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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71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0:1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을 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먼저 선한 마음이 있어야하고 다음에 선한 과보심이 따라야합니다.

선한 마음이 있지만 선하지 못한 과보심이 있으면 수행을 방해합니다.

 

선한 과보심은 지금 이전에 행한 바라밀 공덕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선한 과보심은 아무런 바람이 없이 행해져야 합니다.

바람이 있는 공덕은 완전한 공덕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라밀 공덕이 부족하여 수행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행을 계속해야합니다.

수행을 하는 것이 새로운 바라밀 공덕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을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해태에 관한 것은 해태와 혼침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일어납니다.

그러나 해태와 혼침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조건이 성숙될 때만 일어납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중에서

12번 해태와 13번 혼침, 두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해태는 마음이 무기력하고 건강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혼침은 마음의 작용들인 수상행이 각각의 기능을 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을 합니다.

해태가 마음을 억누르고 활기차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처럼,

혼침도 마음의 작용이 결합하여 활기차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나 해태와 혼침의 두 가지 방해는 그 대상이 서로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해태와 혼침은 같은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해태와 혼침은 법념처의 다섯 가지 장애 중에 세 번째에 속합니다.

 

장애는 수행을 시작하면 나타나는 손님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없애야할 대상이 아니고, 단지 나타난 손님이므로 알아차려야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장애가 없이는 수행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시작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법념처에서 가장 먼저 다섯 가지 장애를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해태와 혼침이 장애인 이유는 이것이 바로 알아차림을 덮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것들이 알아차림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스스로 힘을 내기가 어려워서

때로는 다른 방편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해태와 혼침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바른 방법입니다.

 

해태와 혼침은 스스로를 자양분으로 삼아서 더 커집니다.

수행을 하면 나른하고 권태롭고 하품과 식곤증 까라짐 졸음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때 이런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것들 스스로가 일어난 것을 영양으로 삼아서 더 커집니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이것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커지는 것입니다.

이때 적절한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이런 현상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면 벗어나려고 할수록 이것들은 더 깊어집니다.

 

모든 일들이 다 이렇습니다.

알아차리는 힘은 약하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것들의 힘은 강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습관을 만든다는 것은 항상 각별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해태와 혼침을 극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차림을 강화해야합니다.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싸우거나 대상에 빠져서는 안 되고

나타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합니다.

 

나타난 대상을 없애려고 하거나 다른 것을 찾으면 있는 장애가 더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나타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알아차리는 것들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와서 보라고 나타난 대상을 와서 보지 않고

그것들을 없애려 하거나 그것에 빠져버립니다.

 

부처님께서 졸음이 올 때 방법에 관하여 목갈라나 존자에게 하신 법문이 있습니다.

 

“목갈라나여, 졸리는가? 목갈라나여, 지금 졸고 있는가?

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오! 목갈라나여, 어떤 생각을 하다가 혼침이 그대를 덮치면

그 생각에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그 생각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한다.

그러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해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대가 배운 법을 마음속으로 떠올려 생각하고 되새겨야 한다.

그러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다.

 

그렇게 해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대가 이미 듣고 배운 법을 모두 세세하게 암송해야 한다.

그러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다.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귓불을 잡아당기고 손바닥으로 팔다리를 문질러라.

그러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다.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물로 눈을 씻고는 사방을 둘러보고 하늘의 별을 쳐다본다.

그러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다.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빛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낮에 그렇게 했듯이 밤에도,

밤에 그렇게 했듯이 낮에도, 같은 방법으로

맑고 트인 마음으로 밝음에 가득 찬 의식을 계발한다.

그러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다.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감각을 안으로 돌이켜 마음이 밖으로 향하지 않도록 한 채,

앞과 뒤를 똑바로 알아차리면서 왔다 갔다 걷는다.

그러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다.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곧 일어나겠다는 생각을 간직한 채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을 하면서 두발을 포개어 오른쪽이 바닥에 가도록 조심스럽게 눕는다. 

이렇게 자다가 다시 깨어나는 대로, 내가 눕거나 기대는 즐거움이나,

잠자는 즐거움에 빠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빨리 자리에서 일어난다. 

목갈라나여, 이렇게 스스로 단련하라.”

 

이상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혼침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졸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것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누구도 수행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해태와 혼침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통속에 물이 있어 이끼와 풀로 덮여있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거기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혀 짓눌려있을 때

그는 이미 일어난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행복도 남의 행복도

그리고 자신과 남의 행복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할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마음에 새겨둔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새기지 않은 것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이 가르침도 사실은 우리가 알아차려야 할 것은 자신의 정신과 물질이며

그것이 어떤 상황에 있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석서에서는 해태와 혼침을 이렇게 정의 했습니다.

“나태함이 해태이고, 무기력함이 혼침이다.

분발심이 없어 무기력하고, 활기가 없어 피로하다는 뜻이다.

해태와 혼침이 하나로 되어있으나 두 가지로 분리되어야 한다.

 

그 중에 해태는 분발함이 없는 특징이 있다.

마음의 문을 덮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처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혼침은 일에 적합하지 못한 특징이 있다.

마음의 문을 덮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게으름으로 나타난다. 혹은 졸음과 수면으로 나타난다.

권태, 하품 등에 대해 마음을 숙고하는 지혜가 없는 것이 이 두 가지의 가까운 원인이다.”

이상이 해태와 혼침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의심이 있습니다.

의심은 1가지입니다.

이 의심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조건이 성숙될 때만 일어납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중에서 마지막으로 14번째 의심입니다.

 

의심은 회의적 의심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가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승 삼보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입니다.

의심은 또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계율, 전생, 내생, 전생과 내생, 연기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이처럼 의심은 마음을 이리저리로 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태를 뜻합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의 법념처의 다섯 가지 장애인 마지막이 바로 회의적 의심입니다.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나면 다음 단계로 현상을 아는 지혜가 계발됩니다.

그래서 의심이 제거되지 않으면 도과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의심이 의심을 키우는 자양분입니다. 그래서 의심이 의심을 먹고 자랍니다.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지혜가 없기 때문이며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심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의심을 생기도록 조장하며,

이미 생겨난 의심을 더 키워서 계속 의심합니다.

 

의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바른 답을 말해주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 의심을 하기 때문입니다.

의심을 하는 사람은 의심을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답을 얻으려하지 않고 계속 의심을 키웁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우리가 유념해야겠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의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한 통의 흙탕물을 휘저어 어두운 곳에 두었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거기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이 의심에 쌓여 짓눌려있을 때

그는 이미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행복도 남의 행복도,

그리고 자신과 남의 행복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미 오래전에 마음에 새겨둔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새기지 않은 것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렇습니다. 계속 주석서에서는 이렇게 의심을 정의했습니다.

“치료하려는 바람이 없는 것이 의심이다.

이것은 회의하는 특징이 있다.

흔들리는 역할을 한다.

결정하지 못함으로 나타난다. 혹은 불분명하게 파악함으로서 나타난다.

지혜가 없어 마음을 숙고하지 못함이 가까운 원인이다.

수행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의심은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상,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은 모두 14가지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불선행입니다.

그중에 어리석음,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은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날 때마다 항상 있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리고 탐욕과 함께 있는 마음의 작용 3가지,

성냄과 함께 있는 마음의 작용 4가지,

해태와 함께 있는 마음의 작용 2가지, 그리고 의심 1가지는

각각 일어날 만한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만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이 무리지어서 서로 일어나고 서로 결합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 선하지 못한 마음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 한 가지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으로 인해서

다른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을 끌어들여서 함께 힘을 키웁니다.

그러면 더욱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쪽으로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알아차려서

단 하나의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