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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69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0:1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못 알아차린 날들이 있어서 알아차리는 날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문제 삼지 말아야합니다.

못 알아차린 것을 안 것만으로도 크게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새로 알아차리는 것이고

그리고 알아차림을 얼마나 지속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알고서 다시 알아차림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과거의 일이고,

현재 알아차렸으면 이것을 지속하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못 알아차렸다고 자책하는 것은 아무 소득이 없는 일입니다.

 

알아차림은 시작부터 알아차릴 수가 있고,

중간에 알아차릴 수가 있고, 끝에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지나고 나서 알아차리는 것을 반복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아는 것으로 당신은 훌륭한 성공을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마음의 작용에 대해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탐욕도 한 가지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탐욕이 일어날 때 탐욕만 있지 않고 다른 세 가지 것이 결합되어 나타납니다.

 

성냄도 마찬가지입니다.

탐욕의 마음의 작용이 일어날 때는 어리석음과 탐욕이 각각 여러 가지로 모여 있는 것처럼,

성냄도 하나만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냄, 질투, 인색, 후회라는 네 가지가 함께 결합하여 일어납니다.

 

해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의 것들이 모여서 일어나는 것처럼 해태도 하나만 있지 않습니다.

해태도 해태와 혼침, 두 가지가 함께 결합하여 일어납니다.

 

이처럼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은 그룹별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그룹 중에서 어리석음을 선봉으로 한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 네 가지는

모든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날 때마다 항상 함께 결합하여 일어납니다.

 

마음의 작용은 저 혼자만 일어나지 않고 항상 다른 것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의 층이 두껍고 미묘할 뿐만 아니라 복잡합니다.

이것들이 모두 조건에 의해 서로가 결합되어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란 것이 간단치가 않습니다.

하나만 있을 때는 그 힘이 약하지만 두 가지, 세 가지가 모이면 그 힘이 강력해집니다.

그래서 강한 원인을 만들어서 강한 결과를 늘 만듭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러나 아무리 마음의 종류가 많고 마음의 작용의 종류가 많아서

복잡하게 얽혀서 일어난다고 해도 이제 수행자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마음이나 또 어떤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든 간에

일어난 순간에 일어난 것 하나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숫자가 많은 것은 단지 분류를 위한 항목이고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은 현재 여기에 있는 것 하나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면, 모든 복잡한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숫자에 걸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수행은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이고,

대상은 언제나 한 순간에 하나밖에 없으므로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수행은 단지 대상을 아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 중에서 아는 마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제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에서

항상 함께 있는 마음의 작용 네 가지를 하나 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은 혼란함, 미혹 등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음의 반대가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이란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는 알아서 번뇌를 끊지만, 어리석으면 몰라서 번뇌를 움켜쥡니다.

모르기 때문에 좋은 것을 나쁘게 알고 나쁜 것을 좋게 압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어리석음은 선하지 못한 것의 근원이자 상징입니다.

그래서 불선심의 뿌리입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모든 불선한 행위가 일어납니다.

어리석음은 어두운 상태라서 무명이라고 합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대상의 본성을 덮어버리고 보지 않으려고 하며 통찰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수행을 하지 않으므로 나타나기 때문에

수행을 하면 지혜를 얻어서 어리석음인 미혹에서 벗어납니다.

 

주석서에서는 어리석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어리석고, 혹은 어리석음 스스로 어리석고,

혹은 단지 어리석기 때문에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어리석음의 특징은 마음이 어두운 상태이다. 혹은 지혜가 없음이다.

혹은 대상의 본성을 덮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바른 수행의 결여로 나타난다. 혹은 어두움으로 나타난다.

지혜가 없고 숙고함이 없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모든 선하지 못함의 뿌리라고 알아야한다.’

이상이 어리석음에 대한 주석의 설명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어리석음은 어리석음을 먹고 커집니다.

어리석음은 어리석음을 좋아합니다.

탐욕은 탐욕을 먹고 큽니다. 성냄은 성냄을 먹고 큽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이 자가발전(自家發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가 어리석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 충고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지 않기 위해서는 단 하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합니다.

그리고 좋은 도반을 사귀십시오.

그것이 조금씩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

 

다음에는 두 번째로 ‘양심 없음’입니다.

양심이 없는 것은 악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선하지 못한 일을 혐오하지 않고 즐깁니다.

 

이에 반해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선하지 못한 일을 부끄러워합니다.

이것이 양심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양심 없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양심이 없는 자라고 한다.

양심이 없는 자의 상태를 양심 없음이라고 한다.

양심 없음은 몸으로 짓는 그릇된 행위들에 대하여 혐오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혹은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습니다. 어리석으면 양심이 없고,

양심이 없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세 번째, ‘수치심이 없음’입니다.

수치심이 없음은 선하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하지 못한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불선한 일을 싫어하지 않고 좋아합니다.

 

양심이 없고 수치심이 없다는 것은

선하지 못한 것을 혐오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불선한 행동을 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행위를 합니다.

 

주석서에서는 수치심이 없는 것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수치심 없음이라고 한다.

수치심 없음은 그릇된 행위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혹은 두려워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양심이 없는 것은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고

수치심이 없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다는 것은 매우 무지하고 용맹합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리석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리석음과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셔야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네 번째, ‘들뜸’입니다.

‘들뜸’은 고요하지 못하고 산만한 것입니다.

바람에 출렁거리는 물결처럼,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동요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대상에 고요하게 마음을 머물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끊임없이 표류합니다.

 

들뜸은 존재를 색계와 무색계에 붙들어 매는 족쇄입니다.

이것을 ‘오상분결’이라고 하는데

색계에 대한 욕망, 무색계에 대한 욕망, 아만, 들뜸, 어리석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상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라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이 되기 전 까지는 이상의 번뇌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들뜸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들떠서 산만한 상태를 알아차려서 약화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언젠가 아라한이 되어 들뜸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늘 들떠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러니 들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지금 들떠있네.’라고

들떠있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다시 한 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들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들뜸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제 단지 들뜸을 알아차리기만 하십시오.

 

주석서에서는 들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들뜬 상태가 들뜸이다.

이것의 특징은 바람에 출렁거리는 물처럼 고요하지 않음이다.

마치 바람에 부딪혀 흔들리는 깃발처럼 동요하는 역할을 한다.

마치 돌에 맞아 흩어지는 재처럼 산란한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마음의 동요에 대해 지혜가 없어 숙고하지 못하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마음의 산만함이라고 알아야한다.’

 

이상 네 가지가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중에 항상 함께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불선심이 있는 상태에서는 항상 어리석음,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이 함께 합니다.

그래서 이 힘은 강력합니다.

서로 연합해서 있기 때문에 잠재적 성향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하지 못한 사람은 더욱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지만,

실제로 그 마음의 상태는 고요하지 못하고 항상 들떠있습니다.

그리고 산만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야합니다.

 

어리석음 하나가 양심 없음과 수치심 없음과 들뜸이라는 세 가지를 함께 해서

네 가지가 작용할 때 이 힘은 거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리석음의 세계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수행을 해야 되는 가장 필요한 이유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은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10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들은 다양하게 결합하는 마음으로, 때때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이 10가지는 각각 모여 있으면서 이것이 나타날 조건이 성숙될 때마다 나타납니다.

 

탐욕에 관한 것은 탐욕, 사견, 자만으로 이 세 가지는 함께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탐욕, 사견, 자만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이것들만 모여서 이러한 조건이 성숙될 때만이 이 세 가지가 함께 일어납니다.

 

다섯 번째, 탐욕입니다.

탐욕은 어리석음과 성냄과 함께 불선심의 대표적인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 세 가지를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탐욕은 열의와 다릅니다.

탐욕은 대상을 원할 때 끈적끈적한 점액이 묻어 있고,

열의는 대상을 원할 때 끈적끈적한 점액이 없습니다.

탐욕은 집착하여 달라붙는 성품이 있고,

열의는 대상을 원하는 정도만 있는 성품을 가졌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열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탐욕 때문에 탐하고, 혹은 탐욕 스스로가 탐하고,

혹은 단지 탐하는 것이기 때문에 탐욕이라고 한다.

탐욕은 마치 끈끈이처럼 대상을 거머쥐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달구어진 냄비에 놓인 고깃덩어리처럼 달라붙는 역할을 한다.

 

마치 염색하는 안료처럼, 버리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족쇄에 묶이게 될 대상들에 대해서 달콤한 것을 본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탐욕이 갈애의 강물로 늘어나면서 마치 강물의 거센 물살이 큰 바다로 인도하듯이,

중생을 잡아서 악처로 인도하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상이 주석서의 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12연기에서 윤회가 계속되는 것이 갈애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갈애가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바라는 마음이 더 집착으로 발전하면 그것이 단순히 바라는 마음에서 욕망으로 변합니다.

 

현상계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물론 이 탐욕은 어리석음이 조정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은 어리석음과 탐욕이라고 아셔야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괴로울 때는 그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인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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