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모든 현상은 일어나서 사라집니다.
일어나서 사라진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나서 사라진다는 것이 무상이고
일어나서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의 도(道)입니다.
그러므로 현상은 일어나서 사라지고,
수행자는 일어나서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릴 때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무상과 도’ 라고 합니다.
무상과 도, 무상과 도를 연속적으로 알아차리는 도의 길을 가면
최종적으로 열반이라고 하는 과에 이르게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곱째, 과거 생과 미래 생을 모르는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어디서 온 것을 안다면 당연히
미래에도 내가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원인이 와서 현재의 생을 만들었다면
똑같이 현재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를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덟째, 12연기의 바른 성품인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까지의 지혜가 나면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윤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연기법은 인류 역사에 가장 빛나는 진리입니다.
역대의 모든 부처님들은 반드시 연기법을 통하여 오온을 찾아내시고
그리고 오온의 느낌을 알아차리신 뒤에 위빠사나 수행의 찰나삼매를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셨습니다.
연기법은 부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고
부처 이전부터 있던 것을 부처님께서 찾아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연기로부터 탈출하시어 윤회를 끝내셨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도 연기의 수레바퀴가 회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연기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연기의 수레바퀴가 도는 원인이 무명과 갈애이므로,
어리석어서 바라기 때문에 연기가 도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12연기의 첫 번째가 무명으로 시작된다는 것과,
윤회는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2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첫째, “그 이전에 무명이 없었고, 그 이후에 무명이 생겼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무명의 원인이 무명임을 밝히셨습니다.
둘째, “그 이전에 존재에 대한 갈애가 없었지만,
그 이후에 존재에 대한 갈애가 생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번뇌가 생겼기 때문에 무명과 갈애가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12연기의 근본원인이 무명과 갈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무명으로 부터 벗어나면 갈애까지 소멸하여 열반을 성취합니다.
그리고 윤회가 끝나는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이렇게 윤회의 근본원인인 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 방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 하나면 되지만
무명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무엇을 어떻게 알아차려야 하는지
반드시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대상을 알아차려서 통찰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첫째, 오온의 색, 수, 상, 행, 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둘째, 6입과 6경이 부딪치는 12처(處)를 알아야 합니다.
셋째, 6입과 6경과 6식이 부딪치는 것만이 실재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넷째, 오근인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를 알맞게 계발해야 함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섯째, 사성제인 고, 집, 멸, 도를 통찰해야 합니다.
이상의 것들을 수행하는 것이 무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여기서 첫째, 둘째, 셋째까지는 몸과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와 다섯째는 몸과 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리느냐 하는
위빠사나 수행방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무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해야 하며,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가 있어야만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무명은 맹목적인 것입니다.
무명은 모른다는 것으로 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것으로는 실재하는 진실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맹목적이면 대상의 고유한 성품을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에
올바른 행위와 반대되는 행위를 합니다.
그러므로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하는 원인이 됩니다.
맹목적으로 믿으면 맹신에 빠져 사교를 믿습니다.
어리석은 것도 고통인데 사교(邪敎)에 빠지면 더 큰 괴로움을 겪습니다.
사교의 경우는 자신의 가려움을 해결해 주어서 일시적으로 만족할 수 있겠지만
우매한 신앙으로 인해서 더 큰 어리석음에 빠져 불행을 겪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믿음을 갖되 확신에 찬 믿음을 갖고 맹목적 믿음을 갖지 말 것을 항상 권하셨습니다.
그래서 맹목적 믿음을 갖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탐구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하면 관념으로 아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탐구한 뒤에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질 것을 권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말한 가르침도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오직 수행자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 직접 실천해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믿음을 가질 것을 권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남의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남의 말은 단지 그의 말일 뿐입니다.
설령 그것이 진실일지라도 자신이 직접 체험을 해야만 비로소 자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무명의 계층은 다양합니다.
지혜가 많고 적고 하는 차이에 따라서 무명의 정도도 다양합니다.
관념이 아닌 실재하는 법을 알고,
신구의(身口意)삼업(三業)을 알고,
무상, 고, 무아의 삼법(三法)을 알고,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알고,
사성제를 아는 것이 무명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으로 아는 것과 수행을 통해서 지혜로 아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수행을 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가 나야 비로소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잠부카다까가 사리뿟다 존자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사리뿟다 존자시여, 무명, 무명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무명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러자 사리뿟다 존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잠부카다까시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집착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소멸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도(道)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명을 제거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잠부카다까시여, 고귀한 팔정도가 무명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라고
사리뿟다 존자께서 대답을 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무명은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명은 모르는 것인데 이 말은 지식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고,
지혜가 부족한 것을 의미합니다.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은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관념을 대상으로 하면 실재하는 성품을 볼 수 없어 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지혜는 실재하는 성품에서만 드러납니다.
대상의 실재를 알아차려야 대상의 고유한 성품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에
지혜로 무명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무명이란 여덟 가지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여덟 가지를 알기위해서는 반드시 몸과 마음이란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위빠사나 수행방법으로 알아차려야만 실재를 알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실재는 오직 느낌으로 나타납니다.
지금 몸과 마음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관념인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인 느낌이 실재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부르기 위한 명칭이라서
관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 느낌이라서 이것을 실재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관념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실재하는 느낌을 알아차려야
비로소 대상이 가지고 있는 법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념의 영역과 실재의 영역을 분명하게 알아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관념의 영역에서는 실재를 모르지만 실재의 영역에서는 관념을 바탕으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보기 때문에 두 가지를 다 수용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철저하게 관념의 세계였기 때문에 누구도 진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살께서 실재를 처음으로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그 길을 저희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부처가 되기 전 보살이셨을 때 6년 동안 고행을 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에 직면하셨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고행을 했기 때문에 인간의 체력이 한계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왜 죽는가를 숙고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죽음의 원인이 드러났습니다.
바로 태어났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겠지만
얼마나 진실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렸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때도 적당히 생각으로 알아차렸으면 관념으로 죽음을 생각한 것이지만
보살은 죽음의 실재하는 진실을 아신 것입니다.
이렇게 진실한 앎을 바탕으로 다시 왜 태어났는가를 숙고하신 결과,
업을 생성했기 때문에 그 과보로 태어난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왜 업을 생성했는가를 숙고하시니 집착을 원인으로 업을 생성한 사실을 아셨습니다.
다시 왜 집착을 했는가를 숙고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갈애가 왜 일어났는가를 숙고해보시니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난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느낌은 왜 일어났는가를 숙고하시니 접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접촉은 왜 일어났는가를 숙고하시니 육입을 원인으로 접촉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육입이 왜 일어났는가를 숙고하시니 정신과 물질을 원인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정신과 물질이 왜 일어났는가를 숙고하시니 식을 원인으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때의 식(識)이 새로운 생을 만드는 재생연결식입니다.
이 재생연결식이 왜 일어났는가를 숙고하시니
과거의 행을 원인으로 현재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왜 행이 일어났는가를 숙고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다시 왜 무명이 일어났는가를 숙고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더 이상 원인이 없고 무명을 원인으로 무명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무명 이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갈 것이 없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결국 모든 것의 근본원인은 과거의 무명과 현재의 갈애가 연기를 회전시키는 것을 아셨습니다.
지금까지 보살이 숙고하신 것이 바로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아는
12연기의 역관(逆觀)입니다.
연기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근본원인을 찾아내신 것입니다.
보살께서는 다시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고
행을 원인으로 식이 일어나는 것을 숙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어남을 원인으로 늙어서 죽는 결과를 아셨습니다.
이것이 순서대로 내려가면서 알아차리는 순관(順觀)입니다.
이렇게 역관과 순관으로 거듭 숙고하신 결과 모든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원인에 의해서 생겼으므로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아셨습니다.
그래서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가 소멸한다는 수행의 지혜가 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사에 가장 빛나는 지혜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에는 단지 원인과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바로 이 원인과 결과의 지혜가 나야 모든 의문이 풀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모든 의문을 푸신 뒤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하는 수행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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