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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33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2:37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도모하면서 삽니다.

그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항상 일을 꾸밉니다.

그래서 나쁜 일을 할 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절대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습관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는 방법은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채워야 비로소 수습이 됩니다.

탐욕을 부리는 일 대신에 수행을 하는 일로 채울 때만이 잘못이 개선될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지 말고

수행을 해서 지혜가 생기도록 해야 합니다.

갈애를 일으키면 다시 태어나서 오온이란 연료를 만듭니다.

오온이란 연료를 만들면 다시 불을 붙이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갈애라는 불을 붙여 계속 고통뿐인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연기를 통하여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모든 과정이

원인과 결과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과거, 현재, 현재와 미래의 원인이 되는 현재, 미래,

이렇게 시간상의 문제도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12연기가 모두 한 생명의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도 드러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은 한 인간의 정신과 물질이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도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릴 대상이 식, 정신과 물질, 육입, 접촉, 느낌이라는

12연기의 오온이 드러난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만 있다면 여기 한 생명의 태어남과 죽음에

초월적인 존재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생명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서 행한 원인과 결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절대적 힘을 가진 존재가

한 생명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가 없다는 엄연한 진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결과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12연기가 회전하는데 원인과 결과만 있지

자아가 있어서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내가 있어서 연기를 회전시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연기가 회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어서 연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프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지 않을 수 없고, 아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가 없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구체적인 실체가 드러난 것이 현재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입니다.

 

보살께서는 다시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에 부딪칠 때마다

아는 마음과 함께 느낌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느낌으로 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느낌의 발견은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관문입니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의 느낌이 드러남으로 인해서

전혀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수행방법이 드러난 것입니다.

 

보살께서는 느낌을 알아차리시니

느낌은 매순간 변하는 것이라서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아시고

비로소 무상의 지혜가 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인류는 수많은 수행방법으로 구도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렇게 원인과 결과라는 지혜를 가지고

정신과 물질을 구체적으로 통찰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정신과 물질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니 느낌이 있었는데

이 느낌은 매순간 변하는 것이라서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간에 없었던 찰나집중이 생겼습니다.

이 찰나집중으로 대상을 지켜보니

비로소 대상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가 드러난 것입니다.

 

무상, 고, 무아를 아시니 모든 것은 변하고. 괴로움뿐이고,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어 비로소 집착을 끊게 되셨습니다.

이 결과가 바로 위대한 깨달음이고 윤회가 끝나는 열반입니다.

 

여기서 느낌을 알아차리니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없어서 찰나집중을 하셨는데

바로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시작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분리해서 통찰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인

느낌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수행방법인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느낌을 대상으로 하니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있었고,

그 특성은 관념이 아닌 실재하는 현상이었기 때문에

법을 아는 통찰지혜가 생겨서 깨달음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념과 실재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통찰지혜를 얻는 지름길입니다.

 

보살이 위빠사나 수행을 찾아내시기 전까지는

누구나 몸과 마음의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고 관념적인 다른 대상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낌이 없어서 대상을 관념적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알아차릴 대상이 느낌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상과 하나가 되는 수행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계가 고요함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 집중에 의한 사마타 수행입니다.

 

보살께서는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무색계 4선정을 모두 끝내시고도

답을 얻지 못해 더 높은 진리를 찾아 6년이나 헤매시면서 고행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조건이 성숙되어 연기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은 상좌불교의 독단적 교리가 아니고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수행입니다.

 

포괄적 의미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팔정도, 중도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대상의 실재를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길이 아니면 진실의 문을 통과할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또 자신뿐만 아니라 역대의 모든 부처와 수많은 아라한과 성자들도

반드시 이 길을 거쳐서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탐욕이나 성냄이나 이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다양한 불선심은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항상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불선심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이 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누구나 내가 어리석다고 말하지만 이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생각으로 말하고 면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념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무명은 의식에 내면에 깊게 자리 잡고 있으며

사실은 모두 이것에 의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무명을 알기란 어렵습니다.

어쩌면 무명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에

무명을 아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나,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이나,

역사나 정치나 경제나 예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무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적인 무지이지 출세간의 무지가 아닙니다.

학문과 상식을 모른다고 해서 무지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식이 없을 뿐입니다.

이것을 모두 관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무지는 이런 것이 아니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진실한 실재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출세간의 무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관념이 아닌 실재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관념과 실재입니다.

관념이 아닌 실재를 알아야 비로소 무명이 사라지기 때문에

이 말이 이토록 거듭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상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관문을 통과해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이 사마타고,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수행이 위빠사나입니다.

 

관념을 대상으로 할 때는 관념적 진리라고하며,

세속적 진리, 또는 속제(俗諦)라고도 합니다.

실재를 대상으로 할 때는 궁극적 진리라고하며,

출세간의 진리, 또는 진제(眞諦)라고도 합니다.

 

세속의 법도 그 자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없애야할 대상이 아니고 엄연히 있는 것이기 때문에

관념적 진리, 또는 세속적 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은 일반적으로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을 한 뒤에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마타 수행을 하지 않고 처음부터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위빠사나 수행으로 시작하는 수행을 순수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이처럼 수행의 과정에서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관념과 실재가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관념에 대한 것입니다.

관념(觀念)을 일반적으로는 생각과 견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관념이 다른 것에서 말하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념과 심리학에서 말하는 관념과 철학에서 말하는 관념의 내용이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념은 빨리어로 빤냐띠(pannatti)라고 합니다.

빤냐띠는 일상적인 관용어로 습관적으로 쓰이는 말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표현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의 생각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추상해서 종합한

하나의 컨셉(cencept)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습적인 것이라고도 하고, 또는 세속적인 것이라고도 합니다.

 

빨리어 빤냐띠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표현되는데,

관념, 표명, 서술, 가설, 명칭, 이름, 개념, 가정, 시설(施設),

모양 등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설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의 방편적 설정을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 예를 들자면 무엇이 어떻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의 예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어떤 상황을 만들어서 가정한 것이라서 관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관념은 고유한 특성이 없습니다.

고유한 특성이 없다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관념이기 때문에

더 이상 분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습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누구를 말할 때

인간, 동물, 사람, 여자, 남자, 나, 너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실재가 아닌 관념입니다.

 

그래서 부르기 위해서 편의상 설정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관념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념이 아닌 실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관념과 실재가 구분됩니다.

 

예를 들어 손이라고 할 때 손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지 실재가 아닙니다.

지금부터 손을 솜이라고 부르자고 합의를 하면 그때부터 손을 솜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때의 손은 관념입니다. 그리고 역시 새로운 솜도 관념입니다.

 

자! 수행자 여러분들께서 지금 두 손의 바닥을 서로 대보십시오.

지금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금 손을 마주 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관념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따뜻함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면 ‘지금 진동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외에 단단함이나 부드러움이나 무거움이나 가벼움이나 차가움을 알고 있다면

이것이 실재를 아는 것입니다.

 

손이라는 명칭은 부르기 위한 관념이므로 사실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나타내려는 방편적 설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명칭이 무엇이 되었거나

손은 따뜻하고 진동하고 부드러운 여러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름에 상관없이 실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별 것이 아닌 것 같아도 몸과 마음이란 대상의 진실을 아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상을 통하여 존재하는 것들이 일반적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서양에서는 존재론을 주장합니다.

손을 하나의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인식론을 말합니다.

손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고 손이라는 것의 실재는

따뜻함이나 부드러움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은 손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양의 존재론과 불교의 인식론의 차이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