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진리는 지혜가 있는 자의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법은 원하는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리 고귀한 법이라도 그것이 괴로움입니다.
원하지 않는데 정법을 주려고 하다가 오히려 서로가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주는 자의 입장에서는 받지 않는다고 미워하고,
받는 자는 원하지 않는데도 강요한다고 화를 냅니다.
그러면 서로가 정법을 훼손한 과보가 따릅니다.
그래서 법은 원하지 않는 자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법이 있어도 그것은 아는 자의 것입니다.
이처럼 상호의 조건이 성숙되어야 비로소 법입니다. 바로 이것이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법문을 들을 때 청법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까지,
마음의 작용의 첫 번째 그룹인 기본적인 마음의 작용 13가지와
두 번째 그룹인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14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세 번째 그룹인 깨끗한 마음의 작용 25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깨끗한 마음의 작용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작용이라서
깨끗한 마음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선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선행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마음의 작용은 모두 25가지이지만
그 중의 19가지는 선한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19가지가 연관되어 함께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이들 19가지의 마음의 작용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물론 선한 마음의 작용이 얼마나 계발되었는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선할 때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의 19가지 외에 절제와 함께 있는 마음의 작용 3가지와
무량과 함께 있는 마음의 작용 2가지와
미혹 없음의 마음의 작용 1가지가 있습니다.
이들 마음의 작용은 조건이 성숙되면
다시 작은 그룹끼리 모여서 함께 결합하여 일어납니다.
그러면 깨끗한 마음의 작용 25가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깨끗한 마음의 작용은 선행을 의미합니다.
믿음, 알아차림, 양심, 수치심,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중립,
감관의 평온, 마음의 평온, 감관의 경쾌함, 마음의 경쾌함,
감관의 부드러움, 마음의 부드러움, 감관의 적합함, 마음의 적합함,
감관의 능숙함, 마음의 능숙함, 감관의 바름, 마음의 바름,
정어, 정업, 정명, 연민, 기쁨, 지혜의 능력입니다.
이상이 깨끗한 마음의 작용 25가지였습니다.
깨끗한 마음의 작용 중에서 선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날 때마다
19가지가 연관되어 함께 일어나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선행 하나가 일어나면 19가지가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1번 ‘믿음’입니다.
믿음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가라는 삼보에 대한 믿음입니다.
불교의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고,
알아차림을 가지고 대상을 탐구해보고 난 뒤에 얻는 확신에 찬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믿음을 신뢰할 만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맹목적 믿음은 사교(邪敎)의 위험이 있지만
대상을 탐구해보고 나서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면 맹신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지혜를 계발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에 나타난 대상은 항상 와서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와서 보라고 나타난 대상을 개입하지 않고 탐구해보면 가르침에 대한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확신에 찬 믿음을 갖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믿음이 진실한 것이며 이런 진실한 믿음을 바탕으로 해야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력이 생깁니다.
수행을 할 때 먼저 오근(五根)을 바르게 수행을 하면
오력(五力)이 생겨서 수행이 발전하게 됩니다.
이때 다섯 가지 근기를 앞에서 이끄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가 뒤따릅니다.
처음에 믿음이 앞에서 이끌면 노력을 하게 되고,
노력을 해야 비로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이 지속되어야 집중이 됩니다.
이러한 집중의 상태에서만 비로소 지혜가 생깁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지혜는 5력이 되어 앞에서 믿음과 함께 수행을 이끌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수행자의 시작입니다.
주석서에서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가 믿고, 혹은 단지 믿기 때문에 믿음이라고 한다.
그것의 특징은 믿는 것이다. 혹은 신뢰하는 것이다.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마치 물을 정화하는 보석처럼.
혹은 믿음으로써 대상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치 홍수를 건너는 것처럼.
더럽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혹은 결심으로 나타난다.
믿을만한 대상이 가까운 원인이다.
혹은 정법을 듣는 등, 수다원의 조건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재산과 씨앗처럼 보아야 한다.’
이상 주석서에서 말한 믿음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주석서의 설명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일관되게 반복됩니다.
그래서 대상의 특징과 역할과 나타남과 가까운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유념하면 이것들을 통하여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주석서의 내용은 하나같이 단순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밝힌 것처럼,
‘단지 믿기 때문에 믿음이라고 부른다. 그것의 특징은 믿는 것이다.’
라는 식의 말이 앞으로도 계속 반복됩니다.
이때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대상을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보는 시각을 키워야 합니다.
이런 표현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대상을 파악하는데 깊은 의도가 있습니다.
수행자는 드러난 대상을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지켜봐야 합니다.
여기에 어떤 선입관이나 다른 의도를 개입시켜서는 안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항상 나타난 대상이 와서 보라고 하므로 그냥 지켜봐야 합니다.
이렇게 개입하지 않고 봐야 비로소 객관적인 시각이 생겨 대상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단순한 구절들은 단순함의 의미를 뛰어 넘어
그냥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지켜보라는 의미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단순하게 보아야지 복잡하게 보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또한 원인을 알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원인은 알아차린 결과로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원인을 알려고 하면 그 순간 알아차림을 놓치고 사유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2번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을 빨리어로 사띠(sati)라고 합니다. 한문으로는 염(念)이라고 합니다.
이때의 염은 생각할 염(念)입니다.
그러나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일으켜 대상에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알아차림은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의 작용인 행(行)에 속합니다.
이때 행이란 마음을 대상에 보내는 것이고 이것을 다시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대상에 보내는 것은 오온의 행에 속하고,
가서 아는 것은 오온의 식(識)이 압니다.
알아차림이란 기억과 알아차림의 두 가지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에서 말하는 기억에 대한 오해가 있으면 안 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이미 지나간 것을 떠올리는 그런 기억을 말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에서 말하는 기억은
목전에 나타난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여기로 와서 있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기억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현전하는 기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때의 기억은 과거를 회상하는 그런 기억이 아니고
부처님과 법에 대한 선업과 관련된 것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현재 가지고 있는 알아차릴 대상을 사라지지 않도록 돌보고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알아차리는 것을 기억하여 알아차리고
알아차릴 때는 알아차리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기억과 알아차림이 하나가 되어야 올바른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번뇌를 막아서 보호하기 때문에 계율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면 계청정이 이루어집니다.
위빠사나라고 할 때 ‘위(vi)’는 다르다, 분리하다. 라는 뜻으로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관적 관점이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분리하지 않으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사마타 수행과 달리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 다음에 있는 ‘빠사나(passna)’라는 말은 통찰한다는 뜻과
지속적으로 알아차린다는 뜻이 함께 있습니다.
이처럼 위빠사나의 통찰은 그냥 알고 마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아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이때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기 위해서 바로 기억이 필요한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알아차림이란 말의 빨리어 사띠는 이처럼 기억이라는 말과 함께
다른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우리말로 옮기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쉬운 우리말로 알아차림이라고 하지만 이런 다양한 뜻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아시면 되겠습니다.
알아차림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은 많습니다.
수행자마다 학자마다 모두 다르게 쓰고 있으나 내용은 같습니다.
알아차림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은 주시, 보다, 이해하다, 지켜본다, 관찰 등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말이나 모두 깨어서 본다는 것과 동일한 뜻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팔만 사천 법문을 알아차림 하나라고 말합니다.
팔만 사천 법문을 줄이면 37조도품이고,
다시 37조도품을 줄이면 팔정도고,
팔정도를 줄이면 계정혜 삼학이고,
계정혜를 줄이면 바로 알아차림 하나입니다.
이처럼 수행자는 항상 알아차림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주석서에서는 알아차림을 이렇게 말합니다.
‘알아차림은 마음이 들뜸으로 치우치는
믿음, 정진, 통찰지로 인해 들뜸에 빠지는 것을 보호하고,
게으름으로 치우치는 집중으로 인해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보호한다.
그러므로 이 알아차림은 모든 요리에 맛을 내는 소금과 향료처럼,
모든 정치적인 업무에서 일을 처리하는 대신처럼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습니다.
‘알아차림은 모든 곳에서 유익하다. 무슨 이유인가?
마음은 알아차림에 의지하고, 알아차림은 보호로써 나타난다.
알아차림이 없이는 마음의 분발과 절제함이 없다.’
팔정도에서 바른 알아차림이 한문으로는 정념(正念)입니다.
이때의 정념을 빨리어로 ‘삼마사띠’라고 합니다.
접두사 ‘삼마’는 한문으로 바를 정(正)자를 쓰는데
빨리어의 뜻은 적절하게, 정확하게, 철저하게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삼마’의 뜻은 ‘알아차림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팔정도의 ‘정(正)’은 모두 ‘알아차림이 있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견해는 알아차림이 있는 견해,
바른 사유는 알아차림이 있는 사유,
그리고 정어(正語)는 알아차리면서 하는 말,
정업(正業)은 알아차리면서 하는 행위
정명(正命)은 알아차림이 있는 직업을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팔정도의 바를 정(正)자가 모두 알아차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불교의 모든 법문을 하나로 종합한다면
그것이 알아차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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