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5

通達無我法者 2010. 12. 30. 21:3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미래에나 연기는 회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는 자들은 이 순간 정신과 물질을 다스려서

연기를 회전시키지 않습니다.


연기를 회전하는 것은 모르는 자의 길이고

연기를 회전하지 않는 것은 아는 자의 길입니다.


오늘은 끝에서부터 보는 연기의 회전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재 81쪽을 펴주십시오.


자! 우리가 적이나 싫어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성냄이나 분노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얼굴을 맞대거나 말을 하게 되면 더욱 화가 납니다.

그의 목소리와 모습은 비열하게 느껴지고 참을 수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 이 순간에 이미 연기가 회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이것은 원인으로 인해서 연기가 끝에서 새로 시작된 것입니다.


빨리어 경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냄, 슬픔, 비탄, 근심, 고뇌가 일어난다,

이와 같이 이것이 혼자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된다.”


이 말은 성냄, 슬픔, 비탄, 근심, 고뇌로 인하여

괴로움의 무더기인 오온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고통과 슬픔의 큰 무더기가 일어난다.

왜냐하면 연기가 끝에서부터 회전하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끝에서부터 다시 회전해서 새로운 생을 맡게 됩니다.

그러나 끝에서 알아차리면 더 바랄 것이 없어서 태어남이 끊어집니다.

이것이 연기가 끝에서부터 끊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죽을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끝에서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연기가 끝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연기의 회전이라는 것이

한 일생을 통해서 거듭되기도 하고 또 매순간 거듭되기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연기의 회전이 시작에서 돌기 시작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라는 또 다른, 모른다는 무명으로 인한 것입니다.

연기가 시작부터 돌기 시작하는 것은 어리석기 때문에 무명으로 인한 것입니다.

연기가 중간에서 회전하는 것은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연기가 끝에서 다시 회전하는 것은 업의 생성으로 인해서

태어나서 늙어서 죽을 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기가 중간에서 끊어지는 것도

알아차림에 의해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을 때 끊어지며,

연기가 시작부터 끊어지는 것은 갈애가 일어날 자리에 지혜가 일어나서

알아차림이 있을 때 연기가 시작부터 끊어지며

늙어서 죽을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하지만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연기가 회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연기의 회전이라는 것은 바로 알아차림을 이야기 합니다.

이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깨어서 대상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여기서는 염(念), 또는 각(覺)이라고 말하지만 빨리어로는 사띠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저희 말로는 관찰, 알아차림, 주시, 보다, 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기의 회전은 어느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고 어디서고 알아차리는 순간 연기가 끊어집니다.


여러분들! 연기가 중간에서 끊어지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시작부터 끊어지는 게 좋을까요?

끝나고 나서 끊어지는 게 좋을까요?


결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고 알아차리는 순간 연기는 끊어지기 때문에

어느 때, 어느 시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 얘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수행자들이 하루를 보내면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아! 오늘 알아차림을 놓쳤다.

아! 오늘 하나도 못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는 죽어야 돼!

그래서 나는 바보 같아! 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알아차림이란 원래 새로운 습관입니다.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전에 해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씩 알아차림을 계속하다가 조금 씩 조금 씩 더 많이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가장 큰 알아차림입니다.

그것이 끝에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하기 때문에 끝도 시작도 없습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시작과 중간과 끝을 알아서 언제고 어디서고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래서 하루 중에 자기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후회할 것이 아니고,

그 순간 그 생각을 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생각을 하는 그 순간의 호흡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재로 오면 됩니다.


여러분! 불쾌하고 마음에 안 드는 대상을 볼 때 수행자는

그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서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연기는 끝에서부터 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끝에서 알아차리는 것은 죽을 때 알아차리는 것을 말하지만,

사실은 무슨 일이 진행되고 나서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포함됩니다.

지나고 나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면 무명으로 새로 시작되지만,

지나고 나서라도 새로 알아차리면 무명이 아닌 지혜로 새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끝에서 알아차리면 그 순간 연기는 다시 회전하지 않습니다.

무명인 상태로 죽으면 다시 무명인 상태로 태어나서

다시 갈애를 일으켜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알아차리거나 죽을 때 알아차리면

그 순간 윤회가 끝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됩니다.


빨리, 더 빨리, 더 많이, 알아차린다는 것은 욕망입니다.

언제고 어디서고 자기가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자의 역할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서 왔습니까?

나는 어디서 왔습니까?

나는 조건에 의해서 생긴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왔습니다.


나는 어디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장소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어떤 원인으로부터 왔습니까?

과거에 있었던 무명과 행위로 인해서 현재의 결과가 생겼습니다.


나는 그러면 어디로 갑니까?

그렇습니다.

현재의 원인으로 인해서 미래의 결과로 갑니다.


우리가, 내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단지 원인에 의해서 생기고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장소에서 온 것도 아니고 내가 온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원인과 결과만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현재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현재의 원인은 미래를 만드는 갈애와 집착,

업의 생성으로 인해서 현재의 원인이 생겼습니다.

그럼 현재의 원인으로 인해서 미래의 결과로 갑니다.


여러분! 나는 왜 살고 있습니까?

과거의 무명으로 인해 생긴 현재의 갈애가 이끌기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자기 의지대로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만들어 놓은 무명으로 인한 행으로 의해서

그 과보의 힘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가 과거에 만들어 놓은 많은 선한 행위의 원인과

선하지 못한 원인에 의한 결과가 그 과보를 받아서

과보의 힘으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현재와 미래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선한 마음으로 선한 행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 선한 행위가 알아차림이고

마침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도 ‘지금 알아차리지 못했네!’ 라고 생각하고

다시 알아차리면 그것 자체가 새로운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린 결과로 우리는 중도적 관점을 갖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중도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 아니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직접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을 중도라고 말합니다.

생각은 결코 중도가 아닙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진정한 양심이라고 우리가 말합니다.

중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유로 하는 중도는 위험합니다. 중도가 아닙니다.


직접 몸소 실천을 해서 중립적 지혜를 얻는 것을 우리는 중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수행이 없는 중도는 살아 있는 중도가 아니고 죽은 중도입니다.


중도는,

한 쪽에 편리함이 있으면, 다른 한 쪽에 불편함이 있고

한 쪽에 이익이 있으면, 다른 한 쪽에 불이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게 유익함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그래서 이 중도를 인간의 삶에서 가장 최고의 지혜로 칩니다.


편리하거나, 불편하거나, 이익이 되거나, 되지 않거나,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것을 중도라고 말합니다.


좋은 것만을 선호하면 좋지 않은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좋지 않은 것만을 선호하면 좋아질 기회를 상실합니다.


중도는 감각적 쾌락이 아니고, 극단적 고행도 아닙니다.

치우침이 없는 평등심의 마음이라서 이것은 해탈의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극단적 고행을 마치 수행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수행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성을 나약하게 합니다.


부처님은 극단적 고행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본인이 6년 동안 고행을 한 결과

이것은 사람의 정신을 나약하게 하고 피폐하게 해서

지혜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중도적 관점에서 연기를 발견하셨던 것입니다.


선하다는 명분으로 과정이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 과정이 균형을 이룰 때만이 좋은 결과가 있습니다.


중도라는 것은 계, 정, 혜 삼학을 말하고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을 실천하는 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해서 중도적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행복은 세속의 감각적 행복이 있으며,

사마타 수행의 출세간의 행복이 있고,

위빠사나 수행의 더 높은 출세간의 행복이 있습니다.


세속의 행복은 감각적 욕망을 성취했을 때이고,

출세간의 행복은 번뇌를 억누르는 고요함에서 얻는 것이고,

위빠사나의 더 높은 출세간의 행복은 번뇌를 말린 지혜를 얻을 때 지고의 행복을 얻습니다.


세속의 행복은 얻을수록 갈증을 느끼지만

출세간의 행복은 얻을수록 만족하게 되고

더 높은 위빠사나의 출세간의 행복은 그 만족함에서도 벗어나는 것입니다.


세속의 행복은 과거나 미래 속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출세간과 더 높은 출세간의 행복은 과거나 미래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현재의 대상을 알아차릴 때만이 가능합니다.


세속의 행복에서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없고

출세간의 행복에서는 사마타 수행의 알아차림이 있고

더 높은 행복은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해탈의 행복은 오직 현재에 머물 때만이 있습니다.

여러분! 과거는 지나간 것이라서 현재가 아니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서 현재가 아닙니다.


현재는 지금 이 순간에 있는 실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 현재를 알아차리면 행복을 만들 수 있는 순간이 됩니다.

그리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불행을 만드는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을 만드는 일을 하지 못하거나,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어느 때고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행복은 오직 이 순간에 있는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려서

그것이 무상하고, 그것이 괴로움이며, 거기에 자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갈애가 끝나고,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서, 업이 생성되지 않는, 그것이 행복입니다.


행복은 과거,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현재에 있습니다.

그 현재로 오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내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어떤 번뇌도 침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때고 알아차려서

연기가 끝에서 다시 회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후회할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알아차려서 연기를 끝에서 회전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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