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06

通達無我法者 2011. 2. 12. 23:0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세상에는 관념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라는 두 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관념의 세계는 겉으로 드러난 모양, 명칭, 개념을 말합니다.

실재의 세계는 모양 안에서 인식할 수 있는 실재를 말합니다.


손은 부르기 위한 관념이고 손에 있는 따뜻함은 실재입니다.

통증은 부르기 위한 관념이고 찌르고 당기는 느낌은 실재입니다.


사마타 수행의 대상은 관념이고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실재입니다.

관념은 눈에 보이는 것이나, 부르기 위해서 설정한 명칭입니다.

실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몸과 마음에 있는 느낌입니다.


진리는 관념적 진리와 궁극적 진리 두 가지가 있습니다.

관념을 대상으로 수행을 할 때는 선정의 고요함을 얻습니다.

실재를 대상으로 수행을 할 때는 통찰 지혜를 얻습니다.

선정은 고요함을 얻고 통찰 지혜는 열반을 성취합니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말하는 선문답은

모두 관념을 보지 말고 실재하는 성품을 보라는 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시간에는 팔정도의 일곱 번째 정념(正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념은 바른 알아차림을 뜻합니다.

정념을 빨리어 ‘삼마사띠’라고 합니다.

삼마는 바르다는 뜻이고

사띠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기억이고 둘째는 알아차림입니다.


사띠라고 하는 말의 이때의 기억은

과거를 기억하는 그런 의미의 기억이 아니고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알아차려야 하며

알아차렸을 때는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차려야 할 대상을 법이라고 하는데

법은 항상 와서 보라고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대상이 드러내 보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알아차림이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알아차리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대상과 분리해서 알아차립니다.


수행이란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깨어서 아는 알아차림이 있어야

비로소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대상과 아는 마음과 알아차림이란

이상의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고 알아차림이 없으면

이것은 수행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수행자는 알아차림을 통해서

궁극의 진리인 무상 고 무아의 법을 봅니다.


알아차림은 항상 현재에 있기 때문에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의 대상은 몸과 마음입니다.


지나간 과거를 생각할 때는 이것을 알아차리면

과거를 생각하는 현재의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할 때에도

다시 미래를 생각하는 이것을 알아차리면

미래를 생각하는 현재의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면 시제가 항상 현재로 옵니다.


수행자 여러분!

시제가 현재로 온다는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는 실재입니다.

진실은 실재하는 것에만 있습니다.

실재가 아니면 모두 관념이며, 죽은 것이며 사실이지 않습니다.

실재하는 뜨거운 현재에만 법의 성품이 담겨져 있습니다.


잘 달구어진 곳에서 불이 나듯이, 잘 비벼진 나무에서 똑같이 불이 나듯이,

지혜는 항상 현재의 이 순간의 집중이 된 상태에서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 현재는 계속 변합니다.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가 현재가 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현재를 알아차리고 있으면

새로운 현재가 계속되기 때문에

수행자가 다른 곳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수행의 상태가 지속될 때 비로소 고요함과 지혜가 성숙됩니다.


현재를 알아차리면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두려움이 없어

누구나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신체로 접촉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는 것과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에는

주의 깊게 알아차리지 못하며 깨어서 알지를 못합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알고, 고정관념으로 알고, 알고 있는지도 모르고 압니다.

이것에는 알아차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알아차림은

어떤 선입관도 없이 그냥 놓여 있는 상태 그대로의 실재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렸을 때만이 존재하는 것들의 일반적 특성을 비로소 알 수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의 일반적 특성을

또 다른 말로는 보편적 특성이라고 하는데 그 특성이 바로 무상, 고, 무아입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진리는 특별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고,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특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를 알지 못하면 갈애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갈애가 끊어지지 않으면 집착을 하게 되어 끝없는 윤회의 과정이 연속됩니다.

윤회가 계속되는 한,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진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공통이 되는 특성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상, 고, 무아입니다.

이러한 법은 오직 알아차림에 의해서만이 알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는 먼저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려서

그것들이 원인과 결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안 뒤에,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실재인 무상, 고, 무아를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이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알아차려야만 중도적 관점에서

대상을 치우침 없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자각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이 알아차림에 의해서만이 지혜가 개발되므로,

우리가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지만,

알아차림이 없으면 개념을 설정하여 개념들의 구조물을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빨리어로 ‘빠빤짜’라고 합니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는 희론(戱論) 이라고 합니다.

이 희론(戱論)은 합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장식이라고도 합니다.

꾸며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장엄하게 꾸미지 않습니다.

무엇을 드러내 보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수행자에게는 갈애가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꾸밀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관념의 세계에서는 실재를 모르기 때문에 장엄하게 꾸밉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적 구조물을 쌓는 빠빤짜입니다.

이러한 희론은 합성을 하기 때문에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어서

일정한 간격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빠빤짜를 가지고 있는 한 진실과의 괴리가 불가피합니다.

결과적으로 관념을 꾸며서 스스로에게 투사하게 하여

올바른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리면 현장에서 즉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실재하는 것을 통찰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는 것이 바로 희론이 설정될 여지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념은 팔정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팔정도의 정념이 과거를 기억하는

그런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아차림의 기억은 알아차릴 것을 잊지 않는 기억이라는 것을 유념하셔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알아차림을 말하지만 바른 알아차림은 단 한 번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사실 단 한 번을 제대로 알아차리면 두 번, 세 번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른 알아차림은 단 한 번을 제대로 하기도 어려운 그런 깨어있는,

대상을 정확히 겨냥하는 알아차림을 말합니다.


이것이 생각이 아닌 수행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정신적 마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바른 알아차림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지막으로 팔정도의 여덟 번째는 정정(正定)입니다.

정정은 바른 집중이란 뜻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정정진과 정념과 정정은

계, 정, 혜 삼학에서 집중이란 뜻의 정(正)에 속합니다.

집중을 빨리어로 사마디라고 하는데 이 말은 사마타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마디의 정확한 뜻은 ‘고요한 마음의 집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냥 집중이 아닙니다.

앞에 반드시 고요한 마음이 있어서 집중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고요한 마음은 선한 행위를 할 때만이 고요하고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할 때는 결코 고요한 마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면 가장 먼저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때 알아차림이 있으면 번뇌가 들어오지 않아 계율이 청정해 집니다.

그래서 수행은 항상 계로 시작을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으로 시작을 해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반드시 고요함이 옵니다.

이 고요함이 지속되는 것이 집중입니다.

그래서 계와 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정이 지속되면 대상의 성품을 아는 지혜가 따릅니다.

그래서 바야흐로 계, 정, 혜가 완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집중을 뜻하는 정(正)이 있어야 마지막인 지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집중이 갖는 의미는 절대적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의 목표는 지혜입니다.

하지만 처음 수행을 시작한 사람은 일차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집중을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결과로 마지막에 비로소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단계가 있다라고 알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기초를 충실히 해나가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집중은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적 요소를 강화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면 잡다한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아서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는 가능을 합니다.


이 때 집중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들떠 있는 상태에서는 마음을 하나에 머물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것은

꼭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을 모으는 것과 마음이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은 다릅니다.

바른 집중과 일반적인 집중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바른 집중은 알아차림을 가지고 대상을 겨냥해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나는 집중을 바른 집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선한 집중입니다.


그러나 감각적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집착을 하는 집중은 바른 집중이 아닙니다.

이때는 바른 알아차림이 없습니다.

어쩌면 도둑이 물건을 훔치기 위해서 고요하게 집중을 하는 것은

우리가 수행을 할 때 하는 집중보다 훨씬 더 밀도가 높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집중은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하는 집중이라서

바른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바른 집중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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