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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57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00:3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여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먼저 대상의 모양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처음에는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알기 쉬운 움직임이나 모양을 알아차려서 대상에 마음을 머물게 해야 합니다.

 

마음이 대상에 머물면 알아차리는 힘이 생겨

차츰 다음 단계로 고유한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모양은 단순한 것이라서 변화를 볼 수 없어 싫증이 납니다.

그러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리면 끊임없이 변하는 성품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새롭게 느껴져서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미가 있기 때문에 집중력이 생겨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단계를 충실히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알게 되면, 다음 단계로 대상의 조건지어진 특성을 알게 됩니다.

집중력이 생기면 모든 것들이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생긴 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모든 대상들에 대한 의문이 풀립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건지어진 특성을 안 뒤에 마지막으로 지혜가 성숙되어서

보편적인 특성, 일반적인 특성을 알게 됩니다.

 

보편적인 특성이나 일반적인 특성은 바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과

존재한다는 것들은 괴로움이고,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이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집착이 끊어져야 비로소 열반에 이르는 문에 다다르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 우리는 갈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경험했고 여러분들도 경험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누구나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 진실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이 단지 지식으로 그치지, 지혜로 연결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정한 방법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통찰지혜가 나야 비로소 대상의 온전한 성품을 알아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수행자는 갈애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모두 갈애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수행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나 가장 맛있는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혜의 눈이 없으면 결코 갈애가 일으킨 결과의 심각함을 알 수 없습니다.

 

갈애가 괴로움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지혜이고, 이러한 지혜는 선업의 과보로 압니다.

그래서 선업의 과보가 없으면 수행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감각적 욕망을 버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귀찮아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법은 원하는 자의 것입니다.

아무리 주려고 해도 조건이 성숙되지 않으면 줄 수 없습니다.

받으려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무지는 게으름입니다.

게으르면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에서 게으름이 가장 큰 장애입니다.

이 게으름을 무명, 무지라고도 합니다.

이제 선업의 과보만 탓할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이 스스로 선업의 과보를 만들어야 합니다.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는 있는 업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업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숫자는 89가지로 분류하는 방법이 있고,

출세간의 분류 방법에 따라서 모두 121가지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많은 숫자는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서 각기 다른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한 순간에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에게 마음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사실 큰 의미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자는 어떤 마음이 되었거나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입니다.

 

그래서 숫자는 관념이고, 실재하는 것은 현재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마음의 종류에 따른 숫자가 나오는데

이것들을 단지 구성요소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할 대상은 현재의 마음 하나면 되지만, 마음을 완전하게 이해하려면

여러 가지 숫자의 마음들이 어떤 것들인지 아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마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마음의 숫자를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뒤에 설명해드릴 부처님께서 설명하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16가지 마음도

사실은 전체 마음 121가지 마음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마음의 종류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시겠습니다.

 

마음은 크게 4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 욕계의 마음입니다.

둘째, 색계의 마음입니다.

셋째, 무색계의 마음입니다.

넷째, 출세간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어느 세계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다르고,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는 수행을 해서 출세간의 마음이 어느 수준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이것으로 보아서 이 세상은 인간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여러분! 생명이 사는 존재의 세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출세간계가 있는데 출세간계는 도과를 성취한 성인들의 마음입니다.

부처님께서 인간의 마음만을 말하지 않고

존재하는 31세계의 마음들을 모두 포함해서 분류한 것은 모든 생명이 똑같이 윤회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인간이지만 죽어서 어디로 가서 새롭게 재생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과거에 어디서 있다가 인간으로 새롭게 재생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내가 있어서 오고, 내가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의 결과가 있고, 다시 현재의 원인으로 미래의 결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보에 의해 재생을 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전혀 과거와 미래가 무관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생명은 윤회하는 세계에서 끊임없이 상속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만 따로 떼어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존재는 어디에 있건 모두 하나의 생명 대 안에서 살고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면 불교의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마음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전통적인 주석서에서는 마음을 정의하기를 세 가지로 정의 합니다.

 

첫째는 행위를 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는 마음입니다.

이때는 ‘대상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고 한다’라고 정의 합니다.

둘째는 마음을 도구의 측면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때는 ‘이것으로 인해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고 한다’라고 정의합니다.

셋째는 행위 그 자체 입장에서 보는 마음입니다.

이때는 ‘단지 알고 있는 그 자체가 마음이다’라고 합니다.

이상 세 가지 측면에서 보는 마음들은 모두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라고 하면 마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대상을 안다는 것은 매우 단순한 행위에 속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단순한 기능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자여러분!

마음이 대상을 아는 것이라고 했을 때는 아는 마음이 어떤 다른 것과 섞이지 않고

단순하게 대상을 아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대상을 안다는 것은 마음이 아는 것으로 국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아는 것에 그친다거나, 다만 아는 것에 그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대상을 알고 나서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거나, 괴로워한다거나

하는 것은 마음이 하는 역할이 아닙니다.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일으킨 여러 가지 일들을

마음이 단지 받아들여서 아는 것입니다.

 

어떤 느낌이 일어나면 그 순간에 다시 마음이 이것을 압니다.

그리고 어떤 상상을 했을 때도 마음이 단지 이것을 압니다.

그리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위를 했을 때도 마음이 단지 이것을 압니다.

이처럼 마음은 대상을 아는 단순한 기능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있어서 수, 상, 행이 함께 있으며

다시 마음은 수, 상, 행이 일으킨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아는 기능만 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그 자체는 청정한 것입니다.

 

좋은 느낌이 일어나면 마음이 좋은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알고,

나쁜 느낌이 일어나면 마음이 나쁜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압니다.

그래서 마음은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일으킨 것과 함께 같아집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래서 마음은 알고 마는 것이지,

알아서 어떻게 반응하거나 무엇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안 뒤에 괴로워하는 것은 ‘수’라고 하는 느낌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뒤에 상상하는 것은 ‘상’이라고 하는 지각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뒤에 어떤 의도를 내는 것은 ‘행’이라고 하는 마음의 의도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뒤에 이러한 수, 상, 행의 작용이 일어나면 다시 그것을 마음이 압니다.

이것이 마음의 실제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하늘과 같습니다.

하늘에는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별이 뜨고, 구름이 있고, 바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아무 조건 없이 이것들을 그냥 받아들이는 기능을 합니다.

마치 마음과 같이 말입니다.

 

마음이 땅과 같고 나무와 같은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땅과 나무도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마치 마음처럼 그냥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관용입니다.

그냥 대상이 있어서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말이 단순한 것 같아도 사실은 최고의 지혜가 담긴 말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아는 기능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가 있는 마음만을 제어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을 함께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효과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마음이 단지 대상을 아는 것으로 그친다는 것은,

마음의 실재를 알아야하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러한 기능이 앞서 말씀드린 부처님과 아라한이 가진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마음을 무인작용심이라고 해서

원인과 결과가 없는 마음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이때의 마음이 다른 것과 섞이지 않고 단지 대상을 아는 마음

그 자체가 있는 것만을 말합니다.

 

마음이 무엇이라고 설명할 때는 이렇게 이해해야 마음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야 바르게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설명 드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무엇이라고 설명하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말하는 입장에서 하나를 설명할 때 그 이유를 모두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대해서는 그냥 듣는 과정이 필요하며,

더 좋은 것은 수행을 하면서 들으면 그것이 뜻하는 의미를 차츰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위가 없는 깨달음을 얻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존경하는 스승이신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모두 그대로 듣고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처님의 이론을 더 나쁘게 해석하여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선심과 불선심과

선과보와 불선과보가 함께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때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기에 불교를 공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