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9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23:50

 

 

  

 

안녕하세요? 묘원입니다.


오늘은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 4장 69쪽을 공부하겠습니다.


교재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으뜸이 되는 가르침에 대해서 잠시 공부해 보겠습니다.


으뜸이 되는 가르침을 종교(宗敎)라고 말합니다.

마루 종(宗)자 가르칠 교(敎)자 해서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깨달은 자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종교가 사실은

부처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절대자의 가르침은 일방적이지만,

깨달은 자의 가르침은 일방적이지 않고 선택적입니다.

깨달은 자의 가르침은 보편적인 가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도 비밀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소상히 다 밝혀져 있습니다.


깨달은 자의 가르침은 ‘와서 보라!’라고 말한 것들입니다.

이것을 ‘에히 빠시꼬’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에히 빠시꼬’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는’ 이것이 바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탐구하라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상을 알아차린 결과로 비로소 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라! 하는 것이

으뜸 되는 가르침의 요지입니다.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지 말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원인과 결과로 통찰해서 지켜보고,

그것에 대한 신뢰가 확립되면, 그때 믿음을 가져라.

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대상을 탐구하지 않으면 맹목적인 신앙에 빠져서

의존적인 사람이 될뿐더러 우매해집니다.


우리가 가슴에 박힌 화살을 뽑는 일에 특정한 종교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종교적 명분으로 화살을 뽑는 것을 거부한다면

이것은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히 적용되는 그 가르침을 우리들의 대상으로 삼아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연기입니다.


오늘 제4장의 본문은

‘어떻게 연기의 고리가 느낌으로부터 회전하기 시작하는가?’에 대한 공부입니다.

도표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도표를 펼쳐보시기 바랍니다.


12연기 도표는 부분 1과 부분 2, 부분 3, 부분 4로 나뉘어져있습니다.


부분 2에는 < 식․ 명색․ 육입․ 촉․ 수>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사실은 연기적 오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오온을 < 색수상행식 >이라고 말하는데,

12연기에서는 정신과 물질이 원인과 결과로 지속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식, 명색, 육입, 촉, 수 > 다섯 가지를 오온으로 표현합니다.


자, 거기서 보면 감각기관과 감각대상 그리고 의식이 만날 때마다 접촉이 일어나고

이 접촉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덤덤한 느낌을 일으킵니다.


여기서 우리가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만족하여 그것을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이 행복이 더 많기를 바라고 더 오래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느낌에서 갈애가 일어나고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집착이 괴로움을 가져옵니다.


즐거움은 느낌이며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 느낌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며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이지 나의 느낌이 아닙니다.


또 괴로운 느낌, 이것은 불만족입니다.

왜 괴로움이 일어났는가?

좋아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 성취되지 않아서 괴로운 것입니다.

실제로 괴로움의 범인은 즐거운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애가 연기의 시작이라고,

연기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이런 접촉이 일어날 때 덤덤한 느낌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때 덤덤한 느낌은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을 말합니다.


빨리어로는 ‘우뻭카 웨다나’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평등의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우뻭카라는 것은 매우 좋은 뜻입니다.

평등이라는 것이 균형이 잡혔다는 의미에서 중도적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우뻭카 웨다나’ 덤덤한 느낌은

‘무관심’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유일하게 느낌에서만 평등이 무관심이라는 뜻으로,

무지의 느낌으로 표현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무척 아름다운 꽃을 봅니다.

그 꽃이 마음에 들 경우에 즐거운 느낌을 갖습니다.

그 꽃을 갖고 싶은 욕망인 갈애가 일어날 경우에 필연적으로 집착이 따라옵니다.

바로 이 순간 연기의 고리가 회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연기의 회전은 결국 꽃을 꺾게 되는 업을 생성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진행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일어납니다.

느낌이 갈애를 일으켜 행위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기는 그 시점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집착을 한 다음에 업의 생성이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생이 따라옵니다.


여러분들, 도표의 부분 3과 부분 4에 보면 업의 생성과 생 사이에 화살표가 있습니다.

이것을 연결고리라고 합니다.


업의 생성은 업의 생성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행위를 한 그 힘이 반드시 태어남이라는, 어떤 사건을 만드는 결과로 연결됩니다.

행위는 결코 행위로 그치지 않습니다. 


행위는 반드시 행위를 한 결과인 과보가 일어나서

그 과보가 미래의 태어남, 미래의 사건을 만듭니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갈애가 일어나서 집착해서 업을 생성하는 것은,

업의 생성으로 그치지 않고 미래의 어떤 태어남, 어떤 사건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이 연결은 12연기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행위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연기의 회전은 느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12연기의 시작이 무명이지만, 무명은 과거의 출발이고,

현재의 연기는 느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느낌에 이어 갈애가 일어나면 도(道)와 과(果)에 이르는 열반을 결코 실현할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느낌에 이어 화냄, 성냄, 근심이 따라오면,

도과에 이르는 열반을 실현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느낌과 갈애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지금 이 순간 느낌에서 갈애로 가지 않으면

연기가 회전하지 않고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이 순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처님의 깨달음이라는 것을 사실 그대로 보면,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그 자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네란자라 강가에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지만

실제로는 깨달음을 얻은 그 자리는, 그 황금의자는,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은 바로 이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그 갈애가 업을 생성해서 미래의 태어남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연기의 과정이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오온이 끊임없이 윤회하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무더기는 고작해야 40~6,70킬로 정도 나가는

몸무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오온(五蘊)인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더기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오온이라고 말 할 때 다섯 가지 무더기를 말합니다.

온(蘊)은 무더기 온(蘊)자입니다.


무더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봅시다. 어떤 대상이 감각기관에 들어올 때 의식의 무더기, 즉 식온(識蘊)이 일어납니다.

마음은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들이 복잡하게 일어나는 것들이 다 무더기입니다.


접촉이 있을 때마다 느낌의 무더기인 수온(受蘊)이 일어납니다.

느낌은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 형태의 수많은 느낌들이 복합되어 있습니다.

매순간 느낌이 다릅니다. 그래서 느낌의 무더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접촉이 있을 때도 지각의 무더기인 상온(想蘊)이 일어납니다.

이 상온은 기억, 표상, 인식, 지각, 이런 것들을 말합니다.

이 지각이, 고정관념이, 인식이, 하나가 아닙니다.

무수한 인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온을 무더기라고 말합니다.


의도적 행위의 무더기는 행온(行蘊)으로 불립니다.

이 행온은 경전에서 50가지로 나눕니다.

이 행온은 ‘마음의 형성력’이라고 해서 마음에 준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물질의 무더기인 색온(色蘊)이 있습니다.

이 물질의 무더기도 32가지로 구성되어있으며,

실재하는 느낌은 지수화풍 4대의 무더기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처럼 위에서 말씀드린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은

어느 것이나 무더기로 모여서 무더기로 일어나며 이 과정이 연기입니다.


사실상 오온과 관련된 연기는 빨리어 삼장이나 암송문에 거론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오온 안에서 분명하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연기가 지속되는 것은 오온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거기에는 근심과 고통의 덩어리가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단지 정신과 물질은 오온이라고 더 자세하게 밝힌 이유는

치유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정신과 물질을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실재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시고,

이것은 나의 몸과 마음이 아니고,

이것은 단지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이라고 밝히시기 위해서

오온으로 분석하신 것입니다.


실제 정신과 물질에 수상행이라는 마음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은

부처가 아니고서는 밝힐 수 없는 매우 위대한 지혜라고

나가세나 존자께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나 정신과 물질이 있는지는 압니다.

그러나 그 정신이 아는 마음인 식과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이 있어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의 지혜로 수상행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색수상행식 이 단지 색수상행식이 아니고,

무더기로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더기가 주는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일예를 들면 자동차는 부르기 위한 명칭입니다.

자동차에 실재하는 것은 3만 가지의 부속들이 결합되어서 자동차로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타이어가 자동차가 아닙니다. 핸들이 자동차가 아닙니다.

엔진이 자동차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모아서 자동차라고 할 뿐이지,

거기에 차는 없습니다. 다만 부르기 위한 명칭일 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께서 오온의 무더기들을 설명하신 것은

마치 자동차의 부속들처럼 그것들이 모여서,

결합되어서 정신과 물질이 있는 것이지

원래 나라고 하는 것이 거기에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분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 치유에 목적을 두고

이렇게 오온을 낱낱이 분석하신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의 인연품에서 말씀하시기를,

“연기의 길을 따라가는 자는 그릇된 삶을 사는 자로 불린다.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자는 올바른 삶을 사는 자로 불린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인과 결과로 사는 사람들은 끝없는 윤회를 거듭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가지 않아야 됩니다.


그 길을 가지 않는 방법이 부처님께서

‘바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느낄 뿐이지, 그 느낌을 좋은 느낌으로 발전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단지 필요해서 먹어야지

그것을 바라고 욕망으로 먹거나 집착해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상을 볼 때도 단지 있어서 봐야지

그것을 나의 것으로 가지려고 하는 집착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필요한 만큼 알맞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갈애라는 것은 하나의 욕망을 말합니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균형이 깨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연기의 길을 가는 자는 고통뿐인 윤회를 거듭할 뿐이며,

연기의 길을 벗어나는 자는 고통이 없는 지고의 행복인 열반의 길을 가는 자입니다.


자!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괴로움을 여의고,

자기의식을 고양시켜서 지고의 행복을 얻는 것이

우리들의 궁극의 목표여야 됩니다.


감사합니다.

 

 

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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