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14

通達無我法者 2011. 2. 20. 23:0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다툼에는 자신이 우월하다는 자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자아를 강화해 주는 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수행은 대상과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타난 현상을 단지 지켜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나타난 대상과 싸우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싸우게 되면 자꾸 싸우게 되고

나중에는 싸우는 것을 집착하여 좋아서 싸우게 됩니다.


수행 중에 나타난 대상과 싸우게 되면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반응한 것입니다.

수행 중에 나타난 대상과 싸우지 않는 것은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분리해서 지켜보는 것입니다.


대상과 하나가 되면 선정의 고요함이 있고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면 위빠사나의 지혜가 있습니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망상과 통증, 졸음, 가려움,

이런 것들이 나타날 때 대상들과 싸워서는 안 됩니다.

괴로움, 슬픔, 비탄과도 싸워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나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전사가 아니고 무엇이나 알아차려서 받아들이는 관용이 있는 사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 13장 유신견의 원인과 결과에 관해서 공부하시겠습니다.


유신견을 빨리어로 ‘사까야디띠’ 라고 합니다.

빨리어 ‘사까야’ 는 ‘사’ 와 ‘가야’ 의 합성어입니다.

‘사’ 는 있다, 실재한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이며 ‘가야’ 는 몸, 신체를 말합니다.

이것을 합쳐서 ‘사까야’ 라고 합니다.


이는 오온의 실재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디띠’ 가 붙으면 잘못된 견해라는 의미가 생깁니다.

그래서 ‘사까야’ 와 ‘디띠’ 를 붙이면 ‘사까야디띠’ 가 됩니다.

그래서 ‘사까야디띠’ 가 유신견이라는 용어입니다.


유신견은 오온이 나라고 하는 잘못된 견해를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유신견이란 이 몸이 나의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이 마음이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지혜를 가지고 몸을 바르게 보면

단지 몸이 있다는 ‘유신(有身)’으로 압니다.

그러나 몸을 잘못된 견해로 보면 이것이 나의 몸이라는 ‘유신견(有身見)’이 생깁니다.


여기서 ‘유신’ 과 ‘유신견’ 은 다릅니다.

마음을 바르게 보면 단지 마음에 불과하다는 ‘무아’ 로 압니다.

그러나 마음을 잘못된 견해로 보면 이것이 나의 마음이라고 아는 자아견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것을 진아,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아가 아닌 진아, 주인공, 개아, 참나는

‘사까야디띠’ 라는 유신견에 해당되어서 이것을 잘못된 견해라고 말합니다.


마음은 있지만 나의 마음이 아니고

단지 마음에 불과하다고 할 때 ‘무아’ 라는 정견이 일어납니다.

내 몸, 내 마음이라고 알면 사견(邪見)이고

단지 몸과 마음이라고 알면 그것은 정견(正見)입니다.

이러한 사견은 모든 괴로움과 윤회의 원인이며

바로 정견은 깨달음과 윤회가 끝나는 원인이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산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윤회한다는 것은 고통이 연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은

‘내가 있다’ 고 하는 유신견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이처럼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유신견은 왜 생기는 가요?

바로 몸과 마음을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 집착의 시작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무지해서 바라기 때문에 집착을 하게 되어 고통을 끝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시작과 연속은 몰라서 바란다는 것입니다.

몰라서 바라는 것이 바로 기복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12연기의 근본원인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이 무명과 갈애는 지혜가 나야 사라지는데, 이 지혜가 무아입니다.

그래서 유신견 때문에 무명과 갈애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끝없는 갈애를 일으켜야만 됩니다.

그 갈애가 바로 집착을 하게 되고, 집착이 업의 생성을 일으키고,

업의 생성이 태어나게 해서 미래에 늙어서 죽는

이 괴로움을 끝없이 겪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연기의 근본원인은 무명과 갈애이지만

그 무명과 갈애를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바로 유신견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적 교리가 무아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견은 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 것일까요?

오온을 실재하는 자아, 나, 혹은 자신이라고 여기고

오온에 집착할 때 바로 사견이 생깁니다.

즉, 오온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거나 자아, 영혼, 자신,

또 나라고 생각할 때마다 사견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사견은 31개의 존재의 영역 안에서 가장 나쁘고도 해로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잘못된 것 가운데

가장 나쁘고 해로운 것은 바로 그릇된 견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그릇된 견해가 바로 유신견입니다.


또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0가지의 유신견은 존재를 행복한 세계로 인도하지 못하고 그 대신 비참한 세계로 끌어내린다.

완두콩 크기만 한 자갈돌이라도 결코 물 위에 뜰 수 없듯이

유신견을 가진 존재는 윤회의 표면으로 결코 떠오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유신견은 자아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래서 욕망의 세계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번뇌에 속합니다.


지난 시간에 유신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유신견은 20가지가 있는데 오온이 자아라는 믿음 5가지,

자아가 오온을 소유한다는 믿음 5가지,

오온 안에 자아가 있다는 믿음 5가지,

자아 안에 오온이 있다는 믿음 5가지입니다.


이 유신견은 수다원이 되면 일시적으로 소멸되고

아라한이 되어야 완전하게 소멸되는 매우 큰 힘을 가진 번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유신견을 가지고 있으면

윤회의 표면에 결코 떠오를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완두콩을 유신견으로 비유하였을 때 물 위의 표면은 윤회가 끊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윤회를 마차의 수레바퀴가 회전하는 것으로 비유했을 때의 표현입니다.


수레바퀴의 축은 근본원인으로 무명과 갈애이고

마차의 바퀴살은 태어남이고 마차의 바퀴 테는 노사를 말합니다.

윤회가 끝나는 것은 노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이는 마차의 바퀴 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물 위로 떠올라 윤회가 끝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도둑질을 하고 살인을 하고 나쁜 짓을 했어도

그것보다 가장 큰 것은 유신견입니다.

잘못된 것을 했어도 알아차림에 의해서 윤회를 끝낼 수 있지만

유신견을 가진 자는 영원히 무명과 갈애를 집착하므로

결코 윤회의 표면에 떠오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무아를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유신견은 62가지 사견의 번식지이자 출생지입니다.

유신견에 의존하여 온갖 종류의 사견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머리카락에 불이 붙는 것과 같이, 가슴에 창이 찔린 것과 같이

비구는 유신견을 제거하기 위해 알아차리는 수행에 힘써야 한다.’ 고 설법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머리카락에 붙은 불처럼 더 화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가슴에 창이 찔려서 철철 피가 흐르는 것보다 더 위급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부처님은 머리카락에 붙은 불과 가슴에 박힌 창을 빼는 것과 똑같이

유신견을 제거하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내가 있다는 이 생각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그리고 매우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윤회를 끝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열반의 문턱에 한 발도 들여놓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몸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조건에 의해 생긴 결합체일 뿐이지, 이것이 나의 몸은 아닙니다.

언젠가부터 알 수 없는 무수한 세월 동안에 나라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아서

무조건 나의 것이라고 하지만 그 실체를 지혜로 보면

이것은 결코 나의 몸이 아니고 조건에 의한 몸입니다.


단지 이것을 몸이라고 부를 뿐이고, 그 몸을 나의 몸이라고 부를 뿐이지,

이것은 결코 내가 소유하는 몸이 아닙니다.

이렇게 소유할 수 없는 몸을 내 몸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집착이 붙습니다.

그 집착으로 인해서 우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내 몸이 아닌 것을 내 몸이라고 아는 것이 바로 무지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이 있어서 제가 말을 하고 여러분은 듣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지

이 마음을 소유하는 나는 없습니다.

이 때 항상하는 자아가 있지 않습니다.

순간순간의 마음들이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입니다.


조금 전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는 마음만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있지만 나의 마음이 아닌 것이 무아입니다.


무아는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있는 마음이 단지 항상하지 않고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토록 나라는 소유가 붙으면 대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관념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괴로움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만일 어떤 사람이 유신견을 가지고 보시와 지계, 수행을 한다면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세계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도과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유신견을 가진 자는 부모를 살해하거나 심지어 부처님께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이 있어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에게 어떤 불선의 법도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자신이 붓다가 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하여 붓다를 살해하려고 한

데와닷따를 부추긴 것이 바로 이 유신견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선하다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관용, 지계, 수행입니다.


이 때 관용은 받아들이기 때문에 베푸는 보시를 수반합니다.

왜 보시라는 말이 나오는가요? 보시는 관용이 있을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선행은 자신과 남에게 모두 베푸는 것입니다.

바로 관용과 보시가 있고, 그리고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유신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있다는 자아, 이것이 나의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이러한 견해가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제도 또 자아를 주장하셔야 되겠습니까?

이제 유신견의 폐해를 알아서 우리가 한발 더 가까이 깨달음의 세계로 다가가셔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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