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자기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면 계율을 지켜 고요해지고, 고요해진 마음의 상태에서 지혜가 납니다.
이것들이 모두 자신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관리할 때만이 스스로 보호받을 수 있으며 남도 보호하게 됩니다.
수행자가 엄격한 것은 개인의 의사라기보다 법을 지키려는 자신의 관리입니다.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엄격하지 않을 때는
몸과 마음이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바른 수행자의 행위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결정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품위를 결정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현재를 결정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앞으로 남은 생을 결정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합니다.
자신의 견해가 바르면 바른 결과가 있고 바르지 못하면 바르지 못한 나쁜 결과가 있습니다.
자신의 견해가 바르면 현재도 좋고 미래에도 좋습니다.
그러나 바르지 못하면 현재도 괴롭고 미래도 괴롭습니다.
모든 선택은 자신의 마음이 합니다. 남을 탓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자신이 스스로 이끌어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가장 확실한 결과가 보장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마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마음이 있어서 그것을 이끕니다.
몸이 만들어지는 것도 먼저 마음이 있어야 하고, 마음에 의해 생긴 업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온도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자양분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앞에서 이끌어야 몸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몸을 만드는 것이 바로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마음과 업과 자양분과 온도가 있어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끄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앞서서 이끄는 마음이 선한 마음일 때는 선행을 하여 선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마음일 때는 불선행을 하여 불선과보를 받습니다.
이것을 업자성정견이라고 합니다. 무엇이나 지은 대로 받습니다.
이때 누가 있어서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원인이 결과를 만듭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도 과거에 지혜로운 마음이 있어서
오계를 지키는 행위를 하여 그 과보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음 생에 또 인간으로 태어나리라는 보장은 받지 못합니다.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음 생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으로 태어나서 잘못된 마음으로 잘못된 행위를 하면
지금 당장 짐승처럼 살며 다음 생에도 짐승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과보가 상속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마음에 의해 순간의 윤회와 다음 생의 윤회라는 두 가지 윤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윤회라는 것은 흐름, 지속, 상속인데 계속 흘러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과보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보가 전해지는 것은 지금 이후 한 순간, 순간들의 윤회가 있고
죽은 뒤에 다음 생이 새로 시작되는 윤회가 있습니다.
이때 내가 과거에 무엇으로 살다가 여기에 인간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그런 나는 결코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내가 현재로 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 왔을까요?
정답은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온 것이 아니고
행위를 일으킨 원인이 현재의 결과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유신견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너, 나, 그리고 당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런 것들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고 관념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원인이 결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어디에서 내가 온 것이 아니고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로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온 것이 아니고
행위를 일으킨 원인이 현재의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래의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정답은 똑같습니다.
현재의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미래의 결과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물론 미래에도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일으킨 과보가 전해져서 그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이 윤회의 무엇이 지속되는가요? 내가 지속되는가요?
아닙니다. 지금 일으킨 원인이 지속됩니다.
이때 이 원인이 행위를 한 과보가 다음 생에 전해져서 지속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선심과 불선심은 섞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선심은 선행을 하여 선과보를 받고 불선심은 불선행을 하여 불선과보를 받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불선심으로 인해 불선행을 한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괴로움으로 인해 수행을 한다면
선심이 일어나 선행을 하여 선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괴로울 때 선과보가 없으면 계속해서 더 괴로운 일을 하여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괴로울 때 수행을 하면 그간 쌓아놓은 선과보가 작용을 하여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일이 일어났을 때 괴로움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고
괴로움을 받아들이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선심을 내는 것이 불선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미얀마의 저희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미얀마까지 와서 수행을 하는 것은 선한 과보로 인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괴로움이 없으면 수행을 하지 않습니다.
수행을 시작했다고 해도 괴로움이 없으면 얼마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얼마간의 괴로움은 지혜를 촉발시키는 약과도 같습니다.
스승님의 말씀을 들은 저는 약간 의문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괴로움을 해결하지 못하여 미얀마까지 왔는데
선과보 때문에 수행을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괴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수용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선과보와 불선과보가 서로가 섞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제가 괴로움을 겪은 것은 불선과보로 인한 것이고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선과보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구나 괴롭습니다.
그러나 괴로울 때 선과보가 있는 사람은 괴로움을 극복할 지혜를 냅니다.
이때 선과보가 작용한 것입니다.
수행을 하려고 마음을 낸 것은 과거에 만들어진 선과보가 와서
수행을 할 새로운 마음을 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괴로움을 겪으면서 계속 괴로울 일을 하는 것은
계속 불선과보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과거의 선과보가 적은 사람입니다.
이렇듯 무엇이나 마음으로 시작하여 결과를 만들고
그 결과가 다시 새로운 원인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괴로움은 바로 올 것이 온 것입니다.
올 것이 온 것 때문에 괴로울 것 없습니다.
오히려 올 것이 와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간 선한 일을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알아차리고 새로 선한 일을 하면 됩니다.
그 선한 일 중에 지혜가 나는 수행이 가장 수승한 선행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만이 모든 것을 관통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번뇌를 관통해서 부수지만
그렇지 않은 다른 행위는 일시적으로 모면하는 수준에 그쳐 괴로움이 다시 계속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은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끈다는 법구경 게송을 들어보시겠습니다.
짝꾸빨라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앞을 못 보던 짝꾸빨라 장로가
벌레들을 밟은 일과 관련하여 게송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때 짝꾸빨라 장로는 석 달 동안의 안거를 무사히 마치고
부처님을 뵙기 위하여 제따와나 수도원에 도착했습니다.
장로는 이날 밤 자신이 걷는 동작 하나하나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행을 했습니다.
장로의 정진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는데 주위가 어두웠던 탓으로
그만 벌레 몇 마리를 밟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비구 몇 사람이 짝꾸빨라 장로가 머무는 곳에 왔다가
벌레들이 밟혀 죽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구들은 짝꾸빨라 장로의 계행을 의심하게 되어 이 사실을 부처님께 보고 드렸습니다.
보고를 받으신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짝꾸빨라 장로가
벌레를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을 보았는지 그 여부를 물으셨습니다.
비구들이 그렇지 않다고 아뢰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짝꾸빨라가 의도적으로 벌레를 죽이는 것을 보지 못했듯이
앞을 보지 못하는 그 또한 벌레들이 거기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니라.
그는 이미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자이니라.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고의로 생명을 해치겠느냐.
또 설사 그가 벌레를 죽였다하더라도 그것은 고의적인 행위가 아니므로
그의 계행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비구들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짝꾸빨라 장로는 아라한과를 성취할 만한 복력이 있는 분인데
어째서 금생에 눈을 못 보는 과보를 받았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짝꾸빨라 장로의 전생을 말씀하셨습니다.
짝꾸빨라 장로의 전생은 의사였습니다.
그때 그는 고의적으로 한 여인의 눈을 멀게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 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때 한 여인이 있었는데 웬일인지 점점 눈이 아프고 어두워져오므로
눈병을 고쳐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그때 당시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인 금생의 짝꾸빨라 장로를 찾아갔습니다.
이때 여인의 마음은 오직 눈이 나아서 고통과 어둠이 걷히기를 바라는
그 마음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의사가 청하지도 않은 약속까지 해가며
의사에게 자기 눈을 고쳐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만일 의사가 자기 눈을 고쳐주기만 한다면 평생 동안
자기는 물론 자기의 자녀들까지 의사의 노예가 되겠다고 제의했던 것입니다.
여인의 약속에 매우 만족한 의사는 자기의 능력을 다하여 약을 지어주고
그 약을 바르자 여인의 눈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이 낫자 여인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녀는 한때의 성급한 약속 때문에 자기는 물론
자녀들까지 의사의 노예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의사를 속이기로 마음먹고 눈이 낫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다시 그 여인에게 괘씸한 생각이 들어 눈이 머는 약을 발라 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의 눈은 또 다시 나빠지더니 결국은 영영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의사는 이 같은 행위를 한 과보로 그 뒤에 태어날 적마다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것도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의사 즉, 지금의 짝꾸빨라 장로는 이제 아라한 도과를 성취하여
다시는 생을 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이야기 끝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마음이 그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에게는 반드시 괴로움이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여기서 마음이 그들을 앞서간다고 할 때 ‘그들’은 색,수,상,행을 말합니다.
그리고 식이 마음을 이끕니다.
그리고 괴로움이란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고통, 그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라고 할 때 이때 ‘주인’은 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인공이나 진아, 자아를 말하지 않고 앞선 원인을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수레가 황소에 의해 끌려갈 때 황소를 말하듯이
앞에서 이끄는 것을 주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렇듯 모든 것들은 앞에서 이끄는 마음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우리가 이 순간 알아차려서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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