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망상을 많이 한다는 것은 망상이 싫건 좋건 간에
망상하는 것을 좋아서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망상을 많이 할 때는 망상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망상은 마음이 하므로 그 마음을 보면 뿌리를 알게 됩니다.
망상은 생각을 놓지 않고 기억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현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여 알아차리면 망상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지속시켜야 다시 망상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망상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며,
현실을 떠난 상상의 세계라서 알아차림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금까지 하고 살아온 것이 망상이므로,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망상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망상은 알아차릴 대상이며, 망상이 일어날 때 마다 알아차리면,
망상으로 인해 알아차리는 힘이 커지고 지혜가 생깁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아자타 삿투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자타 삿투의 스승인 데와닷다는
자신의 악한 의도를 이루기 위해 또 다른 계획을 꾸몄습니다.
태자에게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니까,
가장 혈기 왕성할 때인 지금 부왕을 죽이고
자신은 부처님을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태자는 왕을 죽이는데 실패했지만
나중에 태자의 욕망을 알게 된 빔비사라 왕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이동은 데와닷다의 원하는 바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데와닷다의 사주를 받아 아자타사투는 부왕을 감옥에 가두고 굶겼습니다.
그리고 발을 다치게 하였던 것입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빔비사라 왕이 발을 다치게 된 것은,
전생에 신발을 신고 탑묘의 앞마당을 걸었고,
씻지 않은 발로 비구들을 위한 방석을 밟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빔비사라왕은 대략 67세 쯤 되어서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아자타 삿투의 본 마음은 사악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선한 성품은 아버지에게 나쁜 짓을 한 뒤에
부처님께 헌신했던 점, 부처님의 사리를 숭배하고 소중히 안치하였던 점,
그리고 제 1차 결집 때 열성을 다해 지원한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에 가섭존자에 의해서 1차 결집이 있을 때
자기의 아버지를 죽게 한 아자타 삿투 왕이 결집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잠시 1차 결집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차 결집은 불멸 직후에 7일 째 되던 날 수밧다라는 늦깎이 비구가 이제 부처님이 입멸하였으므로
더 이상 성가시게 할 게 없어져서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까사빠 존자는 앞으로 이대로 놔두면 부처님의 교법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우려에서
경전 결집을 개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하 까사빠는 아자타 삿투 왕의 후원 하에 라자가하의 칠엽굴에서
500명의 아라한 비구들을 모아 부처님의 모든 교설을 결집하였습니다.
아난다는 결집이 되기 전 날까지 아라한과를 얻지 못해 결집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가,
결집이 개최되기 바로 전 날 아라한이 되어 결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1차 결집에서 부처님의 법을 모아 엮는데 매우 신중하게 하였음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여기서 결집이라고 번역한 상까띠는 원래 합송(合誦)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집은, 모여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외우는 합송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때, 경은 부처님을 항상 가까이 모시던 아난다 존자가 외웠고,
율은 계율에 대해서 이해가 깊었던 우빨리 존자가 독송했습니다.
그리고 마하 까사빠는 이들에게 질문하는 역할을 하였고,
1차 결집에서는 적어도 율장의 경분별 부분과 경장의 4부 니까야는 확정되었을 것이고,
논장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아쇼카 대왕 재위 시절에 진행된 3차 결집에서는
지금 현존하는 형태의 삼장이 완성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수행자 여러분!
상좌 불교를 테라와다라고 말합니다.
테라는 장로라는 뜻이고, 와다는 견해,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상좌 불교를 테라와다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경전 결집을 통해서 내려진 테라,
장로들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테라와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상좌 불교는 지금까지도 1차 경전 결집부터 6차 경전 결집을 통해서
내려온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고수하고 있습니다.
다시 아자타 삿투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자타 삿투가 아버지를 죽이는 죄업을 지었을 정도로 잘못된 길에 빠진 것은
바로 사악한 스승과 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자타 삿투의 삶은 우리가 특별히 명심해야 될 교훈을 줍니다.
수행자 여러분!
스승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잘못된 스승은 자기 자신의 모든 것들을 망쳐 버리므로
스승의 중요성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주의를 기울여야 되겠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죽던 바로 그 날, 아자타 삿투의 왕비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자타 삿투는 흥분하고 아이에 대한 엄청난 애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러자 자기 아버지 생각이 나서 감옥에 갇힌 왕을 풀어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이미 빔비사라왕은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부왕이 어린 시절에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보살펴 주었는지를 들은 뒤에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때부터 아자타 삿투의 인생은 비참하고 불행해졌습니다.
그는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지옥의 환영과 부처님의 헌신적인 재가 신도였던
아버지에게 지은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의사 지와까의 안내로 아자타 삿투는 부처님을 뵈러 갔습니다.
그 때 세존께서는 천여 명의 비구들에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명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말소리를 내거나 손이나 발을 움직이지 않고 모두 조용히 있었습니다.
여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왕은 내 아들 우다야 밧다가
이 비구들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고요함으로 축복받기를 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아자타 삿투는 자기 아들이 자신이 어떻게 권력을 쥐었는지를 알게 되면
자신의 전철을 밟을까봐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두려움은 증손자까지 현실로 이어져서 아들들은 아버지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자타사투왕은 부처님께 거룩한 출가생활로 얻어지는 즉각적인 결실에 대해서 여쭈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재가자들이 비구에게 표하는 존경, 청정한 계행,
세간계의 초선과 다른 높은 상태의 마음, 신통, 번뇌의 소멸과 성스러운 도의 증득이
거룩한 삶을 살아서 얻어지는 이득이라고 상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난 아자타 삿투는 부처님의 제자임을 공식으로 선언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죽이지만 않았다면 아자타 삿투는 도의 단계인 수다원과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부터 아자타 삿투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고,
부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죽은 다음에 떨어졌을 무간 지옥의 두려움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자식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저희는 무거운 업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 업은 습관적인 업과
세 번째 업은 임종시에 지은 업입니다.
아라한을 죽이고, 부처님에게 상처를 입히고, 의도적으로 승가를 분열시키는
세 가지 무거운 업도 이 악업을 지은 자를 지옥에 떨어뜨리게 합니다.
과보를 맺는 다른 업은 습관적인 업입니다.
선한 계행을 지키지 못하고, 나쁜 습관을 없애려고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면,
습관적인 업이 되어 내생에 나쁜 과보를 받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성질대로 사는 사람, 관념대로 사는 사람, 전통대로 사는 사람,
축적된 성향대로 사는 사람들이 모두 습관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재가자는 반드시 5계를 지키며 살아야 하고,
계를 어겼을 경우는 더욱 더 경계하여 자신의 계행을 수지하겠다고
구두로 다짐을 해야 합니다.
계청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율장의 계목을 일부러, 혹은 모르고 어겼을 경우에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습관적인 업이 되기 때문에 비구는 반드시 참회와 계목을 수지하겠다는 재확약을 통해서
계청정을 회복하고자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우포라고 말하는 포살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의 계행을 반성합니다.
날마다 행하는 보시, 부모와 스승에 대한 공경, 부처님을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들은
즉각적인 과보를 가져오는 습관적인 업입니다.
습관적인 업이 없을 때는 임종에 이르러 지은 업이 업의 과보를 가져옵니다.
아비담마의 한 논서는 이 임종에 이르러 지은 업이 습관적인 업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고 설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해당 될 것입니다.
주석서에 나와 있듯이 아마도 습관적인 업이 우선하여 과보를 맺을 것입니다.
물론 임종시에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상시에 습관적인 마음이 죽음에 그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에 있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우리는 임종에 이르러 지은 업에 확실히 의지할 수 있습니다.
50여 년 동안 사형집행인으로 사람을 죽였던 어떤 사람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음식을 보시하고
법문을 들은 다음 천인계에 태어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죽기 직전에 한 장로가 스님과 만나고 나서
천인계에 태어난 한 스리랑카의 어부의 체험에서 공감을 얻습니다.
임종에 이르러 지은 업에 긍정적인 면이 생산적인 것처럼,
그 반대인 부정적인 면도 또한 생산적입니다.
스리랑카의 한 재가자는 여러 해 동안 수행을 했지만, 빛조차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실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재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이러한 삿된 견해로 말미암아 죽어서 아귀계에 떨어졌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빛 등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릇된 방법이나 그릇된 노력으로 수행을 했거나
기본적인 바라밀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수낙카따라는 비구는 천안(天眼)을 얻었으나 천이(天耳)를 얻지 못했는데,
이는 천이를 얻을 수 있는 바라밀이 없는데다가 그의 악업이 장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수행을 해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낙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통 바른 도를 따라서 수행을 하면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청정해지면 정신과 물질의 인과 관계 및
그들의 끊임없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짐을 확연히 보는 것처럼,
알아차림의 대상인 물질과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도 확연하게 구별하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빛을 보게 되지만,
설령 빛을 분명하게 보지 못했더라도 위빠사나의 지혜의 계발은 아주 중요하고,
행복, 희열, 경안, 평안 등과 같은 깨달음의 요소를 경험합니다.
정신과 물질을 그냥 숙고해서만 그러한 높은 마음의 상태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이미 지은 업에 관한 것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세 가지 업인, 무거운 업, 습관적인 업, 임종시에 지은 업이 없을 때는
네 번째 업인 이미 지은 업이 기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죽을 때 이미 지은 업이 재생연결식으로 전해집니다.
세 가지 업이 없을 때는 평소에 자주 반복하여 지은 업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이미 지은 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수행을 열심히 해야 되는 이유는
이미 지은 업을 지어서 위급할 시에나 죽을 때
이 업의 과보의 적용을 받기 위한 이익이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오늘 수행을 해야 되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초기불교 > 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연기와 위빠사나/87 (0) | 2011.01.21 |
---|---|
12연기와 위빠사나/86 (0) | 2011.01.21 |
12연기와 위빠사나/84 (0) | 2011.01.19 |
12연기와 위빠사나/83 (0) | 2011.01.17 |
12연기와 위빠사나/82 (0) | 2011.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