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7

通達無我法者 2010. 12. 30. 23:4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을 때

연기의 윤회가 계속되는 것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진행됩니다.

이 원인과 결과를 조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어나는 원인이 있으면 사라지는 결과가 있으며,

조건에 의해 일어난 것은 반드시 조건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 원인과 결과가 지속됩니다.


이렇게 흐르고 지속되는 것을 우리는 윤회라고 말합니다.


몸과 마음은 과거의 원인에 의해 생긴 결과이며,

일어날 원인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집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가 사라진 자리에 열반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열반은 원인이 없이 작용만 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선심은 선업을 만들고 그리고 선 과보를 받습니다.

불 선심은 불 선업을 만들고 불선과보를 받습니다.


윤회하는 세계의 모든 근본 원인은 바로 무지와 갈애이며,

이 무지와 갈애가 사라진 것이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지 원인과 결과만 아는 지적(知的)수준에서,

이것을 실천하는 수행을 할 때만이 연기의 사슬에서 탈출할 수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연기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힘을 공덕이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공덕을 짓는 행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덕이 없는 행을 하기도 합니다.


공덕을 짓는 행 중에서 우리가 욕계 공덕 행이라는 것이 있어서

인간과 욕계 천상에 태어나는 공덕을 짓는 일과 색계 공덕 행을 짓는 일,

그 다음에 무색계 공덕 행이라고 해서 오랜 동안 천상에 머물기 때문에

그것을 부동행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공덕이 없는 행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사악도에 과보를 받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윤회를 끝내는 공덕은 무엇일까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 윤회를 끊는 공덕 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윤회를 끊는 공덕 행은 공덕을 짓되 바람이 없는 공덕 행을 말합니다.


여러분들! 원래 인간의 마음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처음에 태어날 때는 네 가지 종류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첫째가 선심입니다. 그리고 불선심도 함께 가지고 태어납니다.

세 번째는 과보심입니다. 이 과보가 원인과 결과의  마음입니다.

이 과보심은 선과보와 불선과보가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무인작용심이 있습니다.

바로 이 무인 작용심이 연기를 탈출하는 유일한 마음입니다.


깨달음이란 무명과 갈애가 사라져서

새롭게 원인과 결과를 일으키지 않는 마음만 있는 것을 말하는데 바로 이것이 무인작용심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있는 마음에는 번뇌의 티끌이 있는데,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마음에는 번뇌가 불타버린 열반이 있습니다.


바로 이 무인 작용심을 아라한과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아라한이나 부처님은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무인작용심만 있기 때문에 윤회가 끝납니다.

이 무인작용심을 또 다른 말로는 불성, 부처의 마음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부처의 마음을 불성이라고 그러는데 그것은 바로 무인작용심이며,

그 마음은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마음입니다.


바꾸어 얘기하면 12연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덕을 짓되

바람이 없는 공덕 행을 하는 무인작용심일 때만이

연기의 사슬에서 탈출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마음은 항상 선하지 못한 마음과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인작용심은 선하고 선하지 않은 반대급부의 마음이 없고

단지 오직 모두 선한 마음만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신 무인작용심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혜가 없고 무명이 가득한 이는 공덕을 짓는 행과 공덕이 없는 행을 하고,

높은 경지인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고자 하면 부동행을 한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무명이 물러가고 지혜가 밝았다.

무명에서 해방되어 지혜가 밝은 자는 다시 공덕을 짓는 행을 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이 바로 바람이 없는 공덕행을 한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좋지 않아서 문제가 있지만, 사실은 좋아도 문제가 있습니다.

좋은 것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좋은 것에는 반드시 바라는 갈애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는 좋은 것이 문제가 되지만

사실은 좋은 것을 바라지 않고 좋은 일을 하면 더 좋은 것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렇듯이 위의 경전 구절에 따라

무명을 멀리 하고 무명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 진 자가 바로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어떤 공덕을 짓는 행을 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공덕을 짓더라도 어떤 부수적인 결과가 따르지 않는 단순한 행위만 합니다.

이 단순한 행위를 빨리어로는 ‘끼리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인작용심을 뜻합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경우에는 보시와 지계를 더욱 많이 쌓아야 합니다.

범부의 경우에는 물론 보시와 지계를 더욱 더 많이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보시와 갈애는 다른 것입니다.

보시와 갈애를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바꿔 얘기하면 보시를 할 때 어떤 바람이 있는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보시의 과보가 반감됩니다.


또한 보시와 사견이 뒤섞이지 않아야 합니다.

가령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보시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사견이 개입된 것입니다.

내가 좋은 곳에서 태어나야 되겠다라고 보시를 한다면,

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견이 개입된 것입니다.


이렇듯이 보시를 할 때는 무명에 지배되지 않아야 됩니다.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의 갈애를 갖고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고

그리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갖습니다.


여러분! 보시가 선한 행위인지, 선하지 않은 행위인지를 묻는다면

보시는 반드시 선한 행위입니다.


보시를 하려는 의도는 의심할 여지없이 선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내생의 보다 나은 곳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것은 갈애이므로

이것은 선하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불선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선과 불선이 뒤섞인 공덕행에 속합니다.


좋은 곳에 태어나려는 것은 갈애가 있어서

선과 불선이 뒤섞인 공덕행이라고 우리가 봐야 됩니다.


여러분! 양무제가 초조, 달마에게 자기가 한 많은 지금까지의 공덕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나는 탑을 세우고 불사를 하고 여러 가지 공덕을 세웠습니다.”

그 공덕을 묻자 달마대사께서는 “공덕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자! 양무제가 불사를 한 그 공덕은

달마대사께서 공덕이 없다라는 그 말 한마디로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누구나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한 공덕은 이미 생겼습니다.

그런데도 대사께서는 왜 공덕이 없다라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자기가 한 모든 선한 행위에 대해서 그것을 과시하거나 공덕을 바라는 행이 될 때는

그 공덕이 반감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덕이 없는 것이 아니고, 이미 공덕은 생겼지만,

그 공덕을 바랄 때 그 공덕의 의미가 반감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끔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불사(佛事)를 할 때 도반한테 묻습니다.

“나 오늘 어떤 불사를 하고 싶다. 얼마를 보시하고 싶다.”

그렇게 말 할 때 옆에 있는 도반이 “왜 그렇게 많이 해? 절반만 해.” 그렇게 말합니다.


자! 우리가 스스로 바라는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남이 하는 보시를 가로 막는 것도 매우 좋지 않은 불선입니다.


우리는 무심히 “왜 그렇게 많이 보시하느냐?” 라고 말하는 데

사실은, 남이 보시하는 데 대해서 개입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훌륭한 일을 한다라고 말할 때 보시를 한 사람과 동등한 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시라는 것은 꼭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이 하는 보시를 기꺼이 즐겁게 칭찬하고 함께 공유할 때

그것을 칭찬하는 사람에게도 똑 같은 보시의 과보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보시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마음만 내면 되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이 인색하기 때문에,

이 보시에 마음을 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다음 생에 이익을 얻고자 보시를 행한다면 

그 행동은 선하지 못한 사견에 지배되고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행할 때 갈애와 사견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명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적합한 보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지혜가 부족하거나,

바른 결과로서의 이익을 선택할 능력 없이 보시를 한다면 이는 윤회로 이끄는 보시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람이 있는 덕을 짓는 행위입니다.


결국 바람이 있는 보시는 윤회의 순환의 과정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합니다.

따라서 윤회의 과정이 연장되는 것은 보시 때문이 아닙니다.

보시를 할 때 우리가 올바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보시로 인해서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보시, 바른 보시라는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보시입니다.


그렇습니다.

보시를 할 때는 바람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연기에서 탈출하는 길입니다.


만약 바람이 있다면 선과 불선이 뒤섞인 보시입니다.

바람이 없는 보시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슨 마음으로 보시하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령 내가 남을 도울 때, 무심히 보시(布施)를 하지 마십시오.

먼저 현재 내가 무슨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지 그 순간의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 보십시오.


이때 과시를 하는 마음이 있거나,

또는 어떤 공덕이나 음덕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잠시 보시를 멈추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바라는 그 순간의 자기의 마음을 알아차려 보십시오.

그러고 난 뒤에 보시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보시를 하고자 하는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반드시 탐욕이 있거나, 바라는 마음이 있거나,

또는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 보시를 하는 마음이 발견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 그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러고 나서 다시 보시를 행하십시오.

그리고 그 때 다시 보시를 행하는 그 마음을 또 알아차려 보십시오.

그러면 그 순간의 마음은 아무 것도 바라는 마음이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소한 보시를 하나 하더라도 바라는 마음이 없을 때

연기의 사슬에서 탈출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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