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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56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00:3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어떻게 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까?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음으로 몸과 마음에서 나타난 현상을 모두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아닌 밖에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에서는

지혜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밖에 있는 것을 볼 때는 내가 본다는 유신견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대상이 가지고 있는 법을 보지 못합니다.

 

오온을 가지고 생긴 문제의 답은 오온에서 얻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나타난 대상을 바라거나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는 것이 탐욕과 성냄이며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어떤 현상이나 나타난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알아차리는 것이

지혜를 나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마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태어날 때 네 가지 마음 중에 세 가지 마음인

선심과 불선심과 과보심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네 번째 무인작용심은 원인과 결과가 없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선심과 불선심과 과보심은 모두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무인작용심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 아니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아는 마음만 있지 대상을 즐기거나 혐오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은 바라는 마음인 갈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마음 없이 어떻게 사느냐고 반문할지 몰라도 이것은 자기 수준의 판단입니다.

 

이때의 바람은 욕망을 말합니다.

출세간의 정신세계는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단지 이런 정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쳐야지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바라지 말라는 것은 불선한 욕망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아라한이 되려는 선한 마음을 내야합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윤회하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시작되고 끝을 맺는데,

원인과 결과가 없다는 것은 윤회계의 흐름에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습니다.

태어난 것은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을 해서 업을 생성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은 갈애가 없어서

집착을 하지 않아 업을 생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사(不死)는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죽을 일이 없어서 불사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 태어나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그러한 불사(不死)는 없습니다.

 

선심과 과보심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선심은 선과보심과 어울립니다.

현재 자신이 선한 마음을 일으키면 선한 행위를 하여 선한 과보심이 생깁니다.

그러면 선과보심의 영향이 커집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선한 마음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한 마음을 먹는 것이 선과보에 의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현재 선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키면 불선행위를 하여 불선과보심이 생깁니다.

그러면 불선과보심의 영향이 커집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현재 선한 마음을 가지려고 해도

불선과보심이 일어나서 선한 마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마음이 바로 자기 마음대로 조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선한 마음이나 선하지 못한 마음은

이런 과보심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의지대로 일으키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현재의 마음을 자기 마음먹은 대로 갖고 싶어도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만들어 놓은 과보심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이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만들어 놓은 과보심에 의해 조종당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윤회의 실상입니다.

 

과보란 인과응보의 줄인 말입니다.

인과응보는 원인과 결과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조건이라고도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도 동질성을 가진 것끼리 모입니다.

그래서 동류는 따르고 동류가 아닌 것은 배척합니다.

그래서 같은 것끼리 모입니다.

마음도 역시 끼리끼리 모입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은 착하지 못한 사람을 싫어하며

마음이 착하지 못한 사람은 착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무인작용심을 가진 사람은 마음이 착하고 착하지 않은 것이 없이

모두 동일하게 받아들입니다.

 

선심이 있으면 선과보심이 생기고, 선과보심이 일어나면 선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불선심이 있으면 불선과보심이 생기고

불선과보심이 일어나면 다시 불선심이 생깁니다.

마음과 과보심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주고받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마음과 자신이 일으킨 과보심이 작용을 하지만

사실은 상대의 마음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누구나 선한 사람과 만나면 선한 마음을 갖고 선한 과보심을 만듭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불선심을 갖고 불선과보심을 만듭니다.

이런 과정을 모두 원인과 결과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조건 지어진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자기 의지대로 살고 싶어도

이처럼 자신이 만든 선과보와 불선과보심의 영향 하에 있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자신의 과보심의 영향만 받는 것이 아니고 상대의 과보심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이때 자신이 일으킨 업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고

상대의 업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유발이 된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이 친구를 잘못 만나서 나쁜 영향을 받으면

상대에 의해 불선과보심이 유발되어 불선행을 합니다.

그러나 훌륭한 친구를 만나면 상대의 선과보심이 유발하여 선한 행위를 하게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수행을 하면 자신이 스스로 선한 마음을 내어 자발적인 상황을 만듭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자신을 보호할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만듭니다.

 

자신의 행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 자신의 행복을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해결할 절대적인 존재는 없으며

누구도 결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심지어 부처님조차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45년 동안이나 강조하셨습니다.

자신의 문제는 오직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고

여래는 단지 해결하는 방법을 말할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을 하면 자신의 불선과보심도 선심으로 만들 수 있으며,

상대의 불선과보심도 선심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선심을 만들면 자신도 선하고 더불어 남에게도 선심을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네 번째 마음인 무인작용심이 생깁니다.

 

우리가 이상의 네 가지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네 번째 마음인 무인작용심은 계발이 되지 않아 현재 잠자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네 번째 마음을 계발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인작용심은 원인과 결과가 소멸한 마음이며 그래서 갈애가 사라진 마음입니다.

무인작용심은 마음은 있는데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서

업이 될 만한 새로운 원인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은 부처님과 아라한의 마음입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사라져

갈애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받을 것이 없어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선하다고 할 때는 항상 불선의 반대급부가 따르지만

무인작용심은 선과 불선을 떠난 완전한 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무인작용심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사라진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누구나 아라한의 마음인 무인작용심을 갖기 전까지는

선심과 불선심과 선과보심과 불선과보심으로 인해 매순간 변덕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의 마음은 이중인격이 아니고 다중인격입니다.

 

만약 수행을 하지 않고 습관대로 산다면

매순간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변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결국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내가 있어서 모든 것을 하는 줄 잘못 압니다.

그래서 항상 탐욕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마음이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고 이렇게 불가피한 것이라는 실상을 알았으면

이제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에 대하여 비난할 것이 아니고,

마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남에 대해서도 이해와 관용을 가지고 대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알아야할 중요한 사실은 이런 마음이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도 상대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과보심은 잠재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더구나 선심과 불선심과 선과보심과 불선과보심은 나의 마음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일으키고 감각기관이 경험하는 마음이므로

우리가 이런 마음들 때문에 괴로워할 것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이 일어나거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현재 새로운 무인작용심을 갖는 것이 수행자의 사명입니다.

 

행복은 다음 기회에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있는 행복이 미래의 행복도 결정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으로 미룰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길 밖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고 마음이 그것을 압니다.

이때 아는 마음에 알아차림이 없으면 감각기관을 통해서 번뇌라는 도둑이 함께 들어옵니다.

그리고 도둑이 자신을 지배합니다.

 

하지만 대상을 아는 순간마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번뇌라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르는 마음은 괴로움이고 아는 마음은 즐거움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원인과 결과가 없는 마음인 무인작용심은 아라한의 마음이자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불성이라고 합니다. 바로 부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마음이란 다름 아닌 무인작용심입니다.

우리가 불성을 특별한 것으로 알거나 신비로운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불성이란 원인과 결과가 없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란 말입니다.

 

원인과 결과는 연기적 구조이고, 원인과 결과가 없는 마음은 연기에서 탈출한 마음입니다.

불성이란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오직 선한 마음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불성은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일 때라야 연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기의 길을 가는 자는 범부이고 연기의 길을 벗어난 자는 깨달은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갈애가 있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받을 것이 있어서 태어난 것으로

범부의 길입니다.

하지만 갈애가 없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은 받을 것이 없어서 태어나지 않는 것으로

깨달은 자가 가는 길입니다.

 

이러한 연기의 길은 부처님이 발견한 것이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중생들은 모르고 있던 사실을 부처님께서 발견하시고 그 길을 벗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 길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