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08

通達無我法者 2011. 2. 17. 23:47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노력은 이미 일어난 해로운 법을 버리려는 노력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운 법을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 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을 일어나게 하려는 노력과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을 지속시키려는 노력이 있습니다.


이미 일어난 해로운 법은 일어났다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인 해로운 법으로 인해

후회와 고통이 계속된다면 이 기억이 다시 해로운 법을 새로 일으킵니다.


해로운 법을 버리려는 노력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해로운 법이 일어난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해로운 법을 알아차리면 그 순간에 기억이 정지되고 기억을 하지 않아

다시 해로운 법을 일으키지 않게 됩니다.


해로운 법을 버리려는 노력이나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은

대상이 일어날 때 마다 일어난 대상을 즉시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유익한 법이 일어나게 하는 노력이나 지속하려는 노력도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자연스럽게 유익한 법이 일어나게 됩니다.


수행은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은 장애를 넘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 악한 의도, 혼침과 게으름, 들뜸과 후회, 의심이란 장애를 넘어야 하며

망상, 통증이 일어날 때마다 일어난 순간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은 고정관념과 진실의 맞닥뜨림이고

습관과 새로운 질서의 맞닥뜨림이고

선하지 못한 것과 선한 것의 맞닥뜨림이고

어리석음과 지혜의 맞닥뜨림입니다.


여기서 맞닥뜨림은 결코 대결이 아닙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서 아는 것이 맞닥뜨림입니다.

바라지 않고 없애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노력은 바람이 없고 선한 것을 위해서 해야 하며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지 않고 적절하게 해야 합니다.

노력이 지나치면 들뜨게 되어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불퇴전의 노력을 할 때만이 비로소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시간에도 팔정도의 정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팔정도의 마지막이 집중이지만 집중도 수행의 과정이지 완성은 아닙니다.

집중을 통해서 지속적인 지혜의 발전 단계를 거칩니다.

이러한 집중의 과정을 거치면 지혜인 정견과 정사유가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집중이 결코 수행의 완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집중이 지혜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에 이르려면 집중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제가 예전에 미얀마의 저희 스승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수행이 잘 안 되는데 집중을 위한 특별한 가르침이 있으면 알려주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스승님께서는 저를 찬찬히 쳐다보시면서 잠시 말씀을 멈추셨습니다.

그런 뒤에 그윽이 저를 쳐다보시면서

“너는 무엇 때문에 집중을 하기를 바라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집중이 수행자들에게는 최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승께서는 왜 집중을 하려고 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수행이 안 되면 안 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집중을 얻는 방법이라는 것도

묵시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궁극적으로는 최고의 지혜로 가기 위해서는 집중에서도 벗어난

지혜의 단계에 이르러야 도, 과를 성취한 열반에 이른다는 사실을

스승께서는 묵시적으로 시사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수행자는 이런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실제로 집중에서도 벗어나야 하지만 사실은 최고의 지혜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지혜도 마침표를 찍으면 박제됩니다.

항상 마음은 흐르는 과정에 있으므로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침표를 찍지 말고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지혜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는 집중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집중에 머물면 지혜가 계발되지 않습니다.

집중은 단지 선정의 고요함에 머물 뿐이지 미세한 번뇌를 뿌리 뽑지는 못합니다.

바로 통찰 지혜가 계발되어야 비로소 미세한 번뇌가 뿌리 뽑힙니다.


그래서 대상과 하나가 되는 사마타 수행을 해서 선정의 고요함을 얻은 뒤에

반드시 대상을 통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지혜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선정의 세계에서는 갈 길을 모르는 사람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으면 갈 길을 알아서 언젠가 괴로움을 해결하여 윤회를 끝냅니다.

집중이 왜 번뇌를 뿌리 뽑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번뇌가 뿌리 뽑히는 것은 팔정도인 계, 정, 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번뇌가 있고 이 번뇌가 어떻게 뿌리 뽑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번뇌는 세 가지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번뇌는 가장 깊은 층과 중간 층 그리고 표면층이 있습니다.


첫 번째 가장 깊은 층은 잠재적인 성향입니다.

깊은 층에 있는 잠재적인 성향의 번뇌가 잠복해 있고 표면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조건이 성숙되면 번뇌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잠재적인 성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보이지 않게 정신과 물질을 조정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무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미세한 번뇌입니다.


두 번째 중간층은 현시의 단계적 성향입니다.

이것은 어떤 자극이 있으면 즉각 나타납니다.

현시적인 번뇌가 있을 때 선하지 못한 생각이 일어나고 나쁜 감정과 의도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조건이 성숙되면 번뇌가 일어납니다.


세 번째 표면층은 번뇌가 현시의 단계를 넘어서

신, 구, 의 3업을 일으키도록 강력한 동기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항상 화를 내고 욕심을 부립니다.

세 번째 번뇌의 수준은 비도덕적이고 범죄를 일으키는 단계의 수준입니다.

이것은 거친 번뇌에 속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층의 번뇌를 부수는 데는 바로 계, 정, 혜가 필요합니다.

먼저 계, 정, 혜의 계에 해당하는 부분을 알아보겠습니다.


알아차림에 의해 지켜지는 계율의 단계는 세 번째, 표면층의 번뇌를 억제합니다.

대상을 알아차리고 계율을 실천하게 되면

선하지 못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억제하여 범죄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계, 정, 혜의 정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해서 집중의 상태가 되면 두 번째 중간층의 번뇌를 억제합니다.

집중의 상태가 되면 이미 생겨난 번뇌를 제거하고 앞으로 계속 생겨나는 번뇌를 막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집중의 힘은 미세한 번뇌인

잠재적 성향의 번뇌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집중은 단지 중간 단계의 과정에서 안전장치의 역할을 할 뿐이지

번뇌 자체를 소멸 시키는 힘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계, 정, 혜의 혜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고요한 마음에 의해서 집중이 계속되면 통찰지혜가 생깁니다.

이 지혜에 의해서 첫 번째, 가장 깊은 층의 번뇌인 잠재적 성향의 번뇌가 제거됩니다.

지혜는 첫 번째 단계의 잠재적 성향의 번뇌 뿐 아니고

중간단계와 표면단계의 모든 번뇌를 종식시킵니다.


지혜는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모든 장애를 걸림 없이 통과합니다.

그런 장애를 없애려고도 하지 않고 다른 것을 바라지도 않기 때문에

이미 지혜 앞에서는 장애가 아니고 알아차릴 하나의 현상으로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번뇌가 생길만 해서 생긴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번뇌가 힘을 잃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미세한 번뇌까지도 해결합니다.


바로 이 지혜가 무슨 주술적인 힘이 있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상, 고, 무아를 알아서 모든 것이 변하고, 괴로움이며,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집착을 하지 않아서 장애를 그냥 통과하는 것입니다.

번뇌가 있어도 스스로 걸리지 않기 때문에 이미 번뇌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을 해서 얻는 지혜입니다.

이처럼 지혜만이 모든 번뇌를 부술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혜의 반대는 무명입니다.

어리석으면 지혜가 없고 지혜가 있으면 어리석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무명은 지혜로서만이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무명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명이라고 해서 전혀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지혜보다 무명이 많아서 무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선한 마음과 선하지 못한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중은 아직 무명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선정의 고요함에 머무는 집중에 안주해서는 결코 안 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말은 여러분들이 사마타 수행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마타 수행의 집중의 힘을 바탕으로 다음 단계의 통찰 지혜 수행인

위빠사나 수행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궁극의 진리를 얻습니다.

궁극의 진리라는 것이 바로 번뇌를 불태우는 열반을 말합니다.


이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차이에 대해서 충분히 아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부처님께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배경도 충분하게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결론은 지혜로서만이 무명을 부술 수 있다는 것이고,

지혜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지혜로 그치지 않고 번뇌를 불태우는 도, 과를 성취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의 도와 성스러운 도는 다릅니다.

위빠사나의 도는 지혜이고 성스러운 도는 열반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릅니다.


팔정도 계, 정, 혜는 도, 과를 얻는 도의 길입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팔정도의 계(戒)는 도덕적인 정신을 함양시키며

비윤리적인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합니다.

그리고 정(定)은 들뜸이 없이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켜 고요함이 생기도록 합니다.

그리고 혜(慧)는 모든 사물의 이치를 통찰하여 갈애와 집착을 여의게 합니다.


이러한 팔정도 위빠사나의 도를 통하여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성스러운 도를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만큼 수행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저마다 자기의 수준에 따라서

수행이 어떻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하신 이러한 일목요연한 가르침을 따른다면

수행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기본자세이며 이런 자세여야만이 수행이 발전합니다.


수행은 스승과 제자의 가르침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험하지 않은 정신세계는 미지의 세계라서 누구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가능한 것을 실천하는 단순한 행위입니다.


인간의 이상(理想)은 무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이 인간의 번뇌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수행자는 단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제한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축적된 성향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것을 지켜보는 수행이 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먼저 잘 안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만 알아차리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작은 지혜의 문턱 하나를 넘는 것이 천년의 세월이 걸릴 수도 있고

천만번의 생각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가장 존귀한 것은 다른데 있지 않고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현재로 와서 지금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통찰지혜를 통하여 무상, 고, 무아를 알아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궁극의 열반을 성취하셔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팔정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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