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6

通達無我法者 2010. 12. 30. 22:3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오늘은 교재 제 7장,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을 때 연기의 윤회는 계속된다.’를 공부하시겠습니다.


여러분! 현재 얼마나 괴로우십니까?

때로는 괴로움이랄 것도 없이 그냥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사는 것이 행복인 것 같아도 사실은 괴로움입니다.


여러분! 원래 괴로운 것이니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괴로움을 받아들이면 그 순간 괴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괴롭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이 원인과 결과로 인해서 온 괴로움이라고 알아차리면

그 순간 단지 느낌일 뿐입니다.


사실 괴로움이란 것은 하찮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찮은 것을 크게 생각해서 괴롭지,

사실 그것은 흘러가는 한 순간의 느낌일 뿐입니다.


우리가 큰일은 포기하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괴로움만 있다면 살기가 어렵겠지만 행복도 있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 세계의 육십년은 천상의 90시간입니다.

그래서 육십년이 천상의 3일 18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과연 무엇을 따지고 산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당신이 괴롭다면 그간의 감각적 쾌락을 행복으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렸을 때만이 얻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괴롭다면 그간 잘못한 일에 대한 마땅한 과보를 받은 것일 뿐입니다.

지금은 괴롭지만 괴로움을 알아차리면 괴로움이 소멸되고 그 다음은 괴롭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지금 당신 혼자서 겪는 괴로움이 아닙니다.

윤회하는 세계에서는 누구나 똑같은 괴로움을 똑같이 겪고 있습니다.


그러니 괴로움을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결코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괴로움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 순간 괴로움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과정입니다.

괴로운 것도 과정이고, 괴롭지 않은 것도 과정이고.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알아차릴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있으며

그렇게 노력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때로는 약이 독이 될 수도 있고 독이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약도 잘 써야 약이지 잘못 쓰면 독이 됩니다.

독도 잘 쓰기만 한다면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이익을 주지만,

잘못하면 남과 나에게 불이익을 줄 수도 있습니다.


먼저 자신이 수행자라는 특별한 신분이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수행을 한다라고 그렇게 말하고 다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을 통찰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수행만을 우선으로 하는 수행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수행은 단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지, 수행자 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하는 마음은 있어도 수행자는 없습니다.

수행 중에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만 아는 독을 피우고 있지 않은지

우리는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위빠사나 수행은

먼저 자신의 내면을 통찰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칩니다.

그런 뒤에 밖에 있는 다른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내면만을 알아차렸을 때 오는 잘못을,

이렇게 밖을 알아차리면서 막을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먼저 자신을 알아차려야 되고,

그리고 밖에 있는 대상을 알아차려야 되고,

그리고 이것들의 조화를 이루도록 안과 밖을 함께 알아차려서,

어떤 조건도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이처럼 수행을 할 때만이 연기가 회전하지 않아서 윤회로부터 탈출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연기는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돌고 있습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좋거나 싫은 대상을 대함에 있어

때로는 탐욕으로, 때로는 성냄으로, 때로는 어리석음으로 함께 연기를 돌리고 있습니다.


이 때, 잠자는 시간에는 잠재의식이라고 해서 연기가 회전하지 않습니다.

이 잠재의식을 ‘바왕가찌따’ 라고 하는데 존재의 조건을 형성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여러분! 연기가 이들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함께 회전할 때

불선심이 일어나고, 이를 일러서 공덕이 되지 않는 행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은 탐, 진, 치를 가진 자가 하는 행위를 말하며,

죽으면 그 과보로 사악도인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에 태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공덕을 짓습니다.

공덕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들에게는 도(道)와 덕(德)이 있습니다.

‘도(道)’ 는 깨달음으로 가는 바른 길이고

‘덕(德)’ 은 바른 마음가짐으로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와 덕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도가 없으면 덕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도(道)는 소멸하는 것이고 덕(德)은 쌓는 것입니다.

도(道)는 윤회하는 세계를 벗어나게 하지만,

덕(德)은 윤회하는 세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도를 추구할 때 덕의 힘으로,

덕의 바탕으로 도를 추구할 때만이 올바른 도를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덕이라는 것은 선한 일을 하는 힘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덕이 있는 행이 있고 공덕이 없는 행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행에는 공덕이 되는 행, 공덕이 없는 행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덕이 되지 않는 행을 하는 사람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에 사악도에 떨어집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 아내,

또는 소유물이나 즐거운 일과 함께 할 때, 연기는 탐욕과 함께 회전합니다.

때로는 이와 반대로 사업의 실패나 자녀의 반항을 접하게 되면,

이 때 성냄과 함께 연기가 회전합니다.

무의식적으로나 알지 못한 채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경우에는

어리석음과 함께 연기가 회전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라밀이라는 것을 한 번 공부해 봐야 되겠습니다.

바라밀을 빨리어로 빠라미 라고 말합니다.

이 바라밀은 완성, 완전함, 도피안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는 완전한 것을 말하고 피안의 세계로 건너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것을 뜻하며 수행의 완성을 말합니다.


깨달음은 먼저 바라밀 공덕을 쌓는 결과로 오는 것이며,

이 결과는 열반, 곧 닙빠나로 나타납니다.


바라밀은 보살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는 과정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이 바라밀을 이렇게 말합니다.

바라밀은 연민에 의해서 함양되고, 이성에 의해서 이끌리고,

이기적 동기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릇된 믿음과 자만심에 의해서 타락되지 않는 덕목들이라고 말합니다.


바라밀은 열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보시, 둘째 지계, 셋째 출가, 넷째 지혜, 다섯 번째 정진,

여섯 번째 인내, 일곱 번째 진리, 여덟 번째 발원, 아홉 번째 자애, 열 번째 평등입니다.


이 바라밀이라는 것은 퍼펙트하다, 완전하다 피안으로 건너가는 길을 말하는데,

이것은 보살이 부처가 되기를 서원하고 하는 공덕행을 말합니다.


여러분! 고따마 싯달타 부처님은 무수한 생애 동안에

최고의 바라밀 공덕을 쌓은 그 과보로 부처가 되셨습니다.

고따마 싯달타 부처님은 서른한 개의 존재의 세계에서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단지 색계 사선정의 정거천에만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정거천은 아나가미(아나함)가 가서 거기서 윤회를 끝내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윤회를 끝내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지옥에 가셨습니다.

부처님도 축생이 되었습니다.

서른 한 개의 세계에서 색계 사선정의 정거천만 가지 않으시고

부처님은 계속 윤회를 계속하시면서 최고의 바라밀 공덕을 쌓으셨습니다.

그 공덕의 과보로 부처가 되셨습니다.


이처럼 부처의 길은 멀고 험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부처가 되신 뒤에, 매우 힘든 부처가 될 것이 아니고,

부처와 똑같은 아라한이 되어서 번뇌를 불태우고 윤회를 끝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도 또 다른 의미로는 아라하따(아라한)이라고 부릅니다.

탐, 진, 치, 번뇌가 불타서 윤회가 끝난 것은 부처나 아라한이나 똑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연기를 돌릴 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불선심으로 불선과보를 일으켜서 연기를 회전시킵니다.


선한 행, 공덕을 짓는 행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덕을 짓는 행은 복행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덕행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덕행, 복행은 선한 업을 짓는 것을 말하는 데

욕계 공덕행과 색계 공덕행과 부동행이 있습니다.

욕계 공덕행을 지으면 죽어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욕계 천상에 태어납니다.

색계 공덕행을 지으면 천상의 색계천에 태어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대로 받습니다.


선한 업을 짓는 것을 공덕을 짓는 행이라고 말합니다.

공덕이 되는 행에는 색계 공덕행, 욕계 공덕행, 무색계 공덕행인 부동행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욕계 공덕행을 지으면 죽어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욕계 천상에 태어납니다.

색계 공덕행을 지으면 죽어서 천상의 색계천에 태어납니다.

또 부동행이라고 하는 것은 사마타 수행을 하는 무색계 선정수행의 세계입니다.

이 부동행은 무색계 선정 수행에 태어남을 말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동행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선한 행을 우리가 공덕행이라고 하는데, 

내생에서 보다 나은 곳에 태어나고자 하는 염원으로 공덕을 짓는 행을 했을 경우에

윤회를 계속하게 하는 선한 행이라고 말합니다.


고제의 진리를 알지 못하거나 무언가 보상을 바라고 한 선한 행위를

공덕을 짓는 행이라고 말합니다.


빨리어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혜가 없고 무명이 가득한 이는 공덕을 짓는 행과 공덕이 없는 행을 하고

높은 경지인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고자 부동행을 한다.”

“비구들이여! 무명이 물러가고 지혜가 밝았다.

무명에서 해방되어 지혜가 밝은 자는 다시 공덕을 짓는 행을 하지 않는다.”


이 말은 공덕을 짓되 바람이 없는 공덕행을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선행, 복행이 공덕행인데

이것은 반쪽짜리 밖에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무언가 바라는 공덕행을 하면 또 태어나야 되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한 선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로는 부동행을 얻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색계 선정보다 더 높은 비상 비비상처,

이런 무색계 선정을 원합니다.


이 무색계 선정이란 것은 안정되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동행이라고 하는데

사마타 수행을 하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근본 삼매에 들어가지고

이처럼 움직이지 않는 선정, 무색계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이 부동행에서도 윤회가 계속됩니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 바라지 않는 공덕행으로 윤회를 끊는

부처가 가신 길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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