 물론이고 지금 이후의 마음이 다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윤회는 순간의 윤회가 있고, 한 일생의 윤회가 있기 때문에
현재 마음의 경지는 현재 마음의 상태를 결정합니다.
예를 들면 현재의 마음이 색계 1선정의 마음이면
현재에도 1선정의 세계에 살며 죽어서도 1선정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현재의 마음이 화를 내고 뜨거우면 현재에도 지옥을 사는 것이며
이런 마음으로 인해 죽어서도 지옥에 갑니다.
현재 아귀처럼 인색하여 먹지도 않고 배부르지도 않으면 현재에도 아귀로 살며
죽어서도 역시 아귀로 태어납니다.
이렇듯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서 현재의 삶의 질이 결정되며,
다음 세계의 태어나는 곳이 결정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렇게 태어날 때의 마음은 다시 네 종류로 분류합니다.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네 가지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첫째는 선심입니다.
둘째는 불선심입니다.
셋째는 과보심입니다. 이때의 과보심은 선 과보심과 불선 과보심이 있습니다.
넷째는 무인작용심입니다. 이때의 무인작용심은 원인과 결과가 없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러 가지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이런 마음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선한 조건이 성숙되면 선한 마음이 일어나고,
선하지 못한 조건이 성숙되면 바로 선하지 못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한 순간에 이 두 가지 마음이 교차 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 우리들의 마음이 선했다 선하지 못했다 하면서 변하는 것은
원래 이런 두 가지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세 번째 마음까지 가세합니다. 바로 이것이 과보심입니다.
과보심은 과거에 행한 업에 의해서 오도록 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과거에 선한 행위를 많이 했으면 선한 과보가 와서 현재의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합니다.
과거에 선하지 못한 행위를 많이 했으면 현재 선하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불선과보가 우리를 지배합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많이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과보심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의지를 새로 내서 선한 마음을 일으키지만
거의의 모든 사람들은 과거에 만들어 놓은 과보에 의해 떠밀려가면서 삽니다.
이것은 자기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선한 과보에 의해 수행을 할 수도 있고,
현재 스스로가 선한 마음을 일으켜 수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네 번째, 무인작용심은 원인과 결과가 없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앞선 세 가지 마음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마음입니다.
네 번째, 원인과 결과가 없는 마음을 아라한의 마음,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아라한이나 부처님은 새로운 원인을 일으키지 때문에 받을 것이 없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윤회가 끝납니다.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이유는,
원인과 결과를 알아서 새로운 원인을 일으키지 않아
무인작용심을 갖는 것이 모든 수행자들의 궁극의 목표입니다.
무인 작용심인 원인과 결과가 없는 마음이 되었을 때만이
비로소 우리는 완전한 해탈의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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