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3

通達無我法者 2010. 12. 30. 00:3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우리는 지금 연기를 공부하면서

그 연기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자리

중간에서 끊어지는 것을 공부하였으며,

이제는 시작부터 끊어지는 연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연기가 시작부터 보는 연기의 회전,

이것을 공부하겠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모르는 채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모르는 것에는 알아야할 것을 모르는 것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있습니다.


욕망이 자신을 사망케 하는 것을 모르며

지혜가 자신을 살리게 하는 것을 모릅니다.


인색과 후회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모르며

관용과 보시가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을 모릅니다.


모르면 모르는 것을 좋아하게 되고,

알면 아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모르면 불선을 좋아하여 수행을 멀리하고,

자신을 더욱 가혹한 상황으로 내몰아버립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가장 소중한 사명은

바로 무지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지로 인해 잘못된 견해가 생기지만,

여기서 무지와 잘못된 견해는 서로 내용이 다릅니다.


무지는 괴로움이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지만,

잘못된 견해는 자아가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무지는 실재하는 것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지만,

잘못된 견해는 탐심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견해는 변하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알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알고,

무아를 자아로 압니다.


무지는 단지 모르는 것에 그치지만

잘못된 견해는 무지보다 더 깊은 병입니다.


모르는 것은 지혜가 나면 그만이지만

잘못된 견해는 쉽사리 바뀌지 않습니다.


결국 내가 있다는 사견으로 인해 불선심이 일어나고

악행을 해서 사악도에 떨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사실은 무명뿐이 아니고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무명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해서 통찰 지혜로 알아차리면 그 순간 열반에 들 수는 있겠지만,

유신견이나 상견, 단견을 가지고 있는 한은 결코 열반에 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명과 더불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잘못된 견해입니다.


여러분! 화가 날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 항상 탐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탐욕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 무지한 마음이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무지한 것을 알았을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 무지해서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무지보다 더 한 근본 원인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모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무지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내가 몰랐네! 라고 그 사실 자체를 새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길이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로 내가 몰랐네! 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연기는 처음부터 회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지해서 알아차림이 없는 순간에는 연기가 끊임없이 회전하여

우리는 고통의 늪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도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무명 때문에 눈이 먼 사람이고

알아도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무명에서 깨어나는 것도 자신의 역할이며

믿음을 갖는 것도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합니다.


무명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믿음은 경전을 읽고 법문을 들어야 하며,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해야 생기게 됩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이런 법문을 들을 때 나의 견해를 개입시키지 마십시오.

단지 그냥 법문으로 들으십시오.


그 법문을 자신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고정관념, 자신의 유신견은 잠시 접어두시고,

단지 오직 법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단지 그것만 유념하십시오.


절대 비교하거나 법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단지 그냥 법을 법으로 들으십시오.


우리는 법을 들을 때 자신의 견해로 비추어서 듣습니다.

그러면 법의 성품을 모릅니다.


법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합니다.

저희는 무지하기 때문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의 견해로 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법이 의미하는 진정한 뜻을 우리는 영원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린다는 사실은

어떤 선입관 없이 단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어떤 전제도 안 됩니다.


단지 법을 법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법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몸에 통증이 있을 때에도 그 통증은 와서 보라고 드러낸 것입니다.

법은 항상 와서 보아 달라고 그 자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와서 보라는 법을 우리는 보지 않습니다.

자기의 견해로 그것을 없애려 하거나 또 다른 것을 바라면서 법을 봅니다.

그러면 우리는 위대한 진리인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법을 법답게 보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알아차림이 있으면 연기가 시작부터 회전하지 않습니다.

연기가 시작부터 회전하지 않을 때 바로 지혜로 살게 되고,

지혜가 있을 때 선행을 해서 선한 과보를 받습니다.

그 선한 과보의 끝이 바로 열반입니다.


자! 다시 교재 8쪽에 있는 도표를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연기는 부분1과 부분2, 부분3, 부분4로 크게 네 칸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2번 칸이 있는데 이것은 오온을 가진 칸입니다.

이것은 괴로움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3번 칸으로 넘어 가는 순간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을 일으키는 잘못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느낌에서 갈애를 알아차리면

2번 칸에서 3번 칸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고,

또 2번 칸에서 3번 칸으로 넘어가지 않을 때에는

그 갈애가 지혜가 되어서 지금 이 순간 연기가 흐르지 않는

새로운 시작이 오게 됩니다.


여러분들!

잘못된 길을 밟는 사도는 식, 명색, 육입, 촉, 수, 갈애, 취, 업의 생성이라고 합니다.

이들 여덟 가지 요소를 성제로 분류해 보자면 고제와 집제에 해당됩니다.

고는 연료입니다. 집은 불입니다.


오온은 연료입니다.

갈애와 집착, 업의 생성은 불로써 연료와 불이 결합하는 것입니다.

윤회의 모든 과정은 오로지 연료와 불의 결합일 뿐입니다.


불이 그 격렬함을 이룰 때 마다 연료가 다시 공급됩니다.

이것은 한 일생의 태어남이 되기도 하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새로운 윤회를 하는 그것도 갈애라는 연료가 공급되어서

다시 불이 타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나 존재가 윤회하는 현 과정에서

단 한 생에도 그 불을 끄려는 의도나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오온과 갈애가 연료와 불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바라서, 끊임없이 갈애를 일으켜서,

불이 꺼지면 끊임없이 연료를 공급했습니다.


우리는 연료를 공급하는 것이 좋은 것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연료를 공급할까에 대해서 골몰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고, 이것이 괴로움인줄을 우리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괴로움이 있는 오온은 연료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은 불입니다.


몸과 마음이라는 연료가 있는데,

이 연료가, 에너지가 소멸하면

다시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이라는 불을 지펴서

연료에 또 불을 붙게 합니다.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이라는 불이

오온이라는 연료에 불을 붙여서 불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불이 타오르는 것을 우리는 윤회라고 말합니다.


큰 믿음과 다소나마 지혜를 가진 자라면,

마땅히 이번 생에서 연료를 끊어

불을 끄려는 노력을 하려고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합니다.

바라지 않고 어떻게 살아? 무슨 재미로 살아? 그렇게 말합니다.

갈애를 일으키지 않고 어떻게 살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갈애는 욕망입니다. 불입니다. 그 불을 다시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면 그 결과는 괴로움뿐입니다.


저희가 성장을 해서 나이를 먹습니다.

이제 나이를 먹었으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려 하지 말고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감각적 욕망을 키우는 게 아니고,

이제 경륜, 경험으로 그것들이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야합니다.


갈애를 일으키면 다시 태어나서 오온이라는 연료를 만들고,

연료를 만들면 다시 불을 붙이고 싶어 해서 불을 붙이면 계속해서 윤회를 합니다.


이 불은 누가 붙입니다. 이 괴로움은 누가 가져옵니까?

스스로 갈애를 일으켜서 불을 붙여서 자기 몸을 불태워서 괴로움에 처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있으면 무명 대신에 지혜가 생겨서

연기를 시작부터 회전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알아차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에게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성립되어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나의 갈애로 불을 일으킨 것이 바로 원인입니다.

오온은 연료이고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은 불입니다.

다시 말하면 연료와 불이 결합해서 윤회가 계속된다는 사실을 주지하셔야 합니다.


오온이 나,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을 일으켜서

불을 지피게 됩니다.

내 몸,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갈애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내 자식, 내 아내, 내 가족, 내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갈애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나를 실재하는 것으로 알아서

우리는 그 무명 때문에 끊임없이 갈애를 일으켜서 집착을 합니다.

그 집착의 결과가 오온을 지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이라는 불이 꺼지려고 하면

오온이 다시 불을 지피도록 충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몸과 마음, 정신과 물질은 심심하면 무언가 꺼리를 찾습니다.

그렇게 해서 갈애를 스스로 또 일으키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피차 몸과 갈애가 서로 되먹임을 합니다.


몸은 갈애를 일으키게 하고,

갈애는 또 오온을 불태우게 하고 이렇게 서로

원인과 결과로 지속되는 것을 윤회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오온을 만드는 연기의 길을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수행은 연기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행복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태어나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나도 없고 태어나는 나도 없습니다.

죽는 순간에 마지막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면 끝납니다.


그러나 사라진 마음이 강력한 과보의 빛을 일으켜

공기를 타고 다시 태어나는 마음을 만듭니다.

사라진 마음이 다시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단지 과보가 일어난 것이므로

이 때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만 있지 어떤 자아도 없습니다.


윤회를 한다는 것은 정신적, 물질적 현상이

조건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흐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지혜의 눈으로 보면

나의 몸과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을 때

비로소 연기는 중간에서 끊어지고 시작부터 끊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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