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00

通達無我法者 2011. 2. 10. 20:3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범부가 가진 세간의 마음과

수행자의 출세간의 마음은 다릅니다.


세간은 출세간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출세간은 세간을 존중합니다.


세간에는 알아차림이 없어 관용이 없지만,

출세간에는 알아차림이 있어서 관용이 있습니다.


범부는 즐거울 때 감각적 욕망을 집착하지,

수행자는 즐거울 때 즐거움을 알아차립니다.


범부는 괴로울 때 화를 내지만,

수행자는 괴로울 때 괴로움을 알아차립니다.


범부는 덤덤할 때 무지에 빠지지만,

수행자는 덤덤할 때 덤덤한 것을 알아차립니다.


범부는 지혜가 없어 고통을 만들지만,

수행자는 지혜가 있어서 고통을 끊습니다.


범부는 가야할 길을 모르는 사람이고,

수행자는 가야할 길을 아는 사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 11장을 공부하시겠습니다.

제 11장은 ‘연기의 길을 따르는 자는 눈먼 자의 길을 따르는 자다’ 에 대한 것입니다.


연기는 부처님에 의해서 발견된 진리입니다.

부처님이 연기를 발견하시기 전에도 연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연기를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을 하신 뒤에 불선업의 과보가 다 하고

그리고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를 찾아내셨습니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의 기본적인 지혜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셔서 결국 모든 번뇌를 여의셨습니다.

번뇌를 여의었다는 것은 연기의 길을 벗어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연기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며

아는 자만이 연기의 길을 벗어나서 괴로움에서 해방됩니다.


연기는 눈먼 자가 가는 길입니다.

여기서 눈먼 자라는 것은 범부를 가리킵니다.

눈먼 자는 보고도 못 보는 자이며 불선행을 하는 사람이고

선행을 한다고 해도 무엇인가를 바라고 선행을 합니다.


어떤 것이나 바라는 한 연기는 회전합니다.

오직 바라지 않을 때라야 연기가 회전하지 않습니다.

범부는 바라는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12연기를 회전시켜서

결코 윤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범부를 또 다른 말로는

보통 사람이라고 하거나 진리를 모르는 사람,

또는 작은 것을 탐하고 큰 것을 놓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윤회를 계속하는 사람이고 사성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명과 갈애로 사는 사람입니다.

범부는 번뇌에 얽매여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것이 남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범부 다음에는 현자가 있습니다.

현자는 어질고 총명해서 윤회를 끝내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자가 있습니다.

성자는 현자가 완성된 사람입니다.

성자는 세속의 번뇌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열반을 성취하여 연기의 길을 벗어난 사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 살펴보십시다.

여러분이 범부이십니까? 현자이십니까? 성자이십니까?


만약 당신께서 범부라면 이제 현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약 당신께서 현자라면 이제 성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성자라면 아라한의 도과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여기서 무엇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수행을 해서 더 높은 정신세계를 얻을 수 있는

출발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무명이라고 하며

이 무명이란 구름에 시야가 가려진 사람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범부입니다.


이러한 범부도 엄격히 분류하자면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눈먼 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선한 자입니다.


눈먼 자는 눈을 떠서 보고도 진리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눈에 먼지가 붙은 자’ 라고 합니다.

이 먼지가 바로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눈먼 자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공덕이 없는 불선행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선이 있어도 그것이 선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범부이지만 선한 자는

좋은 지위를 얻거나 다음에 잘 태어나기 위해서 공덕을 짓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바람이 있는 공덕행을 해서 반쪽짜리 공덕행을 쌓는 사람입니다.


선한 일을 하지만 바람이 있는 공덕행을 해서

윤회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범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범부 중에서 사성제에 대한 무지한 사람을 눈먼 범부라고 합니다.

눈먼 범부의 마음은 항상 들떠 있고 여기저기로 방황하기를 원합니다.

사실, 방황은 자신이 방황하는 것을 좋아서 합니다. 그래서 범부인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는 것을 모르고, 괴로움의 원인을 모르고,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팔정도를 모르는 눈먼 범부는

마치 어둠 속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눈앞에 있는 함정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은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함정에 빠져서 어떤 괴로움을 겪고 있는가를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눈먼 범부가 있고 다음에 선한 범부가 있습니다.

선한 범부는 내생에 보다 높은 지위를 얻어

욕계천인이나 색계, 무색계의 범천이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공덕을 짓는 행을 하되 바람이 있는 공덕행을 합니다.

공덕을 바라는 이러한 선한 범부를 오른쪽 다리로 걸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빠르게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눈먼 범부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 온갖 종류의 덕이 없는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는데

이것은 왼쪽 다리로 걷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두 가지 종류의 범부는 사성제에 대한 무명으로 인해 이러한 행위들을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이 마치 눈먼 사람의 걸음걸이와 같은 것입니다.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은 사성제에 대한 무지로 무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행을 하되 바람이 있는 공덕행을 하는 오른쪽 다리와,

선하지 못한 공덕이 없는 행을 하는 왼쪽 다리로 걷는 것과 같습니다.


공덕을 짓는 행이나 공덕이 없는 행을 하는 사람은

모두 사성제에 대한 무지로 두 개의 다리로 걷는 범부의 걸음걸이인 것입니다.


이때의 무지가 바로 눈먼 장님이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윤회계를 떠도는 범부는 오른발, 왼발이 모두 성하지 못해서

바른 길을 찾아서 걷지 못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오온이 괴로움의 진리로서

비참하고 혐오스럽고 괴로움이 가득하여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나서

보시를 행한다면 이 보시는 바른 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온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알고 행하는 보시이기 때문입니다.

오온이 괴로움이라고 알고 행하는 보시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보시가 바로 흑과 백이 섞이지 않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선입니다.


그러므로 바라지 않는 보시를 할 때만이 완전한 선입니다.

왜냐하면 바라지 않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가 끊어져서 연기가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온이 괴로움이라고 알고 하는 보시는 오온을 위해서 하는 보시가 아니고

바람이 없는 순수한 보시라서 이것을 출세간의 보시라고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는 자선이나 증여, 또는 관대함을 말합니다.

보시는 선한 마음으로 하는 행으로서 먼저 관용이 생겼을 때

자연스럽게 뒤따라 일어나는 행입니다. 그러므로 관용과 보시는 같은 말입니다.


보시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재물을 보시하는 것과 법을 설하는 보시가 있습니다.

우리가 따뜻한 미소, 따뜻한 말 한마디도 모두 법보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꼭 재물만 보시하는 것이 보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어떠한 기대도 없이, 또한 내생에 보다 나은 지위를 얻고 싶다는 바람이 없이

행하는 보시는 윤회의 힘을 멈추겠다고 하는 소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괴로워서 짜증을 내며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과, 지혜가 나서 윤회를 멈추는 것은 다릅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다음 생에 어떤 형태로든지 오온을 갖지 않겠다는 지혜가 있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선업의 힘으로

윤회를 가져오는 업의 힘을 깨부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도 바람이 없는 선과 바람이 있는 선이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있는 선은 윤회를 하기 때문에 무명의 지배를 받아서 불완전한 선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없는 선은 출세간의 선으로 윤회가 끊어지기 때문에 완전한 선입니다.


사실, 완전한 선은 선을 뛰어넘어 선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을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선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선입니다.

이러한 선은 항상 반대편의 불선이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가 없는 선은 불선이 섞이지 않아 완전한 선입니다.


이것을 무인작용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아라한과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불성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선심과 불선심, 그리고 선과보심과 불선과보심이라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원인과 결과가 없는

오직 모두 선한 이러한 무인작용심을 갖는 그것이 목표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마음이고 아라한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길고 긴 윤회의 길에서 열반을 얻기 전까지 인간은 비참한 존재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생에 보다 높은 천신계에서

범천의 왕으로 태어나 번영과 행복을 누리기 바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다.


과연 존재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범천의 왕인가요? 아닙니다.

결국은 윤회를 끝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시를 행하는 자는 나이며,

다음 생에서 보시의 과보를 거두는 것도 나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 안에 그릇된 견해인 나, 혹은 자아의 개념이 있습니다.

내가 베푸는 자이고, 내가 공덕의 이득을 받는 자라는 견해는

자아가 영원하리라고 생각하는 상견입니다.


수행자 여러분들은 이러한 관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업인 보시 안에 두 가지 불선한 것이 함께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익을 거두려고 하는 욕망인 갈애와

내가 그 이익을 받는다고 하는 사견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견은 아득한 옛날부터 인간을 지배해 왔기 때문에 쉽게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보시는 유익한 선업이나 바라는 마음이 섞이게 되면 혼합된 업이 됩니다.

그래서 윤회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보시 안에 두 가지 불선이 있습니다.

보시를 할 때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과,

내가 과보를 받는다는 것, 이것 두 가지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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