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던 마음은 사라지고 새로 알아차리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 이미 사라지고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때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에 무상이라는 법이 나타난 것입니다.
있던 마음이 사라진 것이 무상이고,
사라진 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위빠사나 도(道)입니다.
법은 와서 보라고 나타납니다.
그러나 지혜가 부족하면 보라고 나타난 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탐욕과 성냄으로 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주석서에 정의한 알아차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알아차림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기억하고, 혹은 이것 스스로 기억하고,
혹은 단지 기억하기 때문에 알아차림이라고 한다.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잊지 않는 것을 역할로 한다.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혹은 대상과 직면하므로 나타난다.
강한 인식이 가까운 원인이다.
혹은 몸 등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확립함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기둥처럼 대상에 튼튼하게 서 있기 때문에,
혹은 문을 지키는 문지기이기 때문에, 문지기처럼 봐야 한다.’
이상이 청정도론에 있는 알아차림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다음은 3번 양심과, 4번 수치심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양심은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수치심은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의 작용은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에서
양심 없음과 수치심 없음의 반대가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양심 없음이 아니고 양심이 있음을 말하며,
수치심이 없음이 아니고 수치심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사람은 양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워 할 줄 모르면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수치심이 있는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선하지 못하면 수치심이 없어 아무렇게나 살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고 살지 못합니다.
두려움이란 악업에 대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악업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악행을 서슴없이 할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양심과 수치심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몸으로 짓는 그릇된 행위 등에 부끄러워한다고 해서 양심이라고 한다.
이것은 부끄러움의 동의어이다.
오직 그것에 대해 두려워한다고 해서 수치심이라고 한다.
이것은 악행에 대한 불안의 동의어이다.
그중에서 양심은 악행에 진저리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수치심은 두려워함이 특징이다.
양심은 부끄러움 때문에 악행을 짓지 않는 역할을 하고
수치심은 두려움 때문에 악행을 짓지 않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이미 말한 방법대로 악행을 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까운 원인은 각각 자기를 중요하게 여김과 타인을 중요하게 여김이다.
자신을 중요하게 여겨 양심상 악행을 버린다. 마치 좋은 가문의 규수처럼.
타인을 중요하게 여겨 수치심으로 악행을 버린다. 마치 궁녀처럼.
이 두 가지 법은 세상의 보호자라고 알아야한다.’
이렇게 주석서에서는 양심과 수치심을 정의했습니다.
다음은 5번, 탐욕 없음입니다.
탐욕 없음은 관용이 있는 것입니다.
탐욕이 없는 것은 원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탐욕이 갈애로부터 시작하여 집착으로 발전하면
업을 생성해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듭니다.
그러나 탐욕이 없음은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느낌이 일어날 때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갈애를 일으키지 않으면 탐욕이 없는 것으로 윤회가 끊어집니다.
아라한이나 부처님은 탐욕이 끊어져서 받을 것이 없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탐욕은 느낌을 원인으로 일어납니다.
만약 느낌에서 탐욕이 일어나지 않으면 느낌이 소멸하여 열반을 성취합니다.
탐욕이 없는 것은 선하지 못한 것에 달라붙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수행자라면 선한 것을 계속 바라야합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면, 선하고 선하지 않음이 없이
온전하게 탐욕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때가 완전한 탐욕이 없음입니다.
원하는 것이 없으면 관용이 생겨 모든 사람에게 자애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래서 탐욕 없음은 단지 탐욕이 없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보시를 하고 자애를 일으키고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의 작용들은 서로 협력하여 더 좋은 쪽으로 가속도가 붙습니다.
탐욕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유신견이 사라집니다.
사실 모든 탐욕의 원인은 유신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나라고 하는 자아가 있는 한, 자아를 강화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욕망을 불태워야합니다.
그러나 탐욕이 사라졌다면, 나라고 하는 자아가 소멸한 무아의 정신적 상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다고 해서 탐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것은 원해야합니다.
아직 아라한이 되지 않았다면 아라한이 되려는 선한 의도는 가져야 합니다.
또, 게을러서 원하지 않는 것도 탐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선한 것을 원하지 않을 뿐이지
오히려 선하지 못한 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탐욕이 없음은 세속의 대상인, 오욕락인 재산욕, 성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을 원하지 않음이며 이것을 집착하지 않음입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에 있는 탐욕에 대한 반대가 탐욕 없음입니다.
선한 마음을 분류할 때 기본적으로 관용과 자애와 지혜로 나눕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관용의 반대가 탐욕이며 자애의 반대가 성냄이며 지혜의 반대가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탐욕 없음은 선한 마음의 작용으로 관용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이때의 관용은 반드시 보시를 수반합니다.
그래서 관용이 있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보시를 하는 마음이 함께 일어납니다.
무엇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온전하게 베풀고,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탐욕 없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것 때문에 탐하지 않고, 혹은 이것 스스로 탐하지 않고,
혹은 단지 탐하지 않기 때문에 탐욕 없음이라고 한다.
성냄 없음과 어리석음 없음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
그 중에서 탐욕 없음은, 대상에 대해 마음으로 욕심 없음이 그 특징이다.
혹은 집착하지 않음이 그 특징이다.
마치 연잎의 물방울처럼 움켜쥐지 않음이 그 역할이다.
마치 해탈한 비구처럼 집착하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마치 오물통에 빠진 사람처럼.’
이상이 탐욕 없음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다음은 6번, 성냄 없음입니다.
성냄 없음은 자애가 있는 것입니다.
성냄 없음은 거칠고 잔인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성냄 없음은 파괴하지 않지만,
성냄은 파괴하는 것으로 이것들은 서로 반대가 됩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에 있는 성냄에 대한 반대가 성냄 없음입니다.
성냄 없음은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인 자비희사의
첫 번째인 자애의 마음으로, 자애를 가진 마음입니다.
성냄 없음을 뜻하는 자애는 자신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는 진실한 마음가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외아들을 보호하듯이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는 자애심을 닦아야 한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통하여 소멸되지 않는다.
오로지 자애로운 마음을 통하여 그것들이 사라진다.’
그렇습니다.
자애는 고통을 주는 육체적인 사랑도, 이성간의 사랑도 아니며
단순한 이웃 간의 사랑도 아닙니다.
이 사랑은 어떤 것들도 차별하지 않는 그런 숭고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애는, 동물을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포용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이 다툼의 요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 간이나 국가 간이나 불목을 거듭합니다.
이것들이 모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냄이 없는 자애는 이런 편견을 갖지 않는 사랑입니다.
성내는 곳에는 탐욕과 어리석음과 유신견이 있지만
자애가 있는 곳에는 관용과 보시와 지혜가 있습니다.
성냄이 있는 곳에는 알아차림이 없지만,
자애가 있는 곳에는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자애는 단지 선한 마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순간에 선하지 못한 성냄이 나타날 수 없어
두 가지 이익이 함께 있습니다.
자애는 그냥 오지 않습니다.
수행자의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관용과 함께 자애가 오며,
이러한 지혜로 인해 지혜가 계발되어 궁극의 행복을 얻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자애로 인해서 얻는 기쁨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애심을 닦는 사람은 행복하게 잠을 잡니다.
미움에서 벗어나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자연히 한 번에 깊은 잠에 빠져 숙면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자애심을 갖는 사람에게 분명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자애가 없으면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화를 내면 자신에게도 화를 내는 것이므로
근심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지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자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하루 중에 있었던 번뇌가 그 순간에 사라지고
그 마음으로 인해 숙면을 취할 수 있습니다.
둘째, 자애로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면 아침에 일어날 때 자애로운 마음으로 일어납니다.
잠자기 전에 마음에 저장된 종자가 다음 마음에 전해지기 때문에,
저녁에 먹은 마음이 아침에 일어난 마음까지 상속됩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윤회는 한 일생의 윤회가 있고 순간순간의 윤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자리에서 알아차리면서 잠이 들면 편히 잠들 수 있어서 이익이 있고
아침에 그 마음이 상속되기 때문에 아침에도 이익을 얻습니다.
그래서 자애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도 미소 지으면서 잠이 들고,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미소 지으면서 일어납니다.
셋째, 자애로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면
잠을 자면서도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편안하게 잠을 잡니다.
깨어있는 동안 자애가 충만하면, 잠을 잘 때에도 마찬가지로 평화롭습니다.
그래서 깊은 잠을 잘 수 있으며 즐겁고 행복한 꿈을 꿉니다.
넷째, 자애로운 사람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에 똑같이 다른 사람들도 그를 사랑합니다.
이것은 미소 짓는 얼굴로 거울을 보면 미소 짓는 얼굴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찡그린 얼굴로 거울을 보면 찡그린 얼굴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내 마음의 거울입니다.
성낸 얼굴을 하면 다른 사람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볼 것입니다.
과연 누가 성낸 얼굴을 좋아 하겠습니까?
모두 자애로운 얼굴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면 그 자애로운 마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자애로운 마음으로 나를 대할 것입니다.
이것을 ‘업자성정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은 지은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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