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99

通達無我法者 2011. 2. 8. 22:3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이 깨달음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은

이 수행을 해야만 해탈의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몸과 마음입니다.

몸과 마음은 경험할 수 있는 실재라서 가장 진실한 것입니다.

실재가 아닌 관념은 증명할 수가 없으며,

실답지 못해서 출세간의 진실이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실에 기초하며 초월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과 내생은 다만 현재의 몸과 마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것 자체가 수행의 목적은 아닙니다.

생명이 존재하는 지옥과 천상을 말하는 것도 생명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그 것 자체를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는 원인을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만약 원인을 알려면, 대상을 알아차린 결과로 자연스럽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엇이 확실한 원인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생각으로 원인을 알려고 하면 알아차림을 놓치며,

그렇게 안 원인은 정확하지가 않고,

고정관념에 의한 판단이라서 객관적이지 못합니다.


원인은 너무 많아서 모두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정확한 원인은 수행을 해서 지혜가 나야 비로소 알 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리면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생기면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이

자신의 무명과 갈애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가 나야 비로소 집착을 하지 않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 10장을 계속해서 공부하시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생명이 사는 31개의 세계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가 없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고 죽고 나고 죽고를 거듭하는 동안

우리는 31개의 생명이 사는 세계 속에서 윤회를 되풀이 합니다.

잠시 이 31개의 세간에 대해서 살펴보시겠습니다.


31개의 세간을 31천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생명이 생사유전을 하는 미망의 세계인데,

이것을 세 단계로 나누면 욕계, 색계, 무색계의 3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 유정한 생명들이 윤회하면서 존재하는 세계이므로 3유라고도 하고,

괴로운 곳이므로 고계라고도 하고,

괴로움이 바다처럼 끝이 없기에 고해(苦海)라고도 합니다.


첫째 욕계는 3계 가운데 가장 아래에 있으며

성욕, 식욕, 수면욕의 세 가지 욕망을 가진 생명들이 사는 곳입니다.

윤회 가운데 있는 여섯 가지 존재의 모습 중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등 다섯 가지와

사천왕천, 도리천, 삼십삼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등

6욕천이 욕계에 해당합니다.


둘째는 색계입니다.

색계는 욕계위에 있는 세계로서 천인이 거주하는 곳을 말합니다.

이 세계에 거주하는 생명들은 음욕을 떠나, 더럽고 거친 색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고 미세한 색법에 묶여 있으므로 색계라고 합니다.

즉, 물질적인 것은 있어도 감각기관의 욕망을 떠난 청정한 세계로 남녀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곳을 색계 4선천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무색계가 있습니다.

무색계는 물질세계를 초월한 세계로서 물질을 싫어하며 벗어나고자 하여

4무색정을 닦은 사람이 죽은 뒤에 태어나는 천계입니다.

물질적 존재나 처소가 없기 때문에 공간적 개념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과보의 우월에 따라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의 네 가지 천으로 나뉩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의 세계를 4무색천이라고 합니다.


중생들의 세계를 총칭하는 3계는 여러 세계로 분류되고

각각의 세계에 따라 수명이나 고통의 정도가 다르며

모두 윤회의 과정에 있는 고해라는 점에서는 같은 생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조건 지어진 세간에서 행해지는 그 어떠한 행위도

노사(老死)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세계, 어떤 영역에 다시 태어난다 할지라도 늙음과 죽음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다음 생에서 보다 나은 지위를 얻기 위해 행하는 선한 행위는

결국 노사의 문턱에 도달하게 할 뿐입니다.

여기에 노사로부터의 탈출구는 없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면 죽어야 하고, 죽으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짓는 부도덕하거나 건전하지 못한

불선한 행위 또한 이 바퀴살 중의 하나를 이룹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색계나 무색계가 열반이라고 잘못 믿고 있는 이들은

선정과 신통력을 집중적으로 닦습니다.

선정을 닦는 수행자가 괴로움의 근원인 물질에 대해 집중하여

무색계 선정을 이룰 때 이 또한 바퀴살 중의 하나를 이룰 뿐입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을 한다 해도 결국 윤회계 안에 있는 수행입니다.


이제 끝없는 미래에 어디서 다시 태어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좀 더 나은 곳에서 태어나려고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괴로운 과거와 두려운 미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기 위해서 노력할 것인가, 선택은 온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사마타 수행이며,

고통뿐인 이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다시 교재 8쪽에 있는 12연기의 도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도표를 살펴보면 번뇌를 상징하는 바퀴 테가 남아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무명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번뇌가 소멸하면 무명이 소멸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탐, 진, 치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무명이 지혜로 바뀌어서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이 번뇌의 바퀴 테는 이미 바퀴에 맞춰져 있는 4개의 바퀴살과 함께

바퀴통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제 수레바퀴는 돌 수가 있습니다.

바퀴가 돌면 하나의 바퀴살은 왼편으로, 또 하나는 밑으로 내려가고,

또 하나는 오른 쪽으로 가는 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4개의 바퀴살은 각기 다른 세계에 태어남을 말하며,

이 하나의 바퀴살의 태어남이 회전하는 것은

다른 바퀴살의 태어남도 함께 회전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윤회의 수레바퀴가 돌아간다는 것은 나만 윤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혼자서 윤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업의 과보로 윤회를 합니다.

살고 싶지 않아도 괴로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연기에 의해 윤회가 거듭되는 실상입니다.


어디를 가든 이제 바퀴살들은 테두리 바깥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범천의 세계나 천계 혹은 인간계 어디에 있든

이 길에서 범부가 윤회로부터 벗어날 출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윤회의 바퀴는 오온을 끌고 제 갈 길을 따라 끊임없이 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온이 어디에 닿든 정해진 정착지는 늙음과 죽음뿐입니다.

하나의 바퀴살로 태어나서 생명이 진행되다 

마지막에 다다르는 것은 바로 바퀴 테의 노사입니다.


31천에 사는 모든 생명들은 바퀴살로 태어나서 바퀴 테에 이르러 늙어서 죽게 되고

다시 바퀴살로 태어나는 것을 반복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윤회입니다.


이와 같은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출구를 찾는 것은

붓다가 스스로 체험을 한 뒤에 밝힌 위빠사나 수행으로 가능합니다.


이처럼 부처님에 의해서 노사에서 벗어나는,

윤회가 끝나는 해탈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출구는 그래서 단 하나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 출구가 느낌과 갈애 사이에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다시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를 살펴보겠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인 무명과 갈애는 괴로움인 오온을 조건 짓는 주범들입니다.


윤회의 전체 과정에서 볼 때

집제와 고제는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도제와 멸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괴로움의 원인인 집제와

괴로움인 고제의 영역 바깥으로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도제와 멸제의 길을 피해왔으며

귀중한 시간을 바쳐 연기가 도는 시간을 늘려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고통의 기간을 연장시켜 온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해 온 것은 괴로움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괴로우려는 노력만을 한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시 도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굴레의 관점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무명, 갈애, 집착은 번뇌의 굴레입니다.

범부가 짓는 모든 업의 생성의 결과로 과보의 굴레인 오온이 일어납니다.

즉, 업의 굴레로 인하여 다시 과보의 굴레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끝없는 윤회의 순환 과정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굴레라고 하는 말은 ‘왓따(vatta)’라고 하는데

이것은 회전, 윤회, 상속 그런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제의 관점에서는 집제와 고제의 순환이 있습니다.

굴레의 관점에서 볼 때는 번뇌의 굴레와 업의 굴레 그리고 과보의 굴레의 순환이 있습니다.


번뇌의 굴레와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는 또 다른 의미로는 윤회를 뜻합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행위를 하게 하여 업의 굴레를 만들고,

행위를 하면 그 행위에 따른 과보가 있어서 그 과보가 굴러 갑니다.


다시 그 과보의 굴레가 새로운 번뇌를 일으키고,

그 번뇌가 행위를 하게 해서 업의 굴레를 만들고,

그 업이 다시 과보의 굴레를 순환시킵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세 번째 공간과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과거, 현재, 미래의 반복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연기의 고리가 깨어질 때만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연기의 고리가 재연결 되는 한, 고통의 기간은 연장될 뿐입니다.


윤회하는 기간을 짧게 하고 싶다면

우리는 번뇌의 굴레와 업의 굴레와 과보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수행자가 이번 생에서 법문을 듣거나 책을 읽어

연기와 사성제에 대한 큰 지혜를 얻을 기회를 얻었다면

반드시 연기의 수레바퀴를 이루는 테두리와 바퀴통, 축, 막대와 바퀴살을

부서뜨려야만 하는 결심을 해야만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수행자일지라도

단순한 바람만으로는 도와 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바람은 관념일 뿐입니다.

바람은 무엇으로도 바람에 그칠 뿐입니다.

이제 바라지 말고 실천적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 실천적 수행이라는 것이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이

무명을 밝은 지혜로, 갈애를 바라지 않음으로 바꾸어서

해탈이라는 마지막 목적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팔정도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나가는가 하는 그 길입니다.

팔정도는 계, 정, 혜 삼학입니다.

그 팔정도의 바른 길을 갈 때 우리가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해탈의 길을 향해서 나아갑시다.

그것이 팔정도의 계, 정 ,혜 삼학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노력이 아니고,

일상의 모든 일을 할 때 ‘그렇네.’ 라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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