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2

通達無我法者 2010. 12. 29. 21:4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12연기는 열두 가지인데

이 열두 가지는 시작부터 끊을 수가 있고,

중간에서 끊을 수가 있고, 끝에서 끊을 수가 있습니다.


끊는다는 것은 알아차려서 지혜가 나가지고

연기의 회전을 멈추는 것을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제 4장에서는

어떻게 연기의 고리가 느낌으로부터 회전을 시작하는가? 라는 것은

연기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자리에서 끊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중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연기가 시작부터 끊어지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면

갈애가 있어야 될 자리에 지혜가 들어섭니다.

그러면 그 지혜가 지금 이후의 새로운 시작을 일으켜서 연기가 회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 5장, 교재 77쪽,

시작으로부터 연기의 회전을 공부하시겠습니다.

연기의 시작은 현재적인 측면에서는

6가지 감각 기관이 감각 대상에 부딪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과거의 무명과 행은 현재로 보면 잠재적 요소입니다.


눈이 대상을 볼 때 알아차림이 있으면 연기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무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알아차릴 때는

현재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연기가 끊어지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로부터 내려온 무명으로 인해서 연기가 새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없는 것을 ‘연기의 새로운 시작의 회전’ 이라고 말합니다.


수행자는 알아차림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이는 있는 대상과 눈이라는 감각기관의 문에서 생기는

일어남과 사라짐을 놓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는데, 보는 것을 단지 의미 없이 그냥 지켜볼 뿐이지,

보이는 것들이 모두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지혜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무심히 본다라고 말할 때

깨어있는 알아차림이 없이 보는 것을 말합니다.


대상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그냥 단지 무심히 보면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법의 성품으로 보질 못해서 갈애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대상을 알아차린다고 말할 때 이것을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수행은 먼저 아는 마음과 그 마음이 보는 대상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것을 깨어서 보는 알아차림이 있는 것을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대상이 있고,

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대상을 겨냥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수행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 시작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한 순간만 알아차리고 끝내면 알아차림이 지속되지 않아서 집중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대상을 겨냥해서 알아차리고 다음에는 반드시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집중이 필요합니다.


위빠사나의 위(vi)는 분리하다, 다르다.

이렇게 다르게 분리해서 보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라는 법을 본다는 의미가 있고,

빠사나(passana)는 통찰한다는 뜻인데

먼저 알아차리고 알아차림을 지속한다는 의미까지를 포함합니다.


대상을 보는데 단지 알아차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까지를 볼 때 우리가 비로소 알아차린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 정, 혜에서 정(定)이라고 말합니다.


위빠사나에서 말하는 ‘정’은 단지 한 순간의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알아차림을 지속할 때 비로소 찰나 집중이 되어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철견하게 됩니다.


보통 우리는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알아차리는 것을 먼저 배웁니다.

이것을 사마타 수행이라고 합니다.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알아차리는 것은 여러 가지 장애가 나타날 때

우선 그것을 누르기 위해서, 그리고 고요함을 얻기 위해서 선택하는 수행 방법입니다.


그래서 얼마 정도 대상을 억눌러서 고요함을 얻었을 때,

이제 사마타 수행에서 위빠사나 수행으로 바꾸셔야 됩니다.

대상을 억눌러서 생긴 고요한 힘으로

이제는 대상을 누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고 지켜봐야 합니다.

이것을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비로소 이렇게 집중력이 생겨서

대상을 분리해서 보았을 때만이 대상의 성품이 보입니다.


바로 그 대상의 성품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으로 무상을 말합니다.


초보자가 처음부터 무상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인내를 가지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지혜가 성숙되어야

비로소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의 법이 보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책을 통해서 수행을 배우는 경우에는

무상의 법을 보지 못합니다.

책은 사유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는 지혜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책은 특별히 완성된 것을 말하지 그 과정이 또 생략되어 있습니다.

실천적 수행은 자기 단계에 맞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수행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셔야 되겠습니다.


이처럼 눈이 대상을 볼 때, 깨어서 보지 못하는 경우에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표피적으로 봅니다.

그리고 고정 관념으로 봅니다.

그리고 감각적 욕망으로 봅니다.

자기 이해에 얽혀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개입하지 않고

위빠사나로 단지 대상을 분리해서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이처럼, 눈이 대상을 볼 때처럼

귀도 소리를 단지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차림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소리를 들을 때, 싫은 소리, 좋은 소리,

그저 그런 소리로 육체적 느낌으로 발전합니다.

그런데 소리를 들을 때

내 마음이 육문, 내 마음을 감각기관에 두고 그냥 소리를 들으면,

그것은 단지 소리일 뿐입니다.


마음이 소리 나는 곳으로 가서

어떤 소리에 빠지게 되면 좋다, 싫다. 하는 소리로

우리가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그 순간 연기가 회전합니다.


마찬가지로 코가 냄새를 맡을 때에도

알아차림이 있으면 그 순간 연기가 회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코가 냄새를 맡을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좋은 냄새, 싫은 냄새로 느낌이 변해서 연기를 회전시킵니다.


이처럼 연기라는 것은 경전에 있는 문자가 아니고,

우리의 정신과 물질, 몸과 마음이 살고 있는 동안 끊임없이 지속되는 그것입니다.


연기는 인간의 정신과 물질이 원인과 결과로 진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모두 연기의 과정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혀가 냄새를 맡을 때에도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단지 그것을 맛으로 보는데

만약 알아차림이 없으면 맛있네, 맛없네. 라고 투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순간 연기가 시작부터 회전합니다.


요즘 날씨가 추울 때, 또는 더울 때 이런 때에는

피부가 추위나 더위에 부딪칩니다.


그래서 단지 그것을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그것은 단지 추위일 뿐이고 더위일 뿐인데

만약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어휴 추워서 죽겠네,” “어휴 더워 죽겠네.” 라고

스스로 괴로움을 만듭니다.


그래서 추위나 더위가 우리들에게 괴로움을 만들 때,

그 순간 연기는 회전합니다.


또 우리들의 의식이 어떤 생각을 할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끊임없는 생각에서 미워하고 좋아하고 괴로움에 빠집니다.

그러면 연기가 회전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망상을 할 때,

“지금 내 마음이 망상을 하고 있네.” 라고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연기가 회전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의 문이 여섯 가지 감각 대상을 받아들일 때

알아차림이 있으면 연기가 회전하지 않고

알아차림이 없으면 연기가 회전해서 갈애와 집착, 업의 생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미래의 결과가 생깁니다.


이처럼 우리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지켜보고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으로 시작한 연기의 고리가 돌기 시작합니다.


무명에 덮여 있는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인 3업을 짓게 됩니다.

여기서 행을 업이라고 하는데

몸으로 짓는 신업과 입으로 짓는 구업, 생각으로 짓는 의업을 말합니다.


여러분!

일반적으로 말할 때 행은 마음에 의해서 일어난

업의 형성력으로 수동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연기에서 말하는 행은 매우 능동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즉, 업을 짓고 그 업을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형성력으로 업이 형성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업을 짓고 그 업을 드러낸다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하거나 선하지 못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의도적 행위를 말합니다.


12연기와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과거의 수동적인 업보다 현재의 능동적인 업을 대상으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행위를 해서 업을 짓고

그 업의 결과를 드러내는 것을 우리가 말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도표를 살펴보겠습니다.


자,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납니다.

행을 원인으로 하여 식이 일어납니다.

식을 원인으로 하여 명색이 일어납니다.

이는 오온이 형성된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온이 있기 때문에 접촉이 일어나기 마련이며,

접촉을 원인으로 하여 느낌이 일어나고

느낌을 원인으로 하여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집착이 일어나고

집착으로부터 업의 생성이 일어나고

업의 생성으로부터 생이 일어납니다.


태어남이라고 하는 생이 일어나면 온갖 종류의 고통이 따라 오고

끝없는 연기의 고리가 다시 돌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명과 무명으로 인해서 행이 일어나고

행으로 인해서 오온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연기의 시작은 모르기 때문에,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지혜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그 무명은 갈애를 일으켜서 연기를 회전시킵니다.


그리고 요약하자면 오온이 있기 때문에 육문이 육경과 접촉하게 되고

바로 느낌이 일어나서 갈애가 생기며 집착과 업이 생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으로 인해 태어나서 죽게 되고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어떤 일에 정신이 팔려 있거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알아차림을 놓칠 경우에는

연기가 무명부터 회전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그릇된 길을 밟는 잘못된 사도(邪道)의 길로서,

8가지의 요소인 식, 명색, 육입, 촉, 수, 갈애, 취,

업의 생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리석음으로부터 현재의 몸과 마음을 이어받았습니다.

무명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반대입니다.


무명이란 8가지를 모르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괴로움이 있는 것을 모르는 것,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을 모르는 것,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인 팔정도를 모르는 것,

출생 이전의 과거 생을 모르는 것,

죽음 이후의 미래 생을 모르는 것,

과거와 미래를 모두 모르는 것,

그리고 12연기의 바른 원인과 결과라는 성품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무명의 특성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릇되게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으며, 항상 이 무명은 번뇌의 소용돌이와 가까이 있습니다.


무명의 계층은 매우 다양합니다.

지혜가 많고 적음에 따라 무명의 정도도 모두 다르게 나타납니다.


과거의 무명이 업을 형성하여 현재를 있게 하고,

현재의 무명이 갈애를 일으켜 미래를 만듭니다.


무명이 있는 한 윤회의 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윤회가 끝나는 열반은 무명이 불타서 소멸한 것입니다.


무명은 연기를 돌리고 모든 번뇌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일으키는 갈애와 집착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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