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에 대한 의심은 대상을 알려고 하지 않고, 주저하며,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무지가 의심을 나게 하며 의심이 의심을 낳습니다.
의심은 장애의 하나로써 알아차려야 할 법입니다.
의심을 하게 되면 바르게 알아차릴 수가 없어서
집중이 되지 않아 수행에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의심은 진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생기므로
가르침대로 수행을 해서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의심은 호젓한 곳에서 강도를 만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은 흙탕물을 휘저어 어두운 곳에 둔 것과 같습니다.
흙탕물에는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가 없습니다.
의심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나야 풀리므로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합니다.
의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12연기를 공부하여
의심에서 해방되는 청정을 얻어야합니다.
그럴 때만이 비로소 바른 수행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태어남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생명이 사는 세계는 31개이며, 그 31개의 세계 중에서
지난 시간에는 지옥의 태어남과 그리고 축생의 태어남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태어남으로 아귀의 태어남에 관한 것입니다.
아귀는 네 가지 악처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고통만 겪습니다.
아귀는 인색하고 집착이 심한 과보로 태어나며 화생으로 태어납니다.
아귀의 수명은 정해지지 않고 자기가 지은 과보만큼 아귀로 삽니다.
아귀를 빠알리어로는 뻬따라고 하는데 행복과 멀리 떨어진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아귀를 중국에서는 귀신이라고 하지만 아귀가 귀신이나 영혼은 아닙니다.
31개의 생명이 사는 존재의 세계에 귀신이라고 쓰여 있는 곳은 없습니다.
아귀는 매우 큰 기형적인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보통사람의 눈에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31개의 생명이 사는 세계에 모두 자기의 세계가 있지만
아귀는 자신들의 세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숲이나 산, 강, 계곡, 무덤 등등 더러운 장소에 삽니다.
아귀는 오랜 세월 먹지도 못하고 마실 것도 얻지 못합니다.
일부의 아귀는 사람들의 밥찌꺼기, 음식, 가래, 땀, 침, 똥 등을 먹고 삽니다.
그래서 먹고 마실 것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지옥의 존재들처럼 매우 고통을 겪습니다.
아귀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사는데 네 가지 부류의 아귀가 있습니다.
첫째 먹는 대로 토해내는 반타씨카쓰 아귀가 있습니다.
둘째 항상 배고프고 목이 마른 쿠피바시노 아귀가 있습니다.
셋째 갈증에 의해서 소멸되는 리자마따니까 아귀가 있습니다.
넷째 다른 사람들의 보시에 의해서 먹고 사는 빠라다투 파지비노 아귀가 있습니다.
이상 네 가지 부류의 아귀가 있는데
이 중에 유일하게 빠라다투 파지비노라는 아귀만
인간의 공덕을 받아 행복한 곳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가족이나 친척들이 죽은 자를 위해 공덕을 지을 때
만약 죽은 자가 빠라다투 파지비노 아귀였다면 그 공덕의 과보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조건이 붙습니다.
그 해당되는 아귀가 이 공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살아생전에 좋지 못한 관계였거나, 원한을 가지고 죽었다고 한다면
그 후손이 공덕을 지을 때 아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공덕이 그 아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약을 해보자면
우리가 죽은 자를 위해 선한 공덕을 쌓을 때,
죽은 자가 빠라다투 파지비노 아귀가 되었을 때만 공덕의 효과가 있으며,
그것도 아귀 자신이 인간의 공덕을 수용할 의사가 있을 때만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우리가 죽은 자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오늘 다시 한 번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죽은 자를 기념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그를 위해서 선업을 쌓는 일이지 사실 다른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자를 위해서 하는 행위들은 산 자의 잔치이거나
산 자의 욕구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사실은 죽은 자와 상관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인간만 두 개의 세계를 삽니다.
살아서 아귀로 살면 죽어서도 아귀가 됩니다.
아귀는 인색하여 먹지를 못합니다.
인간이 남에게 베풀지 못하고 인색하면
살아서도 아귀와 같은 마음으로 살고
이렇게 살면 죽어서도 아귀가 됩니다.
또 있습니다.
남에게는 베풀어도 자기 자신에게 베풀지 못하고 인색하고 먹지도 않는다면
살아서도 먹지 못하고, 죽어서도 먹지 못하는 아귀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원인과 결과에 의한 생성만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베푸십시오.
인색하지 마십시오.
인색하면 지금도 아귀이고 죽어서도 아귀로 태어납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을 여러분의 소유라고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베푸십시오.
베푸는 선한 마음이 있을 때
여러분은 현재에도 선하며, 미래에도 선할 것이고
죽어서도 선한 세계에 태어날 것입니다.
무엇을 인색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수행자 여러분!
네 번째 태어남은 아수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수라는 네 가지 악처중의 하나입니다.
이상의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계를 4악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 4악처의 생명은 행복이 없고 오직 고통만 있습니다.
아수라는 성냄의 과보로 태어나며 화생으로 태어납니다.
아수라의 수명은 정해지지 않고,
자신의 과보만큼 살다가 다시 다른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아수라는 아귀의 한 종류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수라를 아귀로 부를 때는 4악처라고 하지 않고 3악처라고 합니다.
주석서에서는 이 아귀아수라를 깔라 깐지까 아수라라고 합니다.
불길하고 검은 아수라라는 뜻입니다.
아수라들도 일정한 영역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 아수라들은 바다 속이나 강변 등에서 사는데
항상 굶주린 상태로 살며 항상 목마른 상태로 삽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상의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에 태어남은
모든 생명의 태어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나 천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지극히 적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의 이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태어남은
거의는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이 4악도에 태어나셨습니다.
모든 아라한도 이 4악도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려서 선한 행위를 통해서 적어도 수다원이 된다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4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현재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노력하십시오.
노력하지 않으면 오지 않습니다.
노력할 때만이 여러분이 원하는 세계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섯 번째 태어남이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4악처와 천상의 중간에 있습니다.
그래서 4악처의 고통과 천상의 행복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 태어날까요?
인간은 다섯 가지 계율을 지킨 과보의 원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태생으로 태어나며,
인간의 수명도 정해지지 않고 자기가 지은 과보만큼 삽니다.
물론 생명들은 일정한 수명이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자기 수명만큼 살지 못하고
일찍 죽거나 수명대로 살다가 죽습니다.
이런 경우에 일찍 죽거나 수명대로 사는 것들이
모두 자신의 과보로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으로 살다가 죽어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은 결코 없습니다.
다만 죽을 때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그 마음에 의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서 다음 생이 결정됩니다.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운 보살은 인간계를 더 좋아합니다.
바라밀 공덕을 쌓아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생명은 인간계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4악도에서는 지은 업대로 살다가 죽고
천상에서도 수명대로 살다가 죽기 때문에 바라밀 공덕을 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선업의 바라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아셔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사명을 완수하는 길이며 이것만이 가장 값진 삶입니다.
뿐더러 인간은 자신의 삶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벽지불과 아라한들도 인간으로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인간이란 존재는 강력한 마음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가장 나쁜 오역죄에 해당하는 부모를 죽이는 죄까지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아울러서 바라밀 공덕을 닦고 선행을 해서 부처나 아라한이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계는 지옥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서부터
아라한의 마음을 가진 사람까지
31개의 세계의 마음을 모두 가지고 있는 부류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세계는 고통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고통을 우리는 반전의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고통 없이 발전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만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평온한 상태에서는 지혜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천상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서도 수행을 할 수 없지만
천상에서도 수행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은
행복이 수행을 하도록 유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인간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를 잘 살려서
선행을 하여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해탈의 기쁨을 얻어 고통뿐인 태어남에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나는 과거에도 잘못했으며 현재에도 잘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에도 잘못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잘못한 것을 알아차리면 미래에는 잘못이 줄어들 것입니다.
알아차려도 잘못이 제거되지 않고 줄어드는 것은
아직 완전한 지혜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잘못한 것을 후회하면 미래에 똑같은 잘못이 계속됩니다.
후회는 불선업으로 의지를 나약하게 하여 상항을 악화시킵니다.
그래서 완전한 지혜가 날 때까지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잘못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무지는 대상의 실재하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관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속박합니다.
무지는 맹목적입니다.
무지는 분별력이 없고 미혹하여 삿된 것에 빠져서 삿된 것을 구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무지하면 용감합니다.
무지하면 양심이 없고, 수치심이 없으며,
항상 들떠 있어서 짐승처럼 본능만 가지고 있습니다.
지혜는 알아차린 결과로 얻어집니다.
지혜가 온전한 상태로 되기 위해서는 즉시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인간으로 태어난 사명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통찰해서
모두 이 수행의 길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현재를 행복하게 하고,
그리고 여러분의 미래를 행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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