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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31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2:3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생각해 보면 살아온 인생이 징그럽고 참혹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도 있었고 즐거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좋았던 것보다 괴로움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보니 온통 맛있는 것을 밝히다 겪는 괴로움이었고

즐거움에 취하여 집착을 한 것에 대한 과보로 겪는 괴로움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범인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도

다시 즐거움을 찾으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바르게 안 것이 아니고 생각으로 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폐해를 통찰하게 되면 즐거움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아서

모든 것을 분수에 맞게 선택합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중도입니다.

그래서 중도만이 우리들의 삶을 가장 윤택하게 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 말씀드릴 것은 셋째,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은 선하지 못한 마음입니다.

어리석음을 마음으로 말할 때는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하며,

마음의 작용으로 말할 때는 어리석은 행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있어서 행위를 하므로 어리석음이라고 할 때는

마음을 말하기도 하고 어리석은 행위를 똑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할 때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고 할 때의 어리석음입니다.

이 말을 한문으로는 탐심(貪心), 진심(嗔心), 치심(癡心)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치심이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어리석음을 마음의 작용인 행(行)으로 보면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때 어리석음은 다른 것과 항상 함께 일어나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불선행이 있을 때는 반드시 4가지가 함께 일어나는데

어리석음과, 양심 없음과, 수치심 없음과, 들뜸입니다.

이상 4가지 마음의 작용은 행을 뜻합니다.

 

앞서 밝힌 탐욕과 성냄은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이 있을 때

항상 일어나지 않고 때때로 다양하게 결합하여 나타나지만

이때의 어리석음은 불선행의 중심적 위치라서

불선행이 있을 때는 항상 모든 것들을 주도합니다.

 

12연기에서는 어리석음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의 근본원인이 무명입니다.

이때의 무명은 연기의 시작이지 모든 것의 시원(始原)은 아닙니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시작이 있다고 하는 것은 창조주의 개념으로 본 것입니다.

 

무명으로 시작하지만 시원은 알 수 없고

오직 원인과 결과만 되풀이 된다고 보는 것이 불교적 관점입니다.

바로 그 시원이 무명인 것입니다.

 

연기적 관점에서 보면 시원은 알 수가 없고 연기의 시작이 오직 무명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언제부터라고 하는 시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원인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무엇이 바로 무명입니다.

그래서 무명 이전으로 더 거슬러 갈 수가 없고,

오직 무명으로 인해서 연기가 회전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인지를 알아야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응방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리석음은 모든 것의 근본원인이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다양하게 불리기도 합니다.

 

어리석음이란 말이 한문으로는 치심(癡心)이라고 하여 이것을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음을 빨리어로는 모하(moha)라고 합니다.

이 외에도 무명(無明)이라고 할 때는 헛된 것에 사로잡혀 진리에 어두움을 말합니다.

그리고 무지(無知)라고 할 때는 사물의 이치를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미혹(迷惑)이라고 할 때는 마음이 흐려서 무엇에 홀린 것을 말합니다.

 

어리석음이라고 할 때는 사물에 어둡고 지능이나 사고력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망상(妄想)이라고 할 때는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할 때입니다.

현혹(眩惑)이라고 할 때는 정신이 홀림에 빠져 미혹해진 것입니다.

맹목적이라고 할 때는 사리에 어두워 눈이 먼 상태입니다.

들뜸은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이며,

의심은 믿지 못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게으름, 덤덤한 느낌, 어리둥절함, 혼란함, 멍청함 등등이 모두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이상이 모두 어리석음의 또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에 반대가 되는 것은 이해, 지혜, 아는 마음, 앎입니다.

어리석음은 모르기 때문에 번뇌에 당하지만

지혜는 알기 때문에 번뇌에 당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알기 때문에 오히려 번뇌를 끊는 효과가 있습니다.

무명은 윤회를 거듭하게 하지만 지혜는 더 이상 바라는 마음이 없어

윤회가 끝나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자유를 얻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자유를 훨씬 벗어난 출세간의 자유입니다.

이제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는 아라한이나 부처님의 자유를 다만 상상으로 헤아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실제로 경험하지 못해서 그 자유를 모두 알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헤아려서 알 수 있다면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 중도의 마음으로 고요함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에서 열반에 들며 이것이 지고의 행복입니다.

 

어리석음은 모르기 때문에 암흑과 같은 상태입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에 사물을 바르게 볼 수가 없어

좋은 것을 좋지 않은 것으로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으로 봅니다.

 

어리석음은 대상을 통찰하지 않기 때문에 대상의 성품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대상의 성품을 덮어 버려서 그 뜻이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수행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수행을 하겠다는 의지가 생겼다면 그는 어리석음으로부터 지혜의 세계로,

어두움으로부터 밝음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도를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선정의 고요함이 목표지만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를 얻어야 비로소 완전한 지혜를 얻습니다.

바로 이 길이 부처님께서 가신 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모르기 때문에 무명입니다.

무명의 원인은 무명입니다.

그래서 무명 이전으로 거슬러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명은 12연기의 시작인데

부처님께서는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무명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으면 무명이 아닌 지혜가 일어납니다.

 

무명은 다음 8가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명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 8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성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둘째,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성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셋째,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멸성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넷째, 괴로움이 소멸하는 팔정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성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다섯째, 출생 이전의 과거 생을 모르는 것입니다.

여섯째, 죽음 이후의 미래 생을 모르는 것입니다.

일곱째, 과거 생과 미래 생을 모두 모르는 것입니다.

여덟째, 12연기의 바른 성품인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상 8가지는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밝히신 지혜입니다.

이것을 아는 지혜가 나야 비로소 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고집멸도 사성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사성제는 깨달음을 얻은 성자가 되어야 알 수 있는 4가지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그러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 세상이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밝히셨습니다.

이때의 괴로움은 불만족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얻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래부터 불만족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나서 원래 불만족스럽게 살 수밖에 없는 생태적 현실을 알면

그 순간부터 불만족은 사라집니다.

아무리 해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순간부터 괴로움이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은 단지 알아차릴 대상일 뿐입니다.

 

둘째, 괴로움의 원인을 아는 것이 바로 집성제입니다.

괴로움은 정신과 물질로부터 시작하여 느낌이 일어나면 반드시 갈애가 일어납니다.

이 갈애가 다시 집착을 하게 되어 업을 생성해서 고통스런 태어남을 맞이합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안다는 것은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몰라서 못하지만 알았다면 이제 괴로움의 원인을 알아차려서

그것을 해결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셋째, 괴로움의 소멸을 아는 것이 멸성제입니다.

괴로움이 갈애와 집착이라는 사실을 알아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면

괴로움이 소멸하는 열반을 성취합니다.

이 길은 부처님께서 직접 가신길이며 누구나 자신이 체험한 이 길로 오라고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설법을 하셨습니다.

 

넷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실천하는 것이 도성제입니다.

도성제는 피안으로 가는 뗏목입니다.

이 도성제를 팔정도, 계정혜, 중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말로는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실천적 수행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무명에서 벗어나 해탈의 자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성제 중에서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이라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연기의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기 전에는 누구나 이 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출현하시어 괴로움이 소멸하는 열반과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는 길인 팔정도를 제시하여 비로소 4가지 진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벗어나는 길까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이 있다는 염세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출구까지 마련되었으므로

누구나 이 길을 통해서 해탈의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섯째, 출생 이전의 과거 생을 모른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견과 단견으로 벗어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항상 하다는 뜻의 상견은 마음이 몸만 바꾸어서 영원히 태어난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리고 이 생으로 끝이라고 하는 단견도 잘못된 견해입니다.

 

바른 견해는 과거에 어디서 무엇으로 살다가 이 생으로 온 것이 아니고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생명이란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어느 전생에서 현생의 무엇으로 태어났다고 하면 이것은 자아가 상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가 없기 때문에 과거에 어디서 온 것이 아니고,

단지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여기에 나라고 하는 자아가 옮겨 오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과거 생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라서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만 알 수 있는 지혜입니다.

 

여섯째, 죽음 이후에 미래 생을 모르는 것입니다.

과거의 원인이 현재로 왔듯이 다시 현재의 원인이 미래로 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현생을 살면서 죽을 때는 마음도 끝나고, 몸도 끝나고, 호흡도 끝납니다.

그러면 금생은 끝이 납니다.

그러나 금생을 살면서 바라는 마음으로 업을 생성했기 때문에

이 업의 과보가 다음 생에 태어나는 조건을 만듭니다.

 

이때 내가 다음 생에 어디로 가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현재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로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아가 없고 오직 원인과 결과만 있습니다.

이것을 과보의 굴레가 회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전생의 내가 금생의 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라고 할 수도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생의 내가 미래 생의 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라고 할 수도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고 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원인과 결과라는 과보가 상속되었기 때문에

전혀 전생과 금생이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린 답은 내가 오고 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원인과 결과가 상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명한 사실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