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98

通達無我法者 2011. 2. 8. 20:0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있고, 좋지 않은 사람도 있고, 그저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미운 사람을 만나고, 덤덤한 사람을 만납니다.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날 때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으며,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거나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상대의 성향에 따라,

고스란히 자신의 감정으로 전이가 됩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집착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고통스럽고,

덤덤한 사람을 만나면 무지한 상태가 됩니다.

이처럼 상대에 따라 자신의 감정이 결정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느 것이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마음도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며, 몸도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즐거움도 변하며, 괴로움도 변합니다.


연기를 회전시키는 무명도 일어나고 사라지며,

무명에 의해 일어나는 갈애도 일어나면 사라집니다.

시간이 머물지 않고 흐르듯이, 이렇게 모든 것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연속됩니다.


이런 흐름에 변하지 않는 주체가 있어서 윤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순간의 마음과 몸이 조건에 의해 변하고 있을 뿐이지, 내가 윤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이 원인과 결과로 계속되는 것만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면 괴롭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괴롭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10장을 공부하시겠습니다.


제10장은 연기의 수레바퀴를 이루는 바퀴살과 바퀴통, 축과 막대와 테두리를

분해하고 부수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를 부수는 것이며, 그래서 연기를 탈출하는 방법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누구나 언젠가는 죽습니다.

이 죽음은 몰락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몰락을 경험해야 합니다.


살아서 무엇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폐하여서 사라지는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특히 물질적인 것은 더 그렇습니다.


자신의 몰락은 몰락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몰락했기 때문에 그 과보를 받아서 다시 태어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어떤 태어남이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 몰락하지 않고 흥왕하면 과보가 소멸되어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몰락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갈애를 일으키고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가 없으니 실패한 인생인 것입니다.

이것은 당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바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성이 없는 것을 바라기 때문에 무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몰락은 출발부터 잘못을 예견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몰락의 반대는 흥왕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하게 일어나는 흥왕을 하는가요?  

그것은 자신이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집착을 하면 집착한 대상으로 인해 몰락을 합니다.

돈에 집착하면 돈 때문에 몰락하고,

명예에 집착하면 명예 때문에 몰락합니다.

사랑에 집착하면 사랑 때문에 몰락합니다.

이러한 몰락은 유지 못한 것에 대한 염원이 서려있기 때문에,

반드시 새로운 태어남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한 것에 대한 집착이나, 수행에 대한 집착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떤 것이나 집착을 했다면 몰락의 종말을 맞이해서 바란 만큼의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흥왕은 갈애가 없어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보가 없어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장 깨끗한 것이고, 가장 성하게 일어나는 흥왕입니다.

이처럼 몰락으로 인해서 태어난 생명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흥왕으로 인해서 태어나지 않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수레바퀴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수레의 한가운데에 바퀴살이 모인 중심부분인 바퀴통이 있습니다.

이 바퀴통이 바로 무명과 갈애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무명과 갈애가 우리가 살고 있는 생존의 근본원인입니다.


이 바퀴통이 있는 한 연기의 수레바퀴는 계속해서 돌아야합니다.

그러나 바퀴통이 부서지면 연기의 수레바퀴가 돌 수가 없습니다.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중앙에 있는 바퀴통과 연결된 네 개의 바퀴살이 있습니다.

위로, 아래로, 좌측으로, 우측으로 테두리와 연결된 것이 바퀴살입니다.

이 바퀴살이 있어야 바퀴가 되는 것입니다.

네 개의 바퀴살은 윤회하는 세계에서 네 가지 종류의 태어남을 말하며,

여기서 바퀴살이 부서진다는 것은 태어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자, 중앙으로부터 위쪽으로 향한 바퀴살부터 오른쪽으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네 개의 바퀴살 중의 하나의 바퀴살은

욕계 공덕행을 해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욕계 천상에 태어나는 바퀴살입니다.

욕계 공덕행은 욕계에 가는 업의 생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오른쪽으로 뻗쳐져 있는 바퀴살입니다.

네 개의 바퀴살 중의 하나의 바퀴살은

색계 공덕행을 해서 색계 천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색계에 태어나는 업의 생성을 말합니다.


세 번째, 중앙에서 아래로 향해져있는 바퀴살을 보겠습니다.

이 하나의 바퀴살은 공덕이 없는 행을 해서

4악도인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4악도에 태어나는 업의 생성을 말합니다.


네 번째 바퀴살은 중앙으로부터 왼편에 있는 마지막 하나입니다.

이 바퀴살은 부동행(不動行)을 해서 무색계의 천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무색계는 무수한 겁을 살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어서 부동행이라고 합니다.


이상 네 개의 바퀴살로 태어나는 것은

12연기 안에서 윤회를 거듭하며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생명의 태어남이란

이 네 개의 바퀴살 중에 하나로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이외에 다른 태어남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몰락이 가져오는 다음생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네 개의 태어남 외에 다른 것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바로 몰락이 아닌 흥왕입니다.


네 개의 바퀴살로 태어나지 않는 업의 생성은

공덕을 짓되, 바람이 없는 공덕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이며 해탈입니다.

이것이 연기의 사슬이 부서져서 윤회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어나는 연기가 아니고, 소멸하는 연기의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욕계 공덕행은 공덕을 짓되

욕계에 태어나길 바라는 반쪽짜리 공덕행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색계 공덕행은 사마타 수행을 해서 색계 공덕행을 쌓되

색계에 태어나길 바라는 반쪽짜리 공덕행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공덕이 없는 행은 불선행으로

당연히 그 과보를 받아서 4악도에 떨어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부동행은 공덕을 짓되 무색계 공덕행이라서

무색계에 태어나길 바라는 반쪽짜리 공덕행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공덕을 짓되 바람이 있는 공덕은 바라는 세계에 태어납니다.

공덕이 없으면 4악도를 바라는 것이라서 4악도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공덕을 짓되 바라지 않는 공덕행을 해야

태어남이란 바퀴살을 부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바라지 말고, 없애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한 것도 바라면 반쪽짜리가 되어 다시 태어나는 과보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선행을 해야 윤회가 끝나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최고의 결과가 옵니다.


그래서 이 길은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닙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는 지혜가 있어야합니다.

과연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지 말아야 되겠다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우리 중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길은 혼자서만 가는 매우 고독한 길입니다.

그렇지만 이 길만이 행복을 얻습니다.


공덕이란 착한 일을 많이 한 힘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공덕이 바라는 것일 때는

윤회계 안에서 영원히 회전하는 것이라서 단지 덕(德)에 머물고 맙니다.

그러나 바라지 않는 공덕행은 덕(德)도 있으면서

도(道)가 함께 있기 때문에 비로소 윤회계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덕(德)도 있어야하지만, 함께 도(道)도 있어야합니다.

이 도가 바로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입니다.

이 통찰지혜만이 바퀴통과 바퀴살을 부술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시 도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바퀴 축과 바퀴 테가 있는 반면에 다시 바퀴의 테두리가 있습니다.

이 바퀴 테두리는 노사(老死)를 의미합니다.


바퀴를 튼튼하고 내구성 있게 만들자면

바퀴살 한쪽은 테두리에 맞추고 다른 쪽은 바퀴통에 잘 맞추어서

바퀴를 구성하는 부분들이 부러지거나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바퀴통, 바퀴 테, 축, 살과 테두리라는 다섯 부분이 모여

하나의 완전한 바퀴를 구성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음 생에 천상의 왕과 같은 지위를 가진 보다 높은 존재로

태어나고 싶은 의도를 가지고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킨다면,

이는 연기에 따라 욕계 공덕행이 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온갖 종류의 악한 행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는 공덕이 없는 행으로서,

반드시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계의 사악도에 태어나는 원인이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색계 범천의 지위를 얻고자 하는 의도로

사마타 선정 수행을 하는 경우에는 색계를 향한 공덕을 짓는 색계 공덕행에 해당됩니다.


또 어떤 색계의 수행자가 물질을 싫어하여,

무색계 범천의 지위를 얻고자 하여, 이런 의도를 가지고 무색계 선정 수행을 하는 경우에는

움직임이 없는 행, 또는 부동행을 하게 됩니다.


이들 네 가지 행(行) 중 하나를 통해 높은 존재로 올라가거나 낮은 존재로 내려가더라도

이 여정은 결국 늙음과 죽음의 틀 안에서 갇혀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들 행위들은 제한되고 조건 지어진

31개의 세간의 영역 안에서만 이루어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색계의 존재로 올라간다 할지라도 노사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사마타 수행의 공덕에 의해 무색계 선정 수행에 이른 자의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닿는 곳은 테두리인 늙어서 죽는 노사(老死)입니다.


우리는 윤회계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바퀴살로 태어나서 죽은 뒤에는

또 다른 하나의 바퀴살로 태어나는 숙명적 필연적 운명의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감옥에 갇힌 운명입니다.

우리의 감옥은 무지와 갈애가 그 집입니다.

우리는 무지와 갈애의 감옥에 갇혀서

영원히 끝없는 죽음을 되풀이 하면서 윤회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무엇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 있고, 무엇을 할지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할지 아는 사람이 되어서 바로 윤회계를 벗어나는 수행을 해서

고통뿐인 이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단절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초기불교 > 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연기와 위빠사나/100  (0) 2011.02.10
12연기와 위빠사나/99  (0) 2011.02.08
12연기와 위빠사나/97  (0) 2011.02.04
12연기와 위빠사나/96  (0) 2011.02.02
12연기와 위빠사나/95  (0) 2011.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