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0

通達無我法者 2010. 12. 29. 00:1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어떻게 연기의 고리가 느낌으로부터 회전을 시작하는가’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시겠습니다.


오늘은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71쪽을 공부하시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쌍윳따 니까야의 인연품에서 말하기를

“연기의 길을 따라가는 자는 그릇된 삶을 사는 자로 불린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자는 올바른 삶을 사는 자로 불린다.”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올바른 삶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연기의 길을 따라가지 않고,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삶을 올바른 삶이라고 부릅니다.


이 올바른 삶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는 도범행(道梵行)이라고 하는데,

여덟 가지 바른 길인 8정도, 위빠사나 수행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8정도, 계정혜 3학,  위빠사나” 이 수행을 해야 됩니다.

8정도와 계정혜 3학과 위빠사나는 동일한 언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길에 의한 청정행을 하면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자이며

이런 수행자는 업의 힘으로 오온이 다시 연결되는 것을 끊는 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연기를 중단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업력을 끊으려는 것은 선한 업이나 불선한 업을 모두 끊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이라고 말할 때는 반대급부의 불선이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의 깨달음은 선과 불선을 모두 여윈

단지 작용만하는 마음의 상태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과 불선은 연기의 사슬 안에 있기 때문에

‘선이다, 불선이다’를 뛰어넘는 것이 바른 도제의 길입니다.


여기서 교재에 있는 도표를 참조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도표는 8페이지에 있습니다.

사실 난해한 12연기를 모곡 사야도께서 알기 쉽게 도표를 그려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이 도표는 마얀마에서 공개된 이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하여

12연기를 보다 알기 쉽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도표를 참조하시면 여러분들이 난해한 12연기를 이해하시는데 한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연기의 도표는 위빠사나 수행은 부분 3과 부분 4의 연결을 끊으려는 것이자,

업의 힘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갈애를 없애는 것입니다.


12연기는 크게 네 칸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2번 칸의 오온을 가진 상태에서 3번 칸의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연기를 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느낌이 갈애를 일으키는 것’을

‘느낌이 지혜를 일으키는 것’으로 바꿔 가려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느낌을 느낄 때 반드시 그 느낌을 단지 맨 느낌의 상태에 멈추지 않고,

갈애를 일으켜서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으로 발전시킵니다.

그래서 느낌이 갈애로 넘어갈 때 연기는 회전합니다.


그래서 이 느낌에서 일어나는 갈애를 위빠사나 도(道)로 바꾸어가는 것이

수행자가 해야 될  일입니다. 


위빠사나 도라는 것은 다섯 가지입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정진,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

이상의 다섯 가지 도의 항목을 위빠사나의 도라고 말합니다.


이 다섯 가지 도의 항목은 계정혜에서 정(定)과 혜(慧)에 속합니다.

그런데 8정도를 위빠사나라고 말하는 이유는,

정과 혜밖에 없는데, 계(戒)가 빠졌는데도

8정도가 위빠사나라고 말하는 것은,

정에서 정념이라고 하는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정어, 정업, 정명,

바른 말과 바른 행위, 바른 생계가 확립되기 때문에

다섯 가지 위빠사나 도의 항목을 계(戒)를 포함해서 8정도를 위빠사나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위빠사나의 도를 닦지 않는다면,

바꾸어 말하면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갈애가 따라옵니다.

이 경우에 어떤 것으로도 갈애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산다는 것은 오히려 갈애를 일으키는 것인 줄 알고,

스스로 갈애를 일으키면서 살아왔습니다.

마치 갈애가 없는 것은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했으며,

갈애가 없는 삶은 무슨 재미가 있느냐고 까지 생각해왔습니다.


연기의 길을 가는 자는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에 맞닥뜨리게 될 뿐입니다.

그는 윤회 속의 나그네와 같고,

이 세상에 붓다가 출현한다고 해도 영원히 나그네로서 떠돌 것입니다.


우리가 어리석다는 것은 오히려 괴로움뿐인 갈애를 선택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갈애는 반드시 집착을 하게 되고 업을 생성시켜서 괴로움뿐인 윤회를 거듭하게 합니다.


여러분들! 이제 우리가 어느 길을 선택해야 되겠습니까?

열반인 도과의 길을 선택해서 윤회를 끝내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괴로움뿐인 윤회의 나그네로 영원히 떠도는 것이겠습니까?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도(道)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도(道)라는 것은 사마타 수행의 도가 있고,

위빠사나 수행의 도가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위빠사나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번뇌를 억누르는 단계의 도입니다.

그러나 통찰 지혜로 열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8정도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만, 다섯 가지 도지(道支)인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정진,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을 확립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가 포함된 8정도를 완성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느낌을 통찰해서 그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때,

그런 통찰력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연기가 회전하지 않고 윤회를 벗어나는 길로 들겠습니다.


여기서 하나 지적해 둘 것이 있습니다.

느낌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여기저기로 찾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느낌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느낌은 부딪침이 있을 때마다 일어납니다.


눈이 대상에 부딪쳐서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느낌도 함께 일어납니다.

귀가 소리에 부딪쳤을 때 이식, 소리를 듣는 마음이 일어날 때, 느낌도 함께 일어납니다.

코가 냄새에 맡을 때, 냄새를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느낌도 함께 일어납니다.

혀가 맛에 부딪쳤을 때, 맛을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느낌도 함께 일어납니다.

피부에 어떤 외부의 무엇이 부딪쳤을 때, 그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느낌도 함께 일어납니다.

마음이 생각에 부딪칠 때, 그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느낌도 함께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다는 것은 모두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즐거우나 괴로우나, 기분이 좋거나 나쁘거나, 색다르거나

덤덤하거나 간에 어떠한 종류의 느낌이 항상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느낌은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의 문 중에 항상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의도적으로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 한국명상원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할 때,

제일 처음에 현재의 마음을 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몸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눈꺼풀이 닿아있는 느낌을 느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입술이 닿아있는 느낌, 손이 닿아있는 느낌, 엉덩이가 바닥에 닿아있는 느낌,

이렇게 네 종류의 느낌을 시작하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눈꺼풀이 닿아있는 느낌을 느끼십시오.”

그러면 “느낌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느낌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알고 있는 것을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눈꺼풀이 닿았을 때, 따뜻하다. 떨린다, 무겁다. 가볍다 하는,

닿아있는 그 느낌 자체가 느낌이지, 특별한 것이 느낌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맨 느낌의 상태에서 우리는 눈꺼풀이 떨려서 싫다,

눈꺼풀이 가벼워서 기분이 좋다 하는 육체적 느낌으로 발전하는 것도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느낌은 맨 느낌에서 육체적 느낌으로, 정신적 느낌으로,

이렇게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합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래서 느낌은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렇게 느낌을 알아차렸을 때, 느낌이 무상한 것이며,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통찰지혜를 갖게 됩니다.


수행자가 느낌을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영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의 경계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습니다.

느낌은 항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느낌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낌을 알아차려야 되는 이유는,

이 느낌이 항상하지 않고 매순간 변한다는 사실,

즉 무상(無常)을 알기 때문에 느낌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느낌의 성품을 자세히 보면,

그 느낌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저 스스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통해서,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이라고 알 수 있게 되어,

무아를 철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느낌의 무상함은 위빠사나의 통찰 지혜로 이해할 때만이

비로소 그 느낌의 성품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올바른 길에 접어든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느낌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매우 알아차리기에 좋은 대상입니다.


그렇습니다.

느낌이 소멸되면 갈애도 소멸됩니다.

느낌이 일어나면 갈애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느낌을 알아차려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12연기를 통해서 공부를 해야 됩니다.


이러한 느낌은 화살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느낌으로 압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느끼는 것입니다.


처음에 일어나는 느낌을 맨 느낌이라고 하며,

맨 느낌에서 반응한 느낌을 육체적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적 느낌은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덤덤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육체적 느낌이 다시 반응을 하면 이제 정신적 느낌으로 변화합니다.

정신적 느낌은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

그리고 정신적으로 덤덤한 느낌입니다.


맨 느낌에서 육체적 느낌으로 변화 했을 때

우리는 화살을 한 번 맞은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합니다.

이 육체적 느낌에서 다시 정신적 느낌으로 변화하면

화살을 두 번 맞은 것에 비유합니다.


누구를 볼 때 처음에 맨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보고 ‘좋다!’ 라고 하면 육체적 느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좋아서 죽겠다!’ 라고 하면 느낌을 집착하는 정신적 느낌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신적 느낌이 그냥 정신적 느낌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통스런 느낌이 있을 때, 또 좋은 느낌이 있을 때, 더 좋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사라지기를, 그것들이 간절하기를 더 바랍니다.


그래서 느낌은 반드시 갈애가 일어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욕망의 느낌이 생겨서 세 번째 화살을 맞게 됩니다.

이처럼 정신적 고통과 갈애가 일어난 것을 모르는 것이 무명의 느낌입니다.


우리는 갈애가 괴로움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려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야 되는데,

오히려 갈애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갈애를 일으킵니다.

그러면 네 번째 무명, 무지의 화살을 한 번 더 맞게 됩니다.


이렇게 갈애로 인해서 일어난 느낌은

바로 거듭 네 개의 화살을 맞는 것으로 발전해서

그 상처가 우리들에게 괴로움과 고통을 줍니다.


인간이 파국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배경에는

이런 느낌의 발전단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맨 느낌으로 시작해서, 그 느낌이 더 괴로움으로 증폭되어서,

끝없는 화살을 계속 맞은 뒤에. 비탄에 잠기고 생명을 끊거나,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마지막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느낌이나 수행자는 단지 느낌이라고 알아차리면,

모든 느낌은 단지 대상으로서의 느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느낌은 반드시 느낌으로 알아차리라는 당부를 거듭하셨습니다.


만약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가 일어나서 필연적으로 집착을 하고

괴로움이 따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 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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