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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73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0:1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과거의 무명과 갈애로 인해 현재의 몸과 마음이 생겼습니다.

과거의 원인이 현재에 상속되어 다시 현재에도 무명과 갈애를 가지고 삽니다.

이로 인해 다시 미래에도 무명과 갈애를 가진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무명을 가지고 죽으면 다시 무명을 가진 생명으로 태어나서 갈애를 일으킵니다.

이처럼 모든 일의 근본 원인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시작과 중간과 끝이 모두 무명과 갈애입니다.

매순간 그리고 일생을 통하여 무명과 갈애가 상속되어 윤회를 합니다.

 

사는 것의 근본원인이 무명과 갈애인 것을 알아

다른 원인을 찾지 말아야합니다.

 

무명과 갈애를 없애는 방법은

단지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명이 눈을 가렸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모르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찾으려하지 않습니다.

무명으로 인하여 감각적 쾌락을 향유한 만큼 고통의 나락은 더 깊습니다.

그래서 무명을 알아차리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알아차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거나 알아차리면서 하면

먼저 계율을 지키고, 계율을 지키므로 청정해져서 고요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고요함의 상태에서 지혜가 납니다.

이것이 팔정도의 계정혜입니다.

 

알아차려야 모든 일에 적절할 수 있으며,

알아차려야 정확하게 겨냥하며,

알아차려야 대상을 분명하게 철저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항상 대상과 함께 있어야합니다.

그때의 대상을 법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몸, 느낌 마음 법입니다. 이것이 사념처 수행입니다.

 

그때의 법이란 몸과 마음에 나타난 모든 대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대상이 없으면 알아차리지 않는 것이고, 수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과 알아차림과 아는 마음 이 세 가지가 있어야 비로소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대념처경이 바로 이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알아차림은 대상이 나타나면 나타난 즉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현장성과 즉시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상과 일치성이 있어야합니다.

 

현장성과 즉시성이란 일어난 곳에서 일어난 즉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고 대상이 나타나는데 조금 있다가 알아차리면 결코 안 됩니다.

그것은 이미 과거로 흘러 간 것이라서 생각하는 것이지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뒤따라가면서 알아차린다면 그 사이에 빠르게 번뇌가 침투할 것입니다.

일어난 곳에서 일어난 순간에 일어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뜨거운 것으로서 이런 뜨거움 속에서 지혜가 납니다.

그것만이 실재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일치해야한다는 것은 만약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대상도 호흡이어야 하고, 알아차림도 호흡을 겨냥해야하고,

아는 마음도 오직 호흡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때 마음이 호흡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서도 안 되며

알아차림도 오직 그 대상을 겨냥해야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그 대상 하나에 초점을 맞추어야합니다.

 

이렇게 하나의 대상을 붙잡고 있다가 다른 대상으로 옮겨갔을 때도

역시 마음을 모아서 그 대상을 정성스럽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면서 저것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일치성이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알아차리면 이러한 이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마음이 청정해지고,

둘째는 슬픔을 극복하고,

셋째는 비탄을 극복하고,

넷째는 육체적인 고통이 소멸되고,

다섯째는 정신적이 고통이 소멸되고,

여섯째는 올바른 길인 팔정도에 도달하고,

일곱째는 열반을 성취하여 지고의 행복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것 말고 더 다른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렴풋이 알았지만 이제 확실하게 알아야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인지 알았어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서 지금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행자 여러분은 모두 이 길로 오셔야만 합니다.

 

누가 아무리 퍼가도 없어지지 않는 진리의 옹달샘에 오셔서 청정한 물을 드셔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명입니다.

다음에는 언제 이 법을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법을 만난 소중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대상과 아는 마음 사이에

어떤 번뇌도 침투하지 못해 청정하다고 합니다.

청정하다는 것은 6가지 감각기관이 6가지 감각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때문에 청정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알아차리면 번뇌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물위에 떠있는 공과 같아야 합니다.

물 위에 떠있는 공은 물에 빠지지 않고, 그렇다고 물위로 튀어 오르지도 않고,

항상 물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릴 때는 물 위에 떠있는 공처럼 알아차려야 합니다.

 

6가지 감각기관과 6가지 감각대상이 부딪칠 때

반드시 아는 마음과 함께 느낌이 함께 일어납니다.

이때 아는 마음은 그냥 대상을 받아들여서 문제가 없지만

이때의 느낌이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바로 대상을 본 뒤에 이 느낌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갈애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정관념을 갖거나 어떤 것을 상상을 하거나, 다른 의도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옵니다.

 

그러므로 이때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으면 번뇌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지 않고 그냥 맨느낌의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이때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감각기관을 육문, 육입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문지기가 있으면 번뇌라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만약 알아차림이 없으면 번뇌라는 이름의 도둑이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면서 삽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도둑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는 것도 모르고 도둑에게 복종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자에게는 알아차림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무엇이 좋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아는 것을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것을 어떻게 실천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팔정도의 바른 길을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어느 상황에서나 있는 대상을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것 외에 특별하게 다른 것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은 인간이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제 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알아차리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사명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현재도 행복하고 미래도 행복을 보장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으로 태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만약에 이 거대한 땅이 큰 바다라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어떤 사람이 이 바다에 구멍 하나가 뚫린 통나무를 던졌다고 가정해보자.

바람이 동쪽에서 불면 이 통나무는 서쪽으로 떠내려갈 것이고,

서쪽에서 바람이 불면 이 통나무는 동쪽으로 떠내려갈 것이다.

북쪽에서 바람이 불면 남쪽으로 떠내려갈 것이고,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이 통나무는 북쪽으로 떠내려갈 것이다.

 

이때 일백년에 한번 물 위로 불쑥 떠오르는 눈먼 거북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자, 비구들이여, 한번 생각해 보아라.

이 눈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 번씩 물위로 고개를 불쑥 내밀 때마다

통나무 구멍을 통해 목을 내밀 수 있겠는가?”

 

제자들이 대답하였습니다.

“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 눈먼 거북이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을 받아서 태어나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여래, 아라한, 완전하게 깨달은 자가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도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여래에 의해 선언된 법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고,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였고,

여래에 의해서 선언된 법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

 

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너희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심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사성제를 알아차리면서 살아가야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알아차림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매우 중요한 빨리어가 있습니다.

 

이것을 아빠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게으르지 않음, 주의 깊음, 열심히, 진지하게, 잊지 않고,

끈질기게 잡고 있음, 가볍게 넘기지 않음, 주저함이 없이 알아차린다는 다양한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이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빠마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빨리어 경전에 아빠마다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무려 1,970번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실제로는 얼마나 더 많이 말씀하셨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유언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은 빨리어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와야담마 상카라 아빠마데나 삼빠데타”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뒤에 반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긴 이 말씀은

“모든 것은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열심히 노력하여 완성시켜라.”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변하는 성질을 가진 것은 무상(無常)을 말함입니다.

그러니 무엇도 집착할 것 없이 열심히 알아차려서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열반을 성취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니 알아차림이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사명감을 알아차림 하나로 집약하고,

알아차림을 놓치지 말아야하겠습니다.

 

그래야 잊지 않음이란 아빠마다의 법을 붙잡는 것이 됩니다.

잊지 않음을 붙잡고 있으면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 있어서 고요함이 생기고 지혜가 납니다.

지혜가 나면 모든 것을 관용으로 받아들입니다.

잊지 않고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이 이미 계율을 지켜 청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 하나만 있으면 팔만 사천 법문을 관통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할 때,

만약 여러분들이 자비라고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사마타 수행밖에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위빠사나 수행자는 주저 없이 알아차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바른 수행을 몰랐기 때문에 알아차림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자비는 물론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비에서의 알아차림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선정의 고요함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또 자비가 있는 곳에서는 윤회가 거듭됩니다.

물론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선과보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비가 아닌 통찰지혜를 일으키는 알아차림을 한다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불타서 궁극의 열반을 성취하여

지고의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