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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와 위빠사나/19

通達無我法者 2010. 12. 31. 02:1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우리는 지금 12연기를 공부하고 있고, 그리고 12연기 공부와 함께

어떻게 하면 연기를 탈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기를 탈출해야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냥 오지 않습니다. 반드시 적절한 노력을 해야 그에 따르는 행복이 옵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불행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행복이 이렇게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행복이 무엇인가요? 부귀영화인가요?

부자가 되고 지위가 높아져서 이름이 빛나는 것을 부귀영화라고 합니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행복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이것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지만, 완전한 행복이라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얻는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되고 고통이 뒤따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얻는 순간부터 더 많은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가진 만큼 고통을 준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진 만큼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세계 최고의 재벌이나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해서 만족할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합니다.

때로는 선(善)을, 때로는 불선(不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행복이지만 사실은 세속적 행복입니다.

이런 것들은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들이며,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만한 것은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불만족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고(苦)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구조적으로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어있습니다.


여기서 피할 길이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런 세속적인 행복의 의미를 뛰어넘어서

출세간의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는 세간이라는 세속적인 사회와

출세간이라는 초세속적인 사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세속이 물질적인 사회라고 한다면 초세속은 정신적인 사회입니다.

물질적인 세계에서는 영원히 답이 없지만,

정신적인 세계에서는 항상 그 자리에 바로 답이 있습니다.


그 순간 바로 자기 자신이 알아차림을 통해서

자기의 마음의 번뇌를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물질적인 것은 나누어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먼저 차지해야합니다.

그래서 강한 자가 뺏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은 무한한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와도 나누어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아무리 퍼가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사랑도 이성간의 사랑은 두 사람만 나누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사랑, 인류애는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랑입니다.

세상은 항상 이렇게 양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들에 대한 선택은 항상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속적인 행복을 선택할 수도 있고,

또 괴로움이 없는 출세간의 행복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간의 행복은 부귀영화 무병장수입니다.

쉽게 말하면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요새 말로는 웰빙입니다.

그러나 진짜 웰빙은 정신적인 것이며 초세속적인 것입니다.


세속의 행복은 자기만의 행복입니다.

상대의 행복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상대가 불행해야 내가 행복합니다.

그래서 독선적인 행복입니다.


그러나 출세간의 행복은 계율을 지키고,

마음의 평화와 고요함을 얻어, 지혜가 나는 것입니다.

이 행복은 나의 행복과 남의 행복이 함께 존중됩니다.


나의 이익보다 상대의 이익을 더 우선합니다.

그래서 상대의 불행이 가슴 아픕니다.

그리고 내가 행복할 때, 이 행복을 남과 나누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출세간의 초세속적 행복입니다.


세간의 행복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아만심으로 얼룩져있지만

출세간의 행복은 관용과 자애와 지혜를 가진 것입니다.


세간의 행복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출세간의 행복은 욕망에 의한 집착이 사라져서 만족할 줄 아는 평온함이 있습니다.


선한 것이란 진정한 행복이고, 선하지 못한 것은 불행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하지 못한 것을 추구하며, 행복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우리가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선한 것이란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 과오가 없는 것,

능숙하여 행복한 결과를 낳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선에는 반드시 세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합니다.

첫째 관용입니다.

둘째 계율입니다.

셋째 수행입니다.


우리가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관용(寬容)과 계율(戒律)과 수행(修行)이 함께할 때만이

비로소 온전한 선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선하다는 것 세 가지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관용은 관대한 행위입니다.

관대한 행위를 또 다른 말로 관용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선의 시작입니다.

무엇이나 너그럽게 용서하여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관용이 있으면 바로 뒤따르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남을 돕는 베푸는 마음입니다.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보시가 바로 관용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용과 보시는 동의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관용이라는 마음이 있으면 상대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즉시 주고 싶은 선하고 순수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마치 빛의 속성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마치 사랑의 속성과도 같습니다.


내가 상대를 받아들이면 먼저 내가 편하고 그리고 상대도 편합니다.

내가 상대를 받아들이면 나의 마음이 편하여 먼저 나의 이익이 있습니다.

나의 이익이 있으면 상대에게도 그 이익이 돌아갑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편한 마음을 가진 상대가 내게도 이익을 줍니다.

나의 평화는 가정의 평화이고 사회의 평화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설령 불선업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관용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도 어쩔 수 없어서 축적된 성향으로 불선업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 받아들이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원히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면 그 자리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오히려 베풀고 싶은 마음까지 생깁니다.


받아들이는 것은 선한 원인을 만드는 것이며, 

선한 원인은 반드시 선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것이 인과응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한 씨앗을 심으면 선한 열매가 과보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행한 행위의 결과를 그대로 받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단하나의 유일한 해결방법은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법률적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차원에서 이해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원인과 결과를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그 그물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이며 섭리입니다.


여러분! 관용에 의해서 보시를 할 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시행이 마음을 깨끗이 하려는 노력에 도움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비구 보디스님께서는 이렇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행해진 보시는 다음 세 가지 형태의 고(苦)의 근절을 돕는다.


첫째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주려는 마음을 먹으면

그 순간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 줄어든다.

따라서 베푸는 버릇을 몸에 붙이게 되면

불행의 주된 요소 가운데 하나인 갈애가 점차 약해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베풀어서 손해를 보지 않고

오히려 이익을 얻는 것은 베푸는 순간 갈애가 사라진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선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다음 생에 청정한 불법을 만나

수행하기에 적합한 복된 곳에 태어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베품을 통해 열반을 성취하기에 만족할 만큼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로 그러한 보시의 너그러운 행위는 곧바로 계정혜 3학을 항상 북돋아준다.

계정혜는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고귀한 8정도이며,

이 8정도의 완성이야말로 고(苦)를 벗어나는 해탈입니다. 


만일 우리가 내세의 복된 삶을 얻겠다는 어떤 바람 속에서 베푼다고 해도,

보시를 착실하게 행하기만 한다면 그 목적을 성취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내생의 세간적 복을 구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해탈을 향한 수행으로서의 보시가 훨씬 수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복을 받겠다는 바람으로 하는 보시는

어딘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갈애와 연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갈애는 반드시 집착을 하게 되고,

그 집착은 업을 생성시켜서 미래의 고통뿐인 태어남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시행으로 얻어진 공덕은 덧없는 즐거움 속에서 언젠가는 끝장이 오고,

그렇게 얻은 세간적인 행복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생사윤회 속을

언제까지나 헤매게 만들게 됩니다.


결국 그렇게 얻어진 행복은 좀더 깊숙이 헤쳐 본다면

다른 형태의 고통에 불과한 것뿐입니다.


갈애와 연결된 보시는 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결코 멸하지 않는 영원한 행복의 길이 아닙니다.

갈애가 없는 보시일 때만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지는 오로지 갈애의 완전한 소멸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갈애와 집착으로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보시는 불법이 살아있는 시대,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는 시대에만 우리가 실현할 수 있습니다.

불법이 없는 시대에는 바람이 없는 공덕행, 이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모두 탐욕에 눈이 멀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바라는 것만이

우리들의 목표인 세계에서는 결코 행복이 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바로 그런 시대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우리가 무언가를 베풀고자 한다면,

바로 갈애를 뽑는 그 원인을 만드는 것이 됩니다.

갈애가 끝날 때 괴로움이 끝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해탈입니다.


우리는 갈애를 끝내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해야할까요?

갈애는 욕망입니다.

우리가 욕망을 없애기 위해서 다시 욕망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비가 와서 생긴 흙탕물을 없애기 위해서 거기에 다시 흙탕물을 끼얹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맑은 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가지 말아야할 곳에 가서 괴롭지 않으려고 하면 잘못입니다.

하지 말아야할 것을 하고서 괴롭지 않으려고 하면 잘못입니다.


가지 말아야할 곳에 가서 겪는 괴로움이 있다면 기꺼이 감수해야합니다.

하지 말아야할 것을 행해서 얻는 괴로움이라면 기꺼이 감수해야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스스로

괴로움뿐인 이 연기의 사슬을 끊어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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