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50

通達無我法者 2011. 1. 7. 00:2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지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12연기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무명과 갈애로부터 벗어나는 것인데,

무명과 갈애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지혜는 지난 시간에 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 업의 지혜

둘째, 선정의 지혜,

셋째, 위빠사나의 지혜,

넷째, 도의 지혜,

다섯째, 과의 지혜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위빠사나의 지혜’ 중에서

일곱 번째의 지혜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일곱 번째 지혜는 해탈을 이루려는 지혜입니다.

지혜가 성숙됨에 따라서 고통이 가중되고, 

그 고통이 괴로워서 더욱 깨달음을 얻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해탈을 이루려는 일곱 번째의 지혜입니다.


이러한 해탈을 이루려는 지혜를

저희 스승인 우 소바나 사야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을 건너기 위해서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만 배가 강 한가운데서 뒤집혀서 배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강에 빠졌습니다.

이 사람은 수영을 해서 건너편 언덕에 닿도록 필사적으로 헤엄을 쳤습니다.

그래서 강 언덕을 향해 계속 수영을 해 나갔는데,

너무 힘이 들어서 그만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 없는지 찾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마침 강에 떠내려가는 물건이 잡혀서 얼른 붙잡고

이것에 의지하여 정신없이 헤엄을 쳤습니다.


이 사람이 한참 헤엄을 치다가 자신이 붙잡고 있는 물건을 보니

그것은 썩은 개의 시체였습니다.

개의 시체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고, 털은 다 빠져서 몰골이 아주 보기 흉했습니다.


이 순간 이 사람은 자기가 의지할 수 있어서 좋아했던 마음이 금세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썩은 개가 의지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개의 시체를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아직은 강가에 도착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사람의 마음은 저 강 언덕에 다다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개의 시체로부터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도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서 헤엄을 쳐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들은 오온의 혐오스러운 것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지금은 오온에 의지해서 오온을 열심히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무명과 갈애가 나쁘다는 것을 모릅니다.

원래 우리가 사는 것은 무명이라는 근본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명과 갈애로 인해 만들어진 오온이 행복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데도 아름답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온은 위빠사나 지혜의 분명한 앎으로 알아차리면, 

결국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항상 사라지는 것을 앎으로써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정신과 물질의 불행과 허물을 보게 되고, 다시 싫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해탈을 이루려는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괴로움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 우리들에게 주어진 괴로움을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단지 그것을 알아차려서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때 오온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지만, 

내 몸에서 계속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오직 썩어가는 개의 시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열심히 헤엄을 치는 것처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오온을 계속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해탈을 이루려는 지혜입니다.


여덟 번째는 다시 살펴보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되돌아 살펴보는 앎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수행이 향상되어 갈수록 앞의 단계에서 많이 알아차렸지만,

계속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신과 물질이 전생에서부터 항상 하는 것이고

행복하고 또 내 것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행을 통해서 오온은 항상 하지 않은 것이며,

그래서 고통이라는 것과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긴 했지만,

뿌리 깊은 잘못된 견해에서 완전하게 벗어났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속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러분!

위빠사나 지혜에서 여덟 번째의 다시 살펴보는 지혜란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물가로 낚시를 하러 갔습니다.

물가에 앉아서 낚시를 하는 중에 몸체가 긴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려서 건져 올렸습니다.

순간적으로 이 물고기가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장어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건져 올렸습니다.


그러나 건져 올리고 보니 장어가 아니고 독뱀이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대로 놓으면 뱀에게 물릴 것 같아서

뱀의 목을 잡고 대여섯 번 돌린 후에 멀리 던져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오온의 실체를 몰라서

전생에서부터 오온을 좋고 행복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좋아서 바라고 집착을 하고 행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온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재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알아서 계속 무상, 고, 무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다시 살펴보는 지혜입니다.


위빠사나의 아홉 번째 지혜는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입니다.

이것은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평등하고 청정한 앎입니다.


대상이 계속 사라지는 것을 알고 하는 것이 이어질 때 마다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 없이 알게 되고,

사라짐도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평온하게

아는 마음만 계속되는 것이 현상에 대한 평등한 지혜입니다.


일어남이 고(苦)라는 것을 알고 사라짐이 고(苦)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는 좋은 것도 없고, 싫은 것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평정함이 함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라고 합니다.


이런 지혜가 성숙된 뒤에는 열 번째 지혜가 생깁니다.

이것이 적응의 지혜입니다.


이 적응의 지혜는 도, 과를 얻기 이전에 반드시 거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적응의 지혜는 순서에 맞게 순응하는 앎입니다.

이것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에 대한 앎이기도 합니다.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 없이 평등심으로 알아차릴 수 있을 때,

여러분의 위빠사나 수행은 커다란 힘이 생기고, 앞으로 나아가 도에 다다르는 것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것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지혜로 이어집니다.


이 열 번째 적응의 지혜는 지금까지 앞서 말한 아홉 단계와

마지막 열 번째의 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앎입니다.


여러분! 이상이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얻는

내관적 지혜, 통찰 지혜, 깨달음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자! 다음에는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 다음에

네 번째, 도에 대하여 분명하게 아는 지혜가 있습니다.


이 도의 지혜는 막가냐나 라고 합니다.

한문으로는 도지(道知) 라고 합니다.


여러분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하는 것을 계속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아는 것이 끝나게 될 때, 고가 끊어지고 궁극적인 평화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궁극적인 평화를 아는 마음을 도(道)의 지혜라고 합니다.


도(道)에는 고(苦)가 없고 짧은 순간에 궁극의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이 도(道)가 바로 열반을 지향하는 과정이고,

그 도(道) 이후가 바로 열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다섯 번째 과(果)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는 지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과(果)의 지혜는 바른 길에 대한 결과의 지혜로 계속해서 궁극적인 평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도(道)의 지혜는 궁극적인 지혜를 한 번 경험하지만

과(果)의 지혜는 두 번, 세 번, 계속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각자에 따라서 약간 다를 수도 있습니다.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의 다른 점을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큰 나무 조각에 불이 붙어서 타고 있을 때 물을 뿌리면 꺼집니다.

이것을 도(道)의 궁극적 평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불타던 곳에 불은 꺼졌지만 아직 뜨거운 열기와 연기는 남아 있습니다.

다시 물을 두 번, 세 번, 더 뿌려서 연기나 열기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과(果)의 지혜로 나타난 궁극의 평화입니다.


이러한 궁극적 평화를 맛본다면 수행자의 마음은 아주 깨끗해 질 것입니다.

이상이 다섯 가지 지혜였습니다.


이때 지혜라고 말하는 것은 빨리어로 빤냐라고 합니다.

빨리어 빤냐를 중국에서 소리 나는 대로 음사한 것이 반야(般若)입니다.

그 반야를 우리말로 의역한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지혜를 뜻하는 빨리어는 빤냐와 또 다른 말로 냐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위빠사나의 지혜는 냐나에 속하고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지혜는 빤냐에 속합니다.


그래서 가볍고 낮은 단계의 앎은 상좌 불교에서는 냐나라고 말하고 

이런 냐나의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궁극의 지혜를 얻을 때는 빤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지혜는 아는 것을 말하며

말씀드린 것처럼 지혜의 반대는 무명입니다.


우리가 이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알아서 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알아서 끊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따른 수행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수행을 하려는 열망은 굳세어야 하지만,

수행을 할 때에는 할 일이 없어서 하듯이 가볍게 해야 합니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강하게 원하는 것이 많으면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행은 선심과 선과보가 결합되어야 수행을 하려는 마음을 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선과보가 없어서 수행이 생각에 그치고 만다면, 

훌륭한 스승과 도반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힘을 줄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 의문만 있고 확실한 답이 없습니다.


여러분!

오직 원하는 것 없이 알아차릴 때만이 진정한 삶의 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는 마침표를 찍지 마십시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대상에 마침표를 찍지 마십시오.

대상은 항상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그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수행에서 결과는 없습니다.

오직 과정만 있습니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 대상이 박제되어 버립니다.

결과는 내가 얻으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는 반드시 바른 원인을 만들고, 

그 원인에 따른 결과는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변화를 주목할 때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속성인

무상과 고, 무아의 진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문제는 오직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것은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은 마음을 계발하는 행위로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도 주제를 파악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남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문제의 해결은 자기 인식의 전환에 있습니다.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보려는 인식의 발상이 필요한데,

인식은 스스로의 노력으로만이 전환이 가능합니다.


어떤 초월적 존재나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자도

결코 자신의 인식을 바꾸어주지 못합니다.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은,

매사에 자신이 스스로 헤쳐 나가도록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일 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도 지혜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지혜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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